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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혜정 maya Sep 27. 2024

구원자가 된다는 것






* [타로카드 읽는 가게'는 소설입니다. 모티브나 컨셉외의 모든 인물과 나오는 사연은 모두 허구입니다.

* 플라워 에세이 '일 년 열두 달 흔들리는 꽃'이 '꽃이 필요한 모든 순간(빌리버튼)'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전국 온/오프라인 서점에서 만나요!
















우리는 모두 옹기 종기 모여 앉았다. 눈 내리는 겨울의 해는 일찍부터 조용히 저물어 어린 강아지들은 깨끗하게 정돈된 집에 들어가 곤히 잠들었고 몇몇 개들은 개껌을 질겅이거나 때 탄 인형을 가지고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다. 나를 포함한 봉사자들과 보호소의 직원들은 한 쪽 구석의 원형 탁자에 둘러 앉았다. 사람들의 눈이 반짝거렸고 진주는 내 등뒤에 서서 그 모습을 매우 즐겁다는 눈으로 싱글거리며 내려다 보고 있었다. 내 맞은 편에 앉은 보호소의 막내 직원은 긴장된 얼굴이었다. 


"저 이런 거 처음 해봐요. 너무 떨린다."


그녀는 원탁을 둘러 싼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게 슥 둘러봤다. 사람들 앞에서 고민을 털어 놓는 게 쑥스럽기도 하고 기대도 되는 모양이었다.

산책과 강아지들의 견사 치우기가 끝나고 보호소에서 준비해 준 과자를 간식으로 먹으며 마무리 하는데 진주가 갑자기 타로카드 이야기를 꺼냈다. 그의 신작을 나와 함께 준비하고 있다는 것, 신작의 소재는 타로 카드라는 것, 그리고 내가 스토리 작가이면서 현재 타로 카드 리더로 일한다는 것까지. 사람들은 흥미가 당긴다는 듯 우리도 한번 봐 주면 안되냐며 달려들어 잡다한 서류가 쌓여있던 테이블 위를 치우고 자리를 만들었다. 하지만 당장이라도 이야기를 와르르 풀어 놓을 것 같던 사람들은 결국 모두 눈치만 보면서 서로에게 먼저하라며 순서를 미뤘다.

그런 법이다. 원래 모든 고민들은. 

입 밖으로 꺼내기 전까지, 내 머리 속을 맴돌고 있을 때는 무겁고, 벅차고, 또 빨리 누군가가 해결해주길 바라는 주인 없는 의존감이 무럭무럭 자라지만 소리를 내어 밖으로 꺼내려고 하면 정확히 어떤 것이 고민인지 말로 정리도 안되고, 이야기 하자니 또 별일 아닌 것 같고, 무엇보다 창피해진다. 듣고난 뒤 이런 것도 고민이냐고 할까 봐.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까지는 생각하지 않고 그저 내가 정말 그들의 고민을 맞출 수 있는지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에 와라락 달려 들어 나도 봐달라고 쉽게 이야기 한다. 고민을 이야기 하는 자신에 대한 자각이 아니라 그것을 풀이하는 사람의 실력을 보고싶어 하는 호기심이 더 먼저 머리 속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을 밖으로 꺼내려 하는 순간 호기심이 쏙 들어가 버리고 혼자만 품고 있던 내밀함을 남에게 보여야 한다는 부담이 더 위로 올라오게 된다.

그들도 내게 판을 깔게 할 때는 신이 나 보였는데 누가 먼저 보겠냐는 물음에는 서로의 옆구리를 찌르며 미루더니 결국은 여기 모인 이들 중 가장 나이가 어린 보호소의 막내가 희생을 하게 된 것이다. 가끔 친구들끼리 우르르 몰려오는 경우 이런 식의 눈치게임이 일어나는 걸 종종 보게 되는데 희생자는 언제나 가장 어린 사람, 가장 약한 사람이었다. 무리 중에 비밀을 드러내라, 약점을 보여줘라 강요할 수 있는 약자. 정말 소름 돋게 늘 비슷했다. 


"너무 심한 거 말고, 약한 걸로 해요. 비밀인 건 나중에 둘이 따로 만나서 물어보고."


진주가 한 마디 거들었다. 아마도 망설이며 눈치를 보는 막내가 신경쓰였던 듯 했다. 진주가 거들자 그녀의 입만 들여다 보던 사람들이 다 그래, 그냥 가벼운 거 물어봐, 너무 부담같지마, 같은 말을 곁들였다. 막내는 진주를 보며 쑥스러운 듯 씩 웃었다. 고맙다는 뜻이었다. 


"저......사실 요즘 수의사 공부를 좀 해보고 싶단 생각이 들어든요. 근데 제가 지금 입시부터 시작해도 괜찮을지, 괜히 시간만 낭비하고 그런 건 아닌지......그런 거 물어봐도 돼요?"


드디어 질문을 정한 막내가 조용히 말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어?"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했어?"


"어머, 자기 멋있다."


듣고 있던 사람들이 놀라며 그녀의 어깨를 툭툭 치고 쓰다듬으며 각자 한 마디씩 응원의 말을 건냈다. 나는 카드를 섞고 그녀에게 건내주며 질문을 생각하며 카드를 섞어 달라고 했다. 막내는 주변의 응원에 뿌듯해 하며 카드를 섞어 내게 주었다. 나는 그녀에게 7장의 카드를 뽑으라 했다. 카드를 하나씩  뒤집을 때마다 사람들이 다양한 감탄사를 더했다. 그에 따라 그녀의 기대감이 높아가는 것이 느껴졌다.


"오랫동안 생각해 오셨던 건가 봐요."


"오 맞아요, 맞아요. 고민은 오래했어요."


막내가 활짝 웃었다. 주변 사람들도 함께 활짝 웃었다. 


"실제로 공부도 시작 하신 거 아닌가요?"


"오 맞아요. 신기하다."


"와 정말 그런 것까지 알 수 있어요? 진짜?"


"어머머, 우리한텐 말도 안하고 그랬어?"


막내가 한 마디를 할 때마다 칭찬과 긍정적인 감탄사가 쏟아졌다. 나는 그것이 마치 강아지를 대하는 보호소 식구들의 태도같다고 생각했다. 그런 사람들이 동물을 가까이 하게 되는 건지, 동물을 가까이 하다 보니 그런 사람이 되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분위기가 사뭇 유치하고도 따뜻해 크리스마스 가족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녀의 카드는 완벽하진 않았지만 희망차긴 했다. 중간 중간 생각지 못한 변수들이 생길 것이고 생각한 것보다 거대한 좌절이 될 수도 있겠지만 결국에는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으리란 조언을 해 주어도 모자라지 않을 것 같았다.


"자, 여기 한 번 보세요. 지금은 조금 자신감이 떨어지고 너무 늦은 건 아닌가, 잘 안되면 어떡하나 걱정이 많으신 것 같아요. 주변 사람들의 반응도 주눅들게 하고요. 하지만 어차피 어느 정도는 이미 마음을 먹고 있기도 하고 주변의 도움이 있어서 해쳐나갈 수 있을 거에요. 그때까지 시간은 걸릴 수 있겠지만."


막내가 나를 보며 굳게 다문 입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주변 사람들도 모두 따라 긴장을 했는지 그녀와 비슷한 표정으로 비장하게 나를 바라봤다. 누구나 자신에게 닥칠 미지의 미래를 들을 때면 이렇게 긴장을 한다. 나는 이 일을 시작하고 그것을 꽤 자주 봐왔다. 어떤 사람에겐 카드에 적힌 미래를 숨김없이 그대로 말해주기도 하고, 어떤 사람에겐 너무 가혹해 보이는 내용은 조금 순화해서, 혹은 조금 뒤로 감춰둔채 말해 주기도 했다. 간혹 상담 태도가 너무 얄미운 사람에겐 오히려 겁을 주기도 했다.

그게 올바른 상담자의 모습이라고 할 순 없다. 나는 순간 순간 열정적인 상담자가 될 때도 있었고 자애로운 상담자이거나 냉정하기 그지 없는 상담자이기도 했다. 그것은 내가 신을 대리하는 사제나 무당이 아닌 일개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타로 카드에 나타난 모든 것을 거짓 없이 읽어 주었으나 그들을 대하는 내 모습이 언제나 같지는 않았다.

살아온 많은 순간 나는 꽤 차갑고 무뚝뚝하고 주변을 크게 챙기지 않았던 무정한 사람이었으나 내 입술끝만 바라보는 이 작은 보호소의 사람들에 둘러 싸인 나는, 오늘만은 의도치 않게 따뜻한 리더(reader)가 될 수 밖에 없었다. 따스히 말하고, 따스히 조언하고, 따스히 걱정하며 또한 따스히 위로하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포기하지 않는다면 분명히 하고자 하는 바를 이룰 수 있을거에요. 이루는 과정이 험난하다고 해도 결국은 원하는 대로 될테니 늘 그 점을 잊지 마세요."


크리스마스였기 때문에. 여기 모인 사람들이 작은 생명을 소중히 하고 살리고자 하는 인간들이었기 때문에. 


"너무 좋다. 된대 된대!"


"크리스마스 선물 완전 제대론데?"


"쌤, 축하해요. 시작이 반이야!"


잠시 고요했던 실내가 다시 따스한 축하와 격려로 가득찼다. 나는 뒤에 서서 나를 바라보며 미소짓는 진주를 봤고, 진주를 향해 똑같이 미소를 지어주었다.








"처음 해보는 일이라 오늘 힘들었죠? 저녁은 내가 사게 해 줘요."

 

이제 어디로 가느냐고 물을 새도 없이 차를 출발하자마자 네이게이션에 주소를 찍으며 진주가 말했다. 나는 약간 피곤하기도 하고 허기지기도 해서 그냥 이대로 집으로 돌아가고 싶기도 했다. 아마도 진주는 이런 내 상태를 알고 미리 선수를 친 것 같았다. 그래요, 알겠어요 하고 순순히 대답하곤 시트에 몸을 맡겼다. 이대로 졸면서 갈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똑똑똑.


누군가 조수석 유리창을 두르렸다. 보호소 막내 직원이었다. 그녀는 환히 웃으며 크고 퉁실퉁실한 봉구를 안아 들고 있었다. 창문을 내렸더니 헤헥헤헥헥 하는 봉구의 숨소리가 귀엽게 들렸다.


"선생님, 오늘 처음이지만 강아지들과 잘 놀아주시고 제 고민도 들어주셔서 감사해요. 봉구가 선생님하고 헤어지는 게 아쉬운 것 같아서 데리고 나왔어요. 저도 다시 한번 감사하다고 말씀 드리고 싶고요."


그녀의 품에 불편하게 안긴 봉구는 내 손이 바로 자기 앞에 있는 것처럼 닿지 않는 나를 공중에서 열심히 핥아댔다. 핑크색 혀가 메롱하는 것처럼 나왔다 들어갔다 했지만 차가운 공기만 낼름낼름 삼킬 뿐이었다.


"진주쌤이 여자 친구 데리고 온 거 처음이에요. 크리스마스에 봉사하시느라 너무 고생 많으셨어요. 봉구 보러 또 오세요. 오늘 고맙습니다."


그녀가 봉구의 두툼한 앞 발을 들어 손 흔들듯 흔들어 주었다. 귀여웠다. 결국은 나도 손을 뻗어 봉구의 콧잔등을 어루만질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진주의 여자 친구가 아니라는 말은 진주도, 나도 하지 않았다.


"이제 우리 데이트 하러 갈 거니까 선생님도 그만 들어 가세요. 또 데려 올게요. 아마 봉구 보고싶다고 먼저 오겠다고 할 거에요. 봉구 잘했어! 연말 잘 보내세요! 다음에 봐요!"


진주가 내 쪽으로 몸을 쭉 내 밀며 창 밖을 향해 소리쳤다. 잘 가시라, 안녕히 계시라는 요란한 인사가 다시 한번 끝도 없이 오갔다. 그동아 막내는 봉구가 무거웠는지 으잉차! 하며 봉구를 끌어올려 다시 자세를 잡았다. 봉구는 내게서 눈을 떼지 않았고 나 역시 어딘지 모르게 봉구를 두고 가야하는 마음이 무거웠다. 그의 미래와 운명이 불명확하다는 것이, 자기의 의지나 노력과는 무관하게 언제든 가혹해질 수 있다는 것이 무거움의 이유였다.

그는 내 것이 아니고, 나 역시 그의 주인이 아닌데.

꼭 나만이 그의 구원자가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미련이 남았다. 내가 그의 구원자가 되고 싶었다. 

이렇게 짧은 순간 나눈 감정이 나를 어지럽힌다는 것이 조금은 신기했고 또 불편했다. 무언가 나를 움직일 수 있는 타자(他者)는 나의 약점이 될 수도 있다. 나는 평생을 약점이 많은 사람으로 태어나 살았다. 이제야 겨우 내 의도와 상관 없이 나에게 붙어있던 약점들을 모두 떼어냈는데 이제와 전혀 상관 없는 약점을 다시 갖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이것이 약점인가?


애정을 느끼고, 그 애정에 끌리고, 그것을 책임지고자 하는 것이? 봉구는 내게 어떤 약점이 되고파서, 약점으로 작용하고 싶어서 내게 의지했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의 마음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어쩌면 내가 그의 구원이 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보았을 수도 있고, 정말 순수한 끌림이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말이 통하지 않기에 무엇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어떤 존재에게 그만큼의 신뢰를 얻었다는 것은 참 뭉클했다.


"나는 장래 희망이라는 게 없었거든요."


차가운 손을 슬쩍 엉덩이 아래 따뜻한 시트로 집어넣으며 내가 말을 꺼냈다. 왠지 지금 이 마음을 진주와 나누고 싶었다. 그게 꼭 진주여서였다기 보다는 난생 처음 생긴, 내가 방금 가지게 된 이 무익하지만 따뜻한 감정을 자랑하고 싶었다. 꼭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장래는 있었지만 희망대로 살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그런 가능성이 더 높으니까 괜히 실망하고 싶지 않아서 뭔가를 꿈꾸지는 않았어요. 아예 아무것도 꿈꾸지 않으면 실패하는 사람은 되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요"


"꿈을 이루지 못할까봐 아예 꿈을 꾸지 않는다?"


진주가 내 말을 다시 한번 곱씹듯 한 문장으로 정리를 했다. 남의 입으로 듣는 내 이야기는 어쩌면 이렇게 멍충한지. 나도 모르게 웃음이 비실 비실 흘러 나왔다.


"다른 사람이 하는 말로 들으니 바보 같이 들리네요. 바보 같아 보이고.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나는 차라리 바보가 되는 편이 실패자가 되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어요. 바보는 바보라도 행복할 수 있지만 실패자는 행복과 거리가 멀어 보이잖아요."


"그런가요?"


"나는 그랬어요. 너무 피곤했거든요."


"사는 게?"


진주가 나를 흘낏 돌아 봤고, 나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피곤하다는 말 외에 무엇으로 그 시간들을 요약할 수 있을까.


"지금은요? 피곤한 걸 싫어하는 줄도 모르고 오늘은 내가 세련씨를 피곤하게 만들었네요."


나는 피식 웃었다. 진주식의 객쩍은 농담이 이제 조금 우습게 들리기도 하는 걸 보니 우리가 꽤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의 유머를 이해할 수 있게 되면, 전혀 우습지 않던 누군가의 우스갯소리가 진실로 우습게 들리기 시작하면 그 사람과 조금은 가까워진 것이라고 생각해 왔었다. 둘 사이에 공통의 시간이 쌓인 것이고, 이해가 쌓인 후에야 유머가 통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정말이지 한번도 집에서 웃어 본 기억이 없다. 엄마의 말에는 늘 화가 났고, 동생들의 말에는 늘 짜증이 났다. 내가 할 수 있었던 최대한의 인내심은 무표정이었기에 나는 최대한 무감한 상태로 지내려고 했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요즘 꽤 자주 웃는다는 걸 깨달았다. 상담을 하면서도, 카페에서 사장언니와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오랜만에 윤하선배를 만나서도 웃었다. 파안대소까지는 아니어도 미소 정도는 지을 수 있었다. 그것이 가족들을 떠나와서, 내 과거를 모두 깨끗이 내다버리고 나서라는 것이 살짝 마음에 걸렸지만 나는 웃고 있었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감정을 경험했다. 그들을 버리고 나서야.


"어떤 존재를 내 삶에 들인다는 건 너무 큰 피로를 요하는 일이라 단 한번도, 정말 요만큼도 원했던 적이 없어요. 그런데 만약, 내 미래에 무언가를 원하고 가질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게 된다면......"


나는 차 창 밖을 내다 보았다. 한적한 논밭 사이에 있던 보호소를 뒤로 하고 가로등이 하나 둘 늘어너기 시작했다. 옆으로 차들도 조금씩 늘어났다. 이제 곧 반짝이는 높은 건물들이 채워질 것이고 크리스마스 저녁을 즐기러 나온 사람들도 가득 곁을 채울 것이다. 


"......내가 실패를 불행이 아니라 경험의 하나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면,"


"그러면요?"


"강아지를 키워보고 싶어요."


"......봉구?"


진주가 물었다. 나는 오늘 처음 만난 봉구의 얼굴을 떠올려보았다. 아직은 더 자랄 것이 분명한 두툼한 발과 뾰족하게 선 귀, 구슬처럼 반짝이는 눈, 풍선검처럼 말랑 말랑하고 따뜻한 혓바닥, 정신을 번뜩 들게 해 주는 차갑고 촉촉한 코.

손 끝에 봉구를 쓰다듬었던 바스라한 털의 감촉이 느껴지는 듯 했다. 고요하고 묵직하지만 해맑고 산뜻한 봉구의 존재감. 

버려진 존재였어도, 자신을 원하는 사람이 없어도, 언제 다시 누군가와 함께 하게 될지 몰라도, 마음을 주었던 사람이 홀연히 떠나도 봉구는 개의치 않을 것이다. 그런 존재와 함께 하는 것이 어색하지 않은 삶을 살고 싶다.


"고마워요."


나는 진심으로 진주에게 말했다. 진주는 뭐가 고맙냐고 묻지 않았다. 그저 은은한 미소를 띈 채 앞을 주시하며 운전대를 잡고 있을 뿐이었다. 나 역시 더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대신 긴장이 풀렸는지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등과 머리를 시트에 편안히 기대자 눈꺼풀이 조금씩 내려왔다. 조수석에서 자는 건 예의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내 의지로 조절할 수가 없었다. 내 쪽을 슬쩍 돌아 보는 진주의 눈길이 느껴졌지만 나는 어쩌할 수 없는 잠에 빠져들었다. 진주의 유머만큼이나 진주가 익숙해진 것 같았다.








눈을 떠 보니 차 안이었다. 내 무릎에는 지난번처럼 진주의 패딩이 덮혀 있었고 시동은 켜진 채 운전석은 비워져있었다. 놀라서 두리번 거리며 창 밖 풍경을 살피니 도로변 한켠이었다. 많이 본 듯 익숙한 느낌이란 생각이 들었을 때 멀리서 뛰어 오는 진주의 모습이 보였다.


"어, 일어났어요? 앞에 편의점에 잠깐 들렀어요."


진주가 차에 올라타며 말했다. 손에는 커피와 과자 같은 것이 들려 있었다. 


"좀 더 잘 줄 알고 차에서 군것질 좀 하려고......"


손에 들린 것을 내려다 보는 내 눈길을 느꼈는지 진주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깨우지 그랬어요."


"너무 잘 자던데요? 게다가......"


진주가 잠시 말을 끊었다. 어떻게 말해야할지 조금 망설이는 듯 했다.


"......게다가 늘 피곤하다 그래서 깨울 수가 없었어요."


나는 진주의 이야기를 듣고 소리내어 아하하 웃었다. 그냥 막 웃음이 나왔다. 별로 웃긴 얘기가 아니란 것은 알았지만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와 멈출 수가 없었다. 웃으면서 나조차도 이게 진짜 이렇게 웃을만한 얘긴가 하는 생각을 했다.

어디가 웃긴지 몰라 진주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곤 음료수 병 뚜껑을 열어 내게 건냈다.


"배고프죠? 저녁 시간이 훨씬 지났는데. 데이트 하자고 해 놓고 밥도 안 사서 나 원망하는 거 아니에요?"


시간을 슬쩍 보니 9시가 다 되어 있었다.


"사실 예약해 놓은 식당이 있었는데 오는 길에 차가 생각보다 많이 막혔어요. 지금 가도 끝날 것 같아요. 세련씨를 이렇게 굶길 생각은 아니었는데......"


진주의 표정이 진심으로 난감하고 또 미안해 보였다.


"데이트라고 생각 안하고 나왔어요."


거짓말을 했다. 나이가 든 여자는 이런 정도의 거짓말은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다. 


"배 고프면 이거라도 우선 좀 먹을래요?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할지 좀 고민 할게요."


진주가 과자 봉투를 뜯어 내게 내밀었다. 그리고 보니 아까부터 낯설지 않다고 여긴 곳은 내가 진주의 집에 왔을 때 내렸던 버스정류장 근처였다. 두리번 거리던 내가 여기가 어딘지 알아 차라는 듯 하자 진주가 말했다.


"아, 일단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서 우리집 근처로 왔어요. 내가 금방 생각해 낼게요. 잠시만요."


"데이트라고 생각한 것치곤 플랜B가 없는 게 이해가 안되네요."


내가 쏘아붙였다. 그리고 과자를 한 웅큼 집어 와삭와삭 씹어먹으며 진주를 빤히 쳐다봤다. 내가 이 남자를 놀려 먹을 수 있게 되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는데. 진주는 안절부절 휴대전화를 뒤적였다, 네비를 뒤적였다 정신이 없어 보였다. 그가 조금 더 난처해지는 모습이 보고 싶었다. 


"진주씨 집에 가요. 가서 맛있는 거 해줘요."







Strength(힘, 용기) : 주어진 상황을 잘 다룰 것. 어려운 상황이지만 스스로의 지혜로 헤쳐나갈 것. 육감적인 사랑, 비밀스러운 연애, 불면증이나 공황장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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