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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혜정 maya Nov 22. 2024

비밀은 없어


**브런치 북은 한 권당 30개의 챕터만 발행이 가능한 관계로 '타로카드 읽는 가게'는 30화까지를 1권으로 발행하고 31화부터 '타로카드 읽는 가게2'로 발행됩니다. 놓친 이야기가 없도록 마야의 브런치 구독을 꼭 눌러주세요!** 타로카드 읽는 가게 1권 바로가기


* [타로카드 읽는 가게'는 소설입니다. 모티브나 컨셉외의 모든 인물과 나오는 사연은 모두 허구입니다.


















나는 경서를 뒤에 남겨 둔 채로 그냥 걸었다. 이제 1차적인 내 임무는 공식적으로 마무리 되었으니 잠시간이나마 혼자 쉬고 싶었다. 나에게 그게 얼마나 소중한 시간인지는 더 설명할 필요도 없으리라. 

나는 혼자이고 싶어서 모든 것을 버리고 나온 사람인데 의도치 않게, 인간사가 다 그렇듯이 또 누군가에게 곁을 내어 주었다. 그렇다고 해서 24시간 그와 함께이고 싶단 뜻은 아니다. 나에겐 온전히 나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경서는 내 뒤를 졸래 졸래 쫒아왔다. 바짝 붙인 않고 몇 걸음 떨어져서. 돌아보지 않았지만 풀죽은 모습일 것 같았다. 내가 뭘 잘못했지, 라고 생각하려나? 그렇담 너무나 구제불능이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어리고 배려심이 없는 이기적인 남자다. 그런 의도가 아니었는데, 라고 생각한다면? 그렇다면 나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모르고 있는 것이고. 


"미안해요."


버스 정류장까지 따라온 그는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내게 사과를 건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그냥 자랑하고 싶었어요."


대꾸하고 싶지도 않았다. 


"내가 싫댔잖아요."


하지만 대답했다. 어찌되었거나 그는 나의 새로운 애인이고, 우리에겐 아직 서로에 대해, 서로의 성향과 취향에 대해 모르는 부분들이 있을테니까. 아직은. 그래, 아직은 그걸 조금 더 알리고 이해하는 단계라고 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말 안해도 내가 좋아하는 것을 알고 싫어하는 것을 피하는 정도의 사이가 되기 위해 윤주만큼은 아니더라도 경서에게도 시간을 조금 더 주어야겠지.


"내가 너무 어린애 같았어요. 미안해요."


경서가 다시 사과했다. 정확한 포인트의 정확한 사과라 받아주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요. 난 내가, 우리가 누군가의 입에 쉽게 오르내릴만한 여지를 주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덕분에 우리가 좀 더 편하게 운신할 수 있게 된 건, 어쨌거나 사실이니까. 어차피 밝혔으니까 편하게 지내요."


경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같이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을 풀었다. 그렇게 우리의 짧은 갈등이 일단락 됐다. 일단 집으로 돌아가 이 피곤한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집에 데려다 줄까요?"


경서가 내 손을 슬쩍 잡으며 물었다. 저 멀리서 내가 타야할 버스가 정류장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아니요. 오늘은 혼자 가고 싶어요."


나는 경서에게 잡힌 손을 가볍게 빼내곤 집에 가서 연락한다고 하고 버스에 올라 탔다. 버려진 듯 정류장에 남겨진 경서가 버스 안쪽으로 걸어들어가는 나를 눈으로 쫒고 있었다. 나는 그의 시선을 느꼈지만 창 밖으로 눈길을 주지 않고 그가 보이지 않는 반대쪽 창가 자리에 가서 앉았다. 그리곤  바로 휴대전화로 시선을 옮겼다. 눈치 빠른 경서는 조금 서운해 하겠지만 내 기분을 금방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서운한 마음을 스스로 달래지 못한다면 안타깝게도 우리는 맞지 않을 것이고. 

나는 버스가 그의 시야에서 벗어나자마자 휴대전화를 가방안에 던져넣었다. 이 흔들리는 차 안에서 전화기를 들여다 볼 이유가 없었다. 누군가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고요한 저녁이었다. 시간 맞춰 해치워야할 숙제도 없고, 이야기를 나눌 사람도, 그에 따라 신경써야할 것도 없었다. 나는 누군가와 이야기할 때 늘 어디까지 말하고 어디부터는 입을 다물어야 할지 고민을 많이 해야 하는 타입이었다. 대화를 나누는 상대의 나이, 성별, 친밀함의 정도, 친분을 나눈 기간, 사회적 관계 등 다양한 요소를 고려하여 쓸데없는 소리를 하지 않도록 나 자신을 감시해야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그 누구와도 가까워질 수 없었을 것이다.

한때는 모든 것을 비밀로 하던 시기도 있었다. 원래 말이 많고 활달한 편은 아니었으므로 내가 입을 꾹 다물고 있는다고 해서 이상하게 생각하거나 오늘 기분이 좋지 않냐고 묻는 사람은 없었다. 어차피 나에게 관심을 갖는 사람이 많지 않았기에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대학에 들어와서 부터는 그게 좀 어려워졌다. 수험생 시절에는 책상 양 옆을 참고서로 성처럼 쌓아놓고 책만 파는 게 자연스러웠지만 대학에서는 그렇게 살다보면 함께 과제를 함께 할 친구도 없어서 쩔쩔맬 수 있었다. 절대로 장학금을 놓치지 않고 받아야 했던 나에겐 전략적인 친구 사귀기가 새로운 과제로 추가됐다.

처음에는 어려웠다. 내 또래 친구들은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전혀 몰랐다. 좋아하는 아이돌 얘기를 하기엔 낯 간지러워지기 시작하는 어른이고, 새내기 패션은 내가 입을 대기에 당장 입고 있는 꼬라지가 말이 안됐다. 동기들이 방학만 기다리는 이유 중 하나였던 유럽 여행은 내가 참견할만한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전혀 관심도, 관련도, 가능성도 없는 얘기였다.

그래서 처음에는 잘 들어주는 친구가 됐다. 스물 한두살짜리 소녀들은 이제 막 발딛기 시작한 어른의 세계가 너무 신기하고 또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자유가 황홀하기도 하면서 두렵기도 했다. 19에서 20살로, 앞자리 하나 바뀌었다고 세상은 수많은 방종을 눈감아 주었다. 남자친구와 팔짱을 끼고, 혹은 거의 껴안다시피 하고 돌아다녀도 뭐라하는 사람이 없었고, 번쩍이고 화려하지만 두껍고 촌스러운 화장도 뒤에서는 흉을 볼지언정 안된다는 사람이 없었다. 얼마나 할말이 많고 또 하고싶은 게 많았겠는가.


"우리끼리 여행갈래?"


신입생 시절 OT에서부터 빠르게 가까워진 한 무리의 친구들 중 제일 추진력있던 아이가 말을 꺼냈다. 여름 방학을 앞두고 일부는 고등학교 때부터 꿈이었다던 한달짜리 유럽여행을 떠나고, 일부는 고3 겨울 방학 때 미쳐 끝내지 못한 쌍커풀 수술을 계획한다고 했고, 그 외에 아직 아무 계획도 세우지 못했으나 이대로 스무살의 첫번째 여름방학을 날려버리고 싶지 않았던 아이들은 이 계획에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다. 


어디 가지? 언제 가지? 뭐 가지고 가지? 그때 뭐 입을까? 남자애들도 같이 가자고 해볼까? 거기 가서 헌팅하는 게 낫지 않아? 회비는 얼마나 필요하지? 꺅. 너무 신난다. 나 외박 처음 하는 거야!


모두 신이 나서 한마디씩 떠들어댔다. 내 눈에는 그저 새 둥지 속에서 삐약거리는 어린새들 같았다. 나는 언제나처럼 남의 이야기를 듣듯, 그렇게 지지배배 떠들어대는 아이들 속에서 은은한 미소를 지은 채 있었다.


"너도 가는 거지?"


한 친구가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인데, 그래도 한 번 더 확인한다는 듯이.


"알바한다고 또 빠지는 거 아니지? 이번엔 안돼! 우리 첫 여행이잖아. 알바 대타 해 달라고 하고 같이 가자."


"그래, 이번엔 꼭 가. 그 정돈 할 수 있잖아. 우리 스무살은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아이들이 한 마디씩 더했다. 난 이미 그들이 갔던 첫번째 클럽, 첫번째 단체 미팅에서 알바를 핑계로 혼자만 빠졌던 터였다. 사실 그건 핑계가 아니긴 했다. 나는 정말 알바를 해야했고 그건 한번 빠져서 될 일이 아니었다. 수업 시간을 포함해 학교에 있는 시간을 제외하면 내 시간의 대부분은 알바로 채워져 있었다. 하나를 제외한다고 남은 하루가 다 내 것이 되는 게 아니라 그 뒤에 또 다른 것이 기다리고 있는 식의.

나에겐 학교에 오는 것이, 수업을 듣고 다음 수업 사이의 10분, 30분의 시간동안 그 아이들과 떠들고 학교 식당에서 점심을 먹는 그 시간이 휴식이었다. 고등학교 때는 학교에 있다는 것이 답답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지만 대학에 와서의 학교는 그 자체로 숨쉴 틈이 되어 주었다. 넓은 교정에는 잔디밭도, 작은 분수도, 왜 만들었는지 모를 정자도, 이끼 낀 오래된 돌들이 세월에 닦여 모난 곳이 다 둥그스름해진 고즈넉한 건물들도.

나는 할 수만 있다면 학교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았다. 학교 밖은, 그야말로 쉴새 없이 돌아가는 통돌이 세탁기 같았으니까.

우리의 마지막 스무살은 거기까지였다. 새로운 환경에서 새롭게 만났던 반짝이던 나의 스무살 친구들은 조금씩 멀어졌다. 여름방학이 지나자 학교 식당에 완전히 질려버린 친구들은 학교 밖 맛집을 찾아다니기 시작했고, 우리는 밥도 함께 먹지 않는 사이가 됐다. 같은 수업을 듣고 당연하게 조별 과제를 함께했지만 그들은 내게 어디에 가자, 무엇을 함께 하자고 권하지 않았다. 

나는 그냥 안된다고, 빠질 수 없다고만 했다. 왜? 이번 한번만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 보라고 거의 애원하던 아이들의 마지막 부탁에도 안될 것 같아, 라고 했다. 아니 왜? 차라리 거기 그만두고 딴데서 알바 구해. 방학 끝나면 알바자리 엄청 많아. 그치만 안될 것 같아. 그러니까 왜? 우리랑 가기 싫어?


"혹시 회비 때문에 그래?"


조용히 우리의 실랑이를 지켜보던 한 친구가 물었다. 앵알 앵알 나를 조르던 친구들이 모두 다 헙! 하고 입을 다물었다. 정말 그런가? 진짜 그것 때문인가? 초롱초롱한 눈빛들이 내게 대답을 촉구했다. 교복으로 개성을 철저히 가렸던 중고등학교 시절에도 가난은 티가 났다. 매일 들고다니는 책가방에서, 필통 속 필기구의 숫자에서, 등하교길 잠시 보이는 운동화에서.

그러니 외모에 최대한의 치장을 즐기는 대학 1학년답지 않게 후즐근한 차림에 주 7일 알바를 하고 장학금에 목숨 거는 나를 보며 그애들은 넉넉지 않은 사정이라는 건 알았을 것이다. 그건 내가 숨긴다고 숨길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게 얼만큼인지, 내가 책임져야 하는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는 알지 못했다. 

내가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자 순진한 친구들은 나에게 회비를 조금씩 보태주겠다고 했다. 내게는 '이래도 못가?' '이래도 안 가?'라고 하는 것 같았다. 그들에게 내 사정을 얼마나, 어디까지 설명했어야 했을까. 그랬으면 우리들은 여전히 가까운 친구 사이로 남아있었을까?

지금와서 되돌아 보면, 그렇다고 생각한다. 내가 정말 그들을 내 가까이에 두고 멀어지지 않게, 오랫동안 보고싶었다면. 다는 아니었어도, 모든 것을 솔직하게는 아니었어도 그들이 납득할만큼은 들려줬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때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고, 오히려 그런 쓸데없는 솔직함이 그들을 내게서 더 멀어지게 할 것 같았다. 나는 조금 두려웠다. 내 몸은, 그리고 마음도 약간은 어른이 되었지만 초등학교 시절 따돌림 당하던 그 시절의 나에서 그다지 많이 바뀌지 못했다. 

나는 긍정도 부정도 아닌 미소를 지으며 난감해 하기만 했다. 그들은 나를 답답해했고, 노력해도 가까워지지 않는 어떤 벽을 느꼈으며, 내가 그들을 밀어낸다고 생각했다. 결국 밀려났으니 맞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의도치 않게 대학에서 처음 사귄 친구들을 등진 나는 조용한 학교 생활을 위해, 그리고 한편으로는 내 가슴 속 깊은 곳에 미뤄두었던 꿈을 위해 동아리 생활을 시작했다. 글 쓰는 동아리의 친구들은 대부분 조용했고, 정적이었으며 다른 사람의 일에 크게 관심이 없었다. 관찰을 좋아하는 아이들은 흔했지만 사적 영역에 있는 이야기들을 대놓고 묻는다거나 참견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나는 또 다른 숨쉴 틈을 발견한 것이다. 


"나 작업실 만들려고 하는데, 너 관심있어?"


고만고만하게 유순하고 조용한 아이들 틈에서 윤하 선배는 나를 콕 집어 물었다. 원래부터 잘 아는 선배도 아니었고 전공이 같다거나 비슷하다거나, 지인이 겹치는 선배도 아니었다. 그냥 오며 가며 만나면 인사를 하던 선배, 볼 때마다 화사한 옷차림과 그보다 더 화려한 얼굴에 눈길이 머물게 되는 선배였다. 내 또래 동기들에게는 친해지고 싶은 멋있는 언니였지만 나는 그저 나와는 다른 세계의 사람처럼 멀게만 보이던 사람이었다.

언젠가 선후배가 만나는 상견례 자리에서 소설가가 되고 싶다는 말에 연락처를 주더니 자기도 그렇다고 했다. 그리고선 한번씩 메일로 서로의 소설을 나누어 보고 간단한 코멘트를 회신해 주던 정도의 사이였다. 함께 밥을 먹거나 커피를 마시며 친분을 쌓는 다른 친구들과는 조금 다르게 우리는 꽤 오랫동안 드라이한 관계였다. 

선배는 동아리 방에서 글을 쓰는 게 너무 힘들다며, 자리도 좁고 애들이 산만하게 굴어서 학교 앞 원룸을 작업실로 꾸릴 예정이라고 했다. 혼자 쓰기엔 관리도 힘들고 심심할 것 같아서 같이 쓸 작업실 메이트를 구하고 있다고 했다.


"얼마나 쉐어해야 돼요?"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결정을 위해 꼭 알아야 하는 것을 물었다. 거기가 학교와 얼마나 가깝든, 누구와 함께 쓰게 되든, 시설이 얼마나 좋고 깨끗하든 나에게 중요한 건 내 주머니에서 나가야 할 돈이었기 때문이다. 


"너? 너 돈 있어?"


선배는 나보다 더 직접적이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직접적으로 꽂는 그녀의 화법에 예나 지금이나 나는 속수무책으로 솔직해질 수 밖에 업었다. 


"그럴 거 같았어. 그냥 나 혼자 작업하면 잘 가지도 않고 비워둘 것 같아서. 돈은 필요 없고, 자주 나와서 비지 않게만 해줘. 진짜 작업실처럼. 뭐, 시간 날 때 청소 같은 거 해주면 더 좋고. 난 청소가 제일 싫거든. 대신 간식거리는 내가 채워넣을게. 나 장보는 건 좋아해. 너 과자 좋아하니? 나랑 요 앞에 수입과자 마트 같이 갈래?"


나는 어, 어, 어하며 그녀에게 끌려갔다. 그녀의 부모님이 마련해준 신축 오피스텔에 두개의 책상을 넣고, 언제든 서로의 작품을 보고 모니터링 해 줄 수 있도록 노트북 비밀번호를 공유하며.

나중에 들은 뒷얘기로 윤하 선배의 부모님은 그 작업실에서 혹시라도 그녀가 남자와 살림이라도 차릴까 봐 여자인 친구와 꼭 함께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 작업실을 만들어주는 조건이었다고 했다.


"날 그렇게도 몰라. 그 양반들이."


그 후 몇달인가 지나서, 작업실에서 함께 밤샘 작업을 할 때 선배가 후후 웃으며 우스갯 소리처럼 말해줬다. 그녀는 무턱대고 살림을 차릴 사람은 아니었다. 누군가 다 차려놓은 살림을 요모 조모 다 살펴 보고 '이건 내 취향이 아닌데?'하며 퇴자를 놓으면 놓을 사람이지. 어쩌면 엄마와는 정반대의 인물이라 그녀에게 끌렸던 건지도 모른다. 그녀는 엄마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면서도 그 누구보다 나를 한 눈에 꿰뚫어 본  사람이기도 했다. 


"너는 그 말도 안되는 신비주의부터 때려치워야 돼. 가난한 게 뭐, 그게 뭐라고 혼자 그렇게 자꾸 따로 놀라그래?"


한번은 그렇게 꽤 상처가 되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게 던졌었다. 나는 그 말에 오기가 생겨서 내 삶에 대해, 내 힘듦과 구질구질함에 대해 구구절절 풀어놓았다. 내가 이래도 오버하는 거야? 이래도 인정 안해줄거야? 이게 그냥 가난 놀이에 심취한 소녀가장인 거 같아? 하는 유치한 마음이었다. 


"충격적이긴 하네."


선배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할 땐 저명한 인사에게 인정이라도 받은 것 같았다. 


"이제 그만 벗어날 생각을 해. 네 인생에 목표가 그들 모두의 구제가 아니라면."


하지만 이어진 선배의 말이 더 충격적이었다.


"그거, 내 소설 소재로 써도 돼?"


나는 어이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는 세상 모든 무거움을 가벼움으로 뒤바꿔 놓는 그녀만의 무게감이 있었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웠지만 나는 점차 편안함을 느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무례하다고 느낄 수도 있었지만 그녀에게만은 예외였다.

세상 사람들 누구나 크든 작든, 거창한 것이사소한 것이든 자기만의 장기를 가지고 태어난다면 윤하선배의 장기는 그런 것이었다. 심각한 것도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말하는 것, 그리고 그녀 앞에서는 정말 그렇게 느껴지게 하는 것. 아무리 솔직하고 당돌하게 말해도 그것이 미워보이거나 모욕적으로 느껴지지 않게 하는 것.

그녀 옆에서 나는 나를 억누르고 있던 그물을 조금씩 벗어나 사람들과 가까워질 수 있었다. 그 중에는 윤주도 있었다. 나를 살게 했던, 적어도 숨쉴 수 있게 했던 두 사람이었다.

언젠가 내가 그녀에게 잘 모르는 나에게 왜 먼저 다가왔는지 물었던 적이 있었다.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네가 우리 동아리에서 글을 제일 잘 썼어. 나머지는 쓰레기였어, 라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선배는 잠시 머뭇거렸다. 


"도움이 필요해 보였지. 넌 아니라고 하겠지만, 아무에게라도 무언가 털어놓고 싶어하는 사람처럼 보였거든. 오래 걸릴 줄 알았는데 너무 쉽게 털어놓은 게 좀 의외였지만.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어."


그녀는 얄밉지만 귀여운 표정으로 뿌듯하게 웃으며 내 얼굴에 담배 연기를 훅! 하고 불었다. 나는 질색팔색하며 그녀를 밀어냈지만 묘한 안도감이 들었다. 다른 사람이 아닌 그녀에게 털어놓을 수 있게 되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비밀은 없어. 네 마음이 얼마나 열렸는지에 따라 그게 비밀인지 아닌지를 네가 결정하는 거지. 비밀이라는 말이 있다는 것 자체가 사람들이 얼마나 타인을 갈망하는지 말해주는 거야. 갈망은 채워져야 풀리는 주문 같은 거고. 누군가 너에게 비밀을 가지고 있다면 역설적이게도 그걸 너와 공유하고 싶다는 찐한 사인 같은 걸 수도 있어."


무언가 세상을 통달한 진리 같은 말을 주르륵 내뱉고 난 뒤 선배는 나는 정말 비밀 같은 거 없어, 라는 말로 나를 웃게 했다.







Three of Coins (세개의 동전) : 주변의 도움으로 일이 잘 풀림. 안정적인 수입. 상황 자체보다 주변의 도움으로 소개팅이나 좋은 만남을 가질 수 있는 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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