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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로카드 읽는 가게'는 소설입니다. 모티브나 컨셉외의 모든 인물과 나오는 사연은 모두 허구입니다.
무당이 떠난 뒤 나는 그야말로 귀신에 홀린듯 그렇게 멍하게 앉아 있었다. 그녀가 하는 조언이 내 과거에 대한 건지, 앞으로 다가올 일에 대한 건지, 혹은 그 모든 것들에 대한 건지 궁금했다. 어느 순간 전화벨처럼 울려대는 휴대전화의 진동에 정신을 차리고 넣어뒀던 전화기를 꺼내 봤다. 전화가 온건가 싶었던 것은 경서가 연달아 보낸 메시지 때문이었다.
일요일 아무때나.
일요일 아침에 만나서 밤까지?
좀 그런가? ㅎㅎ
그치만 다음주 부턴 시간 내기 어려울 것 같은데. 나도 일 좀 해야하니까.
볼 수 있을 때 최대한 많이 봐두고 싶어서.
영화는 뭐 볼까?
무서운 거? 재밌는 거? 로맨틱한 거? 다 깨 부수는 거? 뭐 좋아해요?
세련씨, 어디갔어요? 나 혼자 얘기 하고 있어요?
바빠?
나도 바쁜데.
바쁘지만 짬을 내 봐요오오오 -
아 내가 봐도 질린다. ㅎㅎ
이따가 메시지 보면 얘기해 줘요.
경서는 한참이나 혼자 묻고 떠들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가 귀엽다고 생각했다. 아무 생각 없이 귀여울 수 있어서 좋겠다고도 생각했다. 내가 그래도 귀여워 보일까 고민도 했다.
일요일 점심때는 선약이 있어서 저녁 때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요. 빠르면 2시, 3시쯤?
나를 기다리는 귀여운 남자에게 어떻게 말을 꺼내야할까 생각했다. 나도 이해 못하는 윤주의 행동을 경서는 어떻게 받아들일까. 나는 연인과의 사이에서 갈등이 생기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적극적인 회피형은 아니었지만 될 수 있으면 문제가 될만한 상황을 만들고 싶진 않았다. 그렇다고 거짓말을 하거나 이상하게 둘러대며 기만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나는 평화주의자이되, 보통은 상대에 비해 수동적이고, 싫어하는 일은 하지 않는 식으로 갈등을 피하는 편이었다.
선약에 대한 설명을 하며 윤주의 실명을 댈지, 뭉뚱그려 전남친이라고 칭할지 같은 세세한 단어를 고르고 있는데 경서에게서 전화가 왔다. 답답했던 모양이었다.
"왜요? 나 말고 선약이 왜 있어요?"
경서가 막무가내로 말을 꺼냈다.
"왜라뇨. 있을 수도 있죠."
"있을 수도 있는데, 있을 수 없지. 우리 사이에 앙금이 남았잖아. 그걸 풀지도 않고 누굴 만나요?"
경서는 나를 웃게 했다. 그에게는 윤주에게 없는 유머가 있었다. 경서의 유머 스타일은 솔직함의 탈을 쓴 진심 전하기에 가까웠지만. 나는 그 어이없는 포인트가 웃겼다.
"우리 사이 앙금은 경서씨 때문이잖아요!"
나는 카페 안을 재빠르게 둘러보며 소리를 낮춰 따지듯 물었다. 언니는 우유에 스팀을 넣느라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건 미안해요."
경서가 순순히 사과했다. 나는 그 날 그의 사과를 이미 받았고 화도 풀린 후여서 그에게 화난 척 장난을 치는 것이 조금 찔렸다.
"영화도 보고, 저녁도 먹고, 뭐든 해요. 경서씨가 하고싶은 거. 한동안 못봐도 서운하지 않을만큼 쳐다보고 있어요."
"같이 드라이브도 하고, 쇼핑도 하고, 술도 마시고?"
"다 좋아요."
"우리집에서 자고 가는 것도?"
이런 얘기, 저런 얘기, 쓸데 없는 이야기로 희희덕 거리며 시간을 끈다해도, 저 뒤로 뒤로 미루며 피한다해도 어쨌든 솔직하게 이야기를 해야 한다.
적극적인 거짓말이 아니더라도 솔직하지 못한 순간의 침묵은 의도치 않은 거짓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나는 그런 거짓의 오해를 꽤 많이, 자주 겪어 왔다. 말하기 싫어서, 아니면 말 할 수 없어서 외면했던 작은 시간은 결국엔 어떤 덩어리가 되곤 했다. 더이상 내 침묵으로는 손 쓸 수 없을 만큼 커진. 내 능력으로는 풀 수 없는.
더이상은 그런 실수를 계속 하고 싶지 않았다. 언제까지 그런 것들에 대한 후회로 내 생각을 적실 수는 없으니까.
이제는 이야기 해야 할 순간이다.
"그 선약은......"
나는 천천히, 그리고 또박 또박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 이야기가 또 다른 오해의 소지가 되지 않기를 바라며. 그리고 우리 사이의 새로운 갈등이 되지 않기를 바라며.
그런 상상을 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상상 속에서 버진로드 위의 인물은 나였다. 그건 당연했다. 어떨 땐 진짜로 꿈을 꾸기도 했다. 얼굴도, 심지어는 몸도 보이지 않는 검은 누군가가 내 옆에 서있고, 나는 그의 팔짱을 끼고 하얀 실크 카펫이 깔린 버진로드를 걸었다. 저 앞에는 윤주가 서 있고, 웃는지 무표정인지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다지 멀리 떨어진 것도 아닌데 그의 얼굴이 아주 멀리 떨어진 것처럼 뿌옜다.
그렇게 눈을 꿈뻑 꿈뻑 감았다 뜨며 그의 얼굴을 알아보려고 애를 쓰며 한참 지루한 행진 끝에 윤주의 옆에 도달했다. 아니, 도착했다고 생각했지만 윤주는 또 저 멀리 있었다. 그런 꿈에서 나는 윤주의 몸에 손도 닿지 못한 채 그저 계속해서 그를 향해 걸어가기만 했다. 음악도 없이 지루하고 하얗기만 한 그 길을.
어느 날의 꿈은 예식장 문 앞에서 시작했다. 무겁고 두꺼운 문이 미끄러지듯 열리고 나에게 눈부신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졌다. 나는 홀로 씩씩하게 걸어서 윤주에게로 다가가는데 신랑은 이미 다른 신부의 손을 건내받은 후였다. 그 둘이 물음표가 가득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고, 신랑 신부를 향했던 하객들의 얼굴도 일제히 나를 향해 돌아 봤다. 그 찌르는 듯 날카로운 눈빛들에 아파하며 잠에서 깼다.
윤주에게 나의 꿈 얘기를 한 적은 없다. 그는 슬픈 얼굴로 내 어깨를 안으며 왜 그런 쓸데없는 꿈을 꿨냐고 했을 것이다.
내가 꾸고 싶어서 꾼 거 아니야. 꿈을 내 맘대로 할 수 있다면 난 그런 꿈은 꾸지 않았을 거야. 즐거운 꿈만, 너와 신혼여행을 가고 ,맛있는 것을 해 먹고, 좀 더 욕심을 낸다면 우리의 아이와 놀이공원을 가는 그런 꿈을 꿨을 거야.
하지만 꿈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었기에 나는 그저 꿈이 보여주는 우리의 미래를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여기!"
낯선 카페에 들어서자 나를 향해 손을 들어 보이는 윤하 선배의 얼굴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조금 당황한 듯 보였다. 당황과 황당, 뭐 그 어디쯤의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은 나를 등지고 있는 익숙한 등이 보였다. 두툼하고 다부진 윤주의 몸. 몇 번인지 샐 수도 없이 기댔던 그의 어깨.
하지만 윤주는 몸을 돌려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그저 그대로 굳은 동상처럼 내게 등만 보이고 앉아 있을 뿐이었다. 대신 몸을 돌려 나를 쳐다본 것은 그 옆의 여자였다. 동그란 얼굴형에 부드러운 눈매, 모난 곳 없이 귀염상인 호기심 어린 눈빛이 나를 돌아봤다. 그야말로 구경하는 듯한 눈이었다.
"나도 방금 왔어. 여기, 여기 앉아."
선배가 자기 옆자리를 툭툭치며 권했다. 나는 끝나지 않던 꿈 속의 버진로드를 걷듯 걸어갔다. 근육 조직들이 조각 조각 나뉘어진 듯 요상하게 움직였다. 나는 걷는 걸 잊어버린 사람처럼 좀비처럼 이상한 모양으로 그들이 있는 곳까지 다가갔다. 내가 움직이는 게 너무 이상하게 느껴져서 이렇게 걷는 게 맞나? 하는 생각까지 했다. 물 속을 걷는 것 같기도 하고 관절이 없는 사람처럼 흐느적 거리는 것 같기도 해서 현실감이 없었다. 뭔가 아득한 그 느낌이 꿈에서와 같아서 잠시 꿈인가 생각도 했다.
꿈과 달랐던 건 현실에서는 그 거리가 너무 짧았다는 것이다. 꿈에서는 그렇게나 닿고 싶어도 닿지 않던 그가, 현실에서는 닿지 않기를 바랐음에도 너무나 빠르게 닿아버렸다. 꿈은 반대라더니.
곧 등만 보이던 윤주의 옆 얼굴이 보였고, 눈을 내리 깔고 있던 그의 얼굴 정면도 나타났다.
낯선 얼굴, 낯선 표정.
내가 왔는데 날 보지 않는 윤주의 굳은 얼굴을 보는 기분이 너무 이상했다. 윤주는 테이블 모서리 끝만 보고, 나는 윤주만 보고, 그 여자는 나를 봤다.
나는 윤하 선배에게 눈빛으로 인사를 대신하고 자리에 앉았다.
"이렇게 둘이 나올 줄은 나도 미처 몰랐네?"
선배가 어색한 미소를 띤 채, 독순술을 하듯 이를 악 물고 내게 말했다.
이 순간의 모든 것이 이상하고, 또 숨 막혔다. 윤주 옆의 여자는 내가 등장하던 순간부터 몸을 돌려 쳐다보고 내가 자리에 앉는 순간까지도 적극적으로 나를 쫒으며 훑듯이 나를 쳐다봤다. 나의 모든 것을 눈으로 확인하겠다는 의지 같은 게 느껴졌다. 하지만 윤주가 나를 바로 보지 못하는 것처럼 나도 그녀를 바로 보지 못했다.
"안녕하세요."
서로가 서로를, 아무도 제대로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있는 이 기묘한 상황에서 유일하게 자유로워 보이는 여자가 테이블 위로 하얀 봉투 하나를 밀어 건냈다.
"세련언니, 맞으시죠?"
여자의 목소리는 앳되고 발랄했다.
"청첩장......드리려고요. 오빠가 친한 분들께는 같이 얼굴 보고 직접 전달하는 게 맞는 것 같아서 뵙자고 했어요."
나는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어 여자의 얼굴을, 눈을 바라봤다. 여자는 기다렸다는 듯 내 눈빛을 받았다. 받아치듯 시비를 거는 느낌은 아니었다. 하지만 슬며시 미소짓는 그녀의 얼굴에는 호기심과 더불어 당당함이 가득했다. 옆에 앉아 있는 윤주와는 정반대로.
"네, 감사합니다. 확답은 못드리지만 시간이 되면 갈게요."
나는 손을 뻗어 그녀가 내민 청첩장을 앞으로 끌어왔다. 이 자리에서 펴 봐야 하는 건지, 그냥 그대로 가방 안으로 넣어야 하는건지 고민스러웠다.
"나도 진짜 몰랐어."
언니가 내팔을 가볍게 잡으며 다시 한번 변명하듯 말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꾸며낸 미소가 가득했지만 여자 쪽으로 눈을 부라리듯 번뜩였다.
"사실 제가 오빠한테 부탁했어요. 좀 이상하게 들리실 수도 있지만."
여자가 선배와 나 사이에 끼어들었다. 너무 이상하게 들리는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 여자였다. 나는 오늘 여기에 윤주의 이야기를, 내가 없는 그의 미래에 대한 고백을 그의 입으로 듣게 되려나 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윤주에게는 표정이 없었다. 이 난처한 상황을 만든 그는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그냥 그렇게 텅 빈채 거기 앉아 있을 뿐이었다.
"좀이 아니라 엄청 이상하게 들리는데? 윤주가 보자고 해도 이상한데, 그게 신부님이었다니 그건 진짜 이상하게 들리네요오?"
윤하 선배가 내 대신 대답했다. 그녀의 동석을 부탁한 건 잘한 일 같았다.
"아아. 근데 오빠가 보자고 하는 게 더 이상하지 않나요? 오빠는 이제 새신랑인데."
헤헤, 하고 여자가 웃었다. 선배와 내가 어버버 하고 있는데 윤주가 벌떡 일어났다.
"뭐 마실래? 내가 사올게."
나는 윤주를 가만히 올려다 봤다. 그 짧은 순간 뭐라고 대답할까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의연한 모습의 나를 보여줘야할지, 이런 짓까지 하는 그에게 뭔가 한 방 먹일만한 한마디를 해야할지 고민했다. 순간, 불안정하게 이리 저리로 미세하게 떨리던 윤주의 눈동자가 나와 마주쳤다 떨어졌다. 그의 어쩔줄 모르는 모습이 너무 잘 보였다. 보고싶지 않아도.
누가 원했든, 의도가 뭐였든지 간에 그 난처한 눈빛을 본 순간 나는 윤주에 대한 괘씸한 마음이 사르르 녹아버렸다. 그런 윤주의 모습은 언제나 나를 어쩔 줄 모르게 만들곤 했다.
"오빠 언니가 뭐 좋아하는지 알지 않아요? 좋아하는 거 사오면 되지!"
여자가 끼어들었다. 윤주가 흠칫 하는 게 보였다.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윤주야, 그렇게 해. 그렇게 해줘. 그녀가 끼어들고 싶다면 그렇게 하라고 해.
윤주는 다시 흔들리는 눈빛을 하고 튀어나갔다.
"그래서, 왜 부탁했어요? 세련이 나오라고."
윤하 선배가 내 대신 물었다. 그녀가 빨리 묻지 않았더라면, 그날의 언젠가, 어쨌든, 나도 물었을 것이다.
"4258 주차하신분! 4258! 여기 안계세요?"
하지만 운명은 그녀에게 질문의 기회만 주었을 뿐 답을 들을 기회를 주지는 않았다. 카페 입구에서 누군가 다급한 목소리로 차 번호를 외쳤다. 윤하 선배가 깜짝 놀라며 네, 네! 하고 소리쳤다.
"차 좀 빼주세요. 이중 주차 하고 사이드를 올려놓으시면 어떡해요. 전화번호도 안 써놓구!"
그는 다급함에 신경질이 섞인 목소리로 소리쳤다. 선배는 벌떡 일어난 채로 나와 윤주의 약혼자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다가 아이참!이라고 같이 신경질을 내며 도도도도 뛰어나갔다.
나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 우습다. 웃기고, 어이없다. 코메디 같다.
"기분 나쁘셨으면 죄송해요."
웃음을 터뜨려 버린 나를 보며 여자가 말했다. 나는 할말이 없었지만 이 순간이 우습긴 했다. 할말이 없는데 나에게 할 얘기가 있어 보이는 사람을 마주하고 있는 것도, 사실은 좀 우스웠다.
"우리 둘이서만 얘기해 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진짜 그렇게 됐네요? 드라마 같다. 전 참 운이 좋은 것 같아요."
"......"
나는 여자의 순진무구함이 날 약오르게 하려고 의도된 것인지 아니면 진짜인지 알아보려고 그녀를 자세히 쳐다봤다. 몇살이나 됐을까? 나보다는 한참 어려 보였다.
"운이 좋으니까 오빠 같은 사람을 만난 거겠지만. 우리 선 봤거든요. 부모님 지인분들이 소개해서."
"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느낌이 좋았어요. 윤주 오빠. 젠틀하고, 다정하고, 잘 생기고."
"네."
"근데 아무리 운이 좋아도 그렇게 다 멀쩡하고 멋있는 남자가 선 보는 게 좀 이상하잖아요. 나이도 있는데. 진짜 좋은 남자들은 전에 눈독 들이고 있던 누군가가 채 가서 선 보기도 전에 품절되거든요."
"......"
"그래서 오빠한테 분명히 겉으로 티 안나는 큰 단점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내가 모르는 어떤 하자 같은 거."
"......윤주는 그런 사람 아니에요. 누가 모르는 큰 하자 같은 거 없어요."
내가 발끈하자 여자가 내가 뭘 모른다는 듯 아아 그건, 하고 내뱉더니 눈을 이리 저리 굴렸다. 어떻게 얘기해야 할지 생각하는 것 같았다.
"오빠한테는 없죠. 엄밀히 말하면."
"그게 나라는 얘긴가요?"
내가 물었다. 그녀가 당황했으면 하는 마음 반, 그래서 더 이야기 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반이었다.
"단어를 잘 선택해야할 것 같지만, 끝까지 마음에 걸렸던 건 언니가 맞아요."
여자가 순순히 인정했다.
"선 본 그 날 오빠가 얘기해 줬어요. 오래 사귀었던 사람이 있었고 헤어진지 얼마 안됐다고요. 처음엔 그러려니 했는데 13년이나 됐단 말을 듣고 망설였어요. 13년이나 사귄 이유도 있겠고, 13년이나 사귀었지만 결국 헤어진 이유도 있을테니까요. 그 이유가 하나는 아니었겠지만. 그 이후로 마음에 언니가 어떤 사람인지 보고싶단 생각을 지울 수가 없더라고요. 내 눈으로 직접 봐야 오빠랑 결혼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잠시 서로를 들여다 봤다. 나는 여자의 당돌한 눈빛 너머에 있는 일말의 불안감과 결투의 의지를 봤고, 여자는 무엇을 봤는지 모르겠다. 그녀가 보고 싶은 것을 봤을까?
"그래서, 이제 답이 됐나요?"
나는 그녀와 윤주를 두고 싸우고 싶은 생각은 정말 결단코 없었다. 그녀를 자극하고 싶은 생각도, 질투를 유발하거나 약을 올리거나, 둘 사이를 이간질 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그녀가 아무리 나를 살살 자극한다고 해도 말이다. 만약 그녀가 나에게 그런 반응을 원했다면, 그래서 나와 싸우고 이겨서 그를 완전히 쟁취하고 싶은 드라마 같은 생각을 했다면 그녀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고 돌아갈 것이다.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이미 윤주와 서로 마음에 들만한 마무리를 했고, 점잖고 애틋하게 마침표를 찍었다. 13년간의 시간동안 있었던 더럽고 치사하고, 혹은 원망어린 마음을 나름대로 잘 정리했다.
그리고 그렇게 남기게 된 것을 너무나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까지 서로의 바닥을 본 건 아니라서. 그 전에 헤어질 수 있어서 어쩌면 너무나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방금 만난 이 여자가 내가 애써 얌전히 닫은 나의 시간들을 뭉개버리게 할 순 없었다.
"우리가 만난지 얼마 안됐을 때, 밤 늦게 오빠한테 전화가 온 적이 있었어요. 언니는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여자가 손가락으로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진지하게 만나보자고 했는데, 전화가 온 거에요. 헤어진 여자친구한테. 만날 수 있냐고."
나는 기억을 떠올려 봤다. 기억 저편에서 아주 자그마하게 그녀의 목소리가 둥실 떠올랐다. 경서의 집에서 나오며 윤주를 찾았던 그 날, 그 밤. 전화기 너머에서 지금 가야 하냐고 희미하게 묻던 뾰족한 여자 목소리였다.
"그때 오빠가 갔더라면 아마 결혼할 생각 안했을 거에요."
여자의 얼굴이 뿌듯해 보였다. 나는 그날 밤의 절망이 떠올랐다. 나와 윤주 사이의 시간의 앨범이 영원히 닫히던 날.
"커피, 여기."
우리 둘 사이를 갈라 놓듯 윤주가 커피잔을 급하게 툭 내려 놓았다. 그녀와 나 둘다 뒤로 물러 나며 말이 끊어졌다. 윤주의 얼굴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런 만남은, 더구나 이런 방식의 만남은 윤주답지 않았다. 그는 분명 불편해 하고 있었다. 그것도 매우 티가 나도록.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만남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그 불편함을 감수하고라도 필요했다는 뜻이다. 아니, 적어도 윤주가 그 필요에 대해 인정했다는 것이 맞는 표현일 것이다. 내가 아는 윤주는 고집이 센 편이었다. 평소 화를 잘 내지 않고 다정 다감하지만 본인이 원하지 않는 것, 틀렸다 생각하는 것, 맞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떻게 설득을 해도 절대 하지 않았다. 그런 윤주가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 있음에도 여기에 있다는 것은 그런 뜻이었다.
"고마워."
나는 가운데 놓인 커피잔을 내 앞으로 끌어 당겼다. 미처 펴보지 못한 청첩장이 컵 끝에 툭 닿았다. 나는 조용히 봉투를 열어 카드를 꺼내어 보았다.
먼 길을 돌아 만난 두 사람이 사랑으로 하나의 가정을 이루려고 합니다.
그 기쁜 자리에 함께 해 축복 해 주세요.
나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윤주의 청첩장 글귀를 천천히 읽었다.
먼 길을 돌아 만난 두 사람. 축복 해 주세요.
마음이 아팠다. 글에 쓰여 있는, 윤주가 돌아와야 했던 멀고 먼 길이 나였다는 사실이. 나의 역할은 지나간 그의 먼 길이자 앞으로는 축복을 빌어주어야 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언니 오실거죠?"
여자가 밝게 물었다.
"진심이에요?"
나는 여자를 한번 보고 윤주를 봤다. 여자를 보는 눈빛을 곱게 하고 싶었는데 나도 모르게 조금 쏘아봐 버렸다. 윤주는 꿀 먹은 벙어리마냥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런 남자가 아닌데.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나는 윤주의 침묵에 명치 끝이 묵직하게 내려 앉는 것 같은 답답함을 느꼈다.
"네!"
여자는 짧고 명쾌하게 대답했다.
"왜요?"
나는 여자의 얼굴에서 진심을 읽으려고 노력했다. 보고싶지 않았지만, 내 눈에 각인시키고 싶지 않았지만 그녀를 바로 쳐다봤다. 친절하게 웃고 있는 눈매가 짜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웃고 싶지 않은 것이다.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지만 입술에 힘을 주고 있는 건지 바늘로 쿡 찌른 것 같이 날카로운 보조개가 입꼬리 옆에 패여있었다.
그녀는 알 수 없는 노력을 하고 있었다. 나를 향해서인지, 윤주를 향해서인지, 혹은 자기 스스로의 선택에 대해서인지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힘을 주어 지금을 노력하고 있었다.
왜......?
"차 댈대가 너무 없네! 뭐 이런델 약속 장소로 잡았어 너는? 너-무 상대방에 대한 배려심이 없는 거 아니니? 할튼 일방적이야."
윤하 선배가 짜증 섞인 목소리와 함께 돌아왔다. 그리곤 내 어깨를 짚으며 자리에 털썩 앉아 테이블에 차키를 집어 던지듯 내려 놓았다.
"미안."
윤주가 작게 말했다.
"아, 됐고! 청첩장 나눠줬으면 이제 가. 얼굴도 볼만큼 본 거 아냐? 상견례도 아니고. 무슨 덕담을 나누겠다고 질질 끌어. 좀 있으면 또 차 빼달라고 올거야."
어디서부터 들었는지 몰라도 선배는 윤주와 약혼자를 향해 적대심을 감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대놓고 내 편을 들겠다는 티를 냈다.
"급하면 먼저 가셔도 돼요."
여자가 아무렇지 않게 끼어들었다. 선배는 천천히 고개를 기울여 여자를 쳐다봤다. 그녀의 머리에서 슬금슬금 김이 올라오는 것 같은 환각이 보였다. 나는 당장 그녀의 입에서 욕이라도 튀어나오지 않을까 너무 두려웠다.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으니까.
그리고 당연하겠지만 나는 이 자리가 너무나, 더할 나위 없이 불편했다. 이 모든 것이 자연스럽지 않았다. 이 자리도,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도, 지금 이 상황도.
나는 윤하 선배를 보고 짓는 여자의 표정을 보고 거의 확신했다. 우리가 여기 모인 것은 완벽히 그녀의 의지 때문이라는 걸. 하지만 여전히 알 수 없는 건 윤주의 의지였다. 왜, 왜 윤주는 그녀의 의지를 꺾지 못했을까. 그답지 않게. 그는 왜 우리의 아름다운 이별을 다시 이렇게 기묘하게 파헤쳐야했을까.
Seven of Swords (일곱개의 검) : 마음의 준비를 하고 싸움에 나아갔으나 예기치 않은 상황으로 일이 마음처럼 잘 풀리지 않음. 예상치 못한 장애물이 등장. 불안감이 높고 고군분투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