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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로카드 읽는 가게'는 소설입니다. 모티브나 컨셉외의 모든 인물과 나오는 사연은 모두 허구입니다.
영화는 무척 슬펐다. 나는 흠뻑 울 수 있었다. 이미 경서의 차 안에서도 한 바탕 펑펑 울고 난 후였지만 어두운 영화관 안에서 서글픈 영화가 상영되자 또 눈물이 났다.
"선빵을, 맞은 거 같은데?"
아무도 나를 보지 못하도록 코트 속에 꽁꽁 숨겨 차 안에 넣어 준 경서가 말했다. 한 손에는 어느새 휴지까지 잔뜩 들고 있었다. 그는 다른 한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쿠션처럼 내 품에 안겨주고 휴지도 손에 쥐어줬다. 나는 그야말로 엉엉 울고, 팽 하니 코도 풀었다. 경서는 내게 필요한 것을 후다닥 들려주고는 바로 차를 몰아 그 자리를 떠났다. 차창 밖으로 윤하 선배와 윤주가 벙찐 모습으로 우리를 쳐다 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나는 앞만 보고 그대로 그들을 지나쳐 버렸다.
경서는 아무 말 없이 운전을 하고, 영화관에 도착해서도 별 말이 없었다. 표정은 평온했다. 화가 나 보인다거나 짜증이 나 보인다거나, 슬퍼 보인다거나, 재미있어 보이지 않았다. 그냥 미지근한 물처럼 따뜻하고 잔잔했다.
그의 옆에서 나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훌쩍이며 그가 안겨준 꽃을 쓰다듬고 있다가, 아무도 내 얼굴을 보지 않길 바라며 고개를 푹 숙인 채 그의 손에 이끌려 영화관으로 들어갔다. 경서가 미리 준비한 표 덕에 로비에서 서성이거나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그렇게 불이 꺼지고 서정적인 영화 음악이 깔리자 다시 눈물이 났다. 영화를 보고 있어서 슬펐던 건 아니었다. 분명 슬픈 영화였지만 내용을 따라간 건 아니었으니까. 슬픈 음악이 나오면 눈물을 흘리고, 영화 속 주인공들이 울면 나도 울었다. 아마도 내 옆에 앉은 사람은 내가 무척 감성이 풍부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차에서 내리기 전, 이런 상황을 예견했던 경서가 내 주머니에 잔뜩 넣어준 휴지를 쥔 채 흐르는 눈물을 마구 닦고 있는데 그가 한쪽 손을 잡아 끌더니 뭔가를 쥐어줬다. 작은 초콜릿이었다.
"당 떨어지면 안되니까. 울더라도 그거 먹으면서 울어요."
경서가 귀에 속삭이듯 말했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어어? 울다가 웃으면....?"
경서도 나를 보며 피식 웃었다.
경서의 장점은 누가 뭐래도 어떤 상황에서도 잃지 않는 이상한 유머감각일 것이다. 내 기준으로 그건 '이상한'이 맞았다. 어떤 사람에게는 진지함이 부족한 가벼운 남자로 보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의 아픔을 깊이 공감하지 못하는 냉혈한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이상한 방향으로 친절하고 섬세한 남자였다. 나는 이 날 그것을 매우 가까이서 보고 느꼈다.
영화가 끝나고 눈물은 말랐지만 눈은 퉁퉁 부은 나는 눈이 잘 떠지지 않을 지경까지 되어 버렸다. 좁고 어두운 상영관을, 경서의 손을 잡고 그에게 의지해 빠져나오면서 영화를 보는 내내 내 어깨를 한번씩 어루만져주고, 귓가에 시덥잖은 농담을 건내며 놀리고, 그 외엔 다른 말은 하나도 없었던 그가 믿음직스러웠다.
나는 내 마음을 잘 몰랐다. 윤주와, 그 약혼녀와 함께 있었던 그 기가 막힌 시간을 그에게 털어놓고 마구 욕지거리를 내뱉고 싶기도 했고, 꽉 닫힌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물고 앞으로 며칠 정도는 아무와도 말을 섞고 싶지 않기도 했다. 와르르 쏟아내고 싶은 마음과 완벽히 숨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맞물려 내 마음은 오르락 내리락, 들썩 들썩거렸다. 차분히 숨을 천천히 길게 내 쉬다가도 한 순간 코뿔소처럼 훙, 훙 하며 콧바람을 내뿜기도 했다.
"술 한 잔?"
내 속으로 솟아오른 화를 어쩔 줄 몰라 울그락 불그락 하는 내게 안전벨트를 채워주며 경서가 물었다. 나는 그냥 다 때려치우고 잠이나 자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한 순간 튀어나온 코뿔소를 이기지 못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지금까지는 한번도 술을 마셔서 뭔가를 잊어보고 싶다거나 풀어내고 싶다고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내 앞의 먼 미래가 보이지 않는 불투명한 삶을 살았지만 매일 매일, 하루 하루는 톱니바퀴처럼 꼭 짜여진 채 보내야 했기에 술과 숙취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사치스러움이었다. 특히나 늘 취해 있는 엄마를 보며 자란 나에겐 술로 인한 현실 도피가 가장 한심한 것이기도 했다. 괴로운데 왜 술을 마셔? 왜 정신을 잃어야해? 어차피 깨어나면 모든 것은 그대로인데. 어차피 아무것도 변하는 게 없는데.
하지만 그랬기에,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그렇게 한번 해 보고도 싶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고통의 망각을 위해 그 길을 선택한다면 그 또한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이 나이가 되도록 모두가 해 본 것을, 모두가 아는 것을 모르고 싶진 않았다. 그것이 영원한 망각이나 도피는 안되더라도, 적어도 지금 이 끝없이 떠오르는 생각들을 좀 멈출 수는 있을 것 같았다.
그 여자는 대충 성공했다. 나의 첫사랑을 완벽히 망쳤다. 내 머리속에서는 윤주와의 긴 시간들이 영화처럼 재생됐지만 회상 속 윤주의 얼굴이 그녀와 비슷해 보여 괴로웠다. 윤주와의 첫 만남, 우리가 나눈 첫 대화, 우리가 함께한 첫번째 데이트, 서로에게 했던 고백들, 위로들, 그 낮과 밤의 시간들. 지금은 너무 아파서 못 펴 보더라도 시간이 흐르고 나면 언젠가 그 모나고 날카로운 경계선이 살짝 바래버려 그래도 젊었다, 그래도 아름다웠다 자위할 수라도 있었을 그 모든 것을 망쳐버렸다. 내가 언젠가 가질 수도 있었을 평화로운 회상의 시간을, 우리의 시간과는 전혀 상관없는 그녀가 짓밟아 버렸다. 가진 것 없는 내가, 15년이나 차곡 차곡 모아 가지고 있던 시간 마저 빼앗기고 나니 펄럭이는 종이인형이 된 것처럼 텅 빈 기분이었다.
"또 왔네!"
본 적 있는 사장님이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가게 문을 열어 우리를 맞아주었다. 경서와 내가 처음 함께 식사를 할 때 왔던 곳이었다.
"그때 그 아가씨 맞지?"
그는 조심스럽지만 확신을 가진 표정으로 나를 보며 물었다. 나는 불어터진 눈 두덩이를 어색하게 가리면서도 최대한 친절한 미소를 지으려 노력하며 고개를 푹 숙여 인사했다. 경서는 사장님에게 뭐라고 소근 거리는 것 같더니 가게의 가장 안 쪽, 가장 구석진 곳으로 나를 안내했다. 몇 개월만이지만 한번 와 본 곳이라 어색함 없이 그를 따라 들어가 별 말 없이 능숙하게 사물함을 겸하는 그 작은 드럼통 같은 의자에 외투와 가방을 넣고 뚜껑을 닫고 앉았다. 경서는 그 때처럼 가게를 몇번 왔다 갔다 하며 텅 비어있던 상을 손님 맞이용으로 차렸다. 나는 멍하니 앉아서 막힘없는 그의 서빙을 지켜볼 뿐이었다.
"소맥 줄게요. 괜찮죠?"
경서는 이미 반쯤 채워진 맥주 잔에 소주 한잔을 조르륵 부으면서 물었다. 싫다 그러면 어쩌려나 궁금했지만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먹어 보는 것이었다. 소주도 맥주도 자주 먹지 않지만 그걸 굳이 섞어서 먹어 본 적은 없었다. 경서는 컵에 수저를 넣어 휘휘 섞더니 내 앞에 내려놓았다. 컵 안에는 섞이는 중인 작은 회오리가 뱅글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 회오리가 잠잠해질 때까지 조금 들여다 보다가 컵을 들고 꿀꺽 꿀꺽 마셨다. 소주보다는 덜 쓰고, 맥주보다는 덜 따가웠다.
"어때요? 나 소맥 잘 만드는 거 같지 않아요?"
경서가 자랑스러운 듯 날 보며 씩 웃었다.
"써요."
나는 솔직한 감상평을 내 놓았다.
"그럼, 술이 쓰지."
경서는 달궈진 불판에 고기를 올리며 대꾸했다. 치이익 하는 소리와 확 일어난 연기가 잠시 우리 사이를 가렸다. 나는 다시 꿀꺽 꿀꺽 소맥을 마셨다. 마시기 조금 수월하다 뿐 맛은 없었다. 엄마는 왜 이걸 그렇게 좋아한 걸까.
"담배는 백해무익이라고 하지만 술의 필요성을 어떤 때에는, 어느 정도는 인정 받고 있죠.
내 잔이 빈 것을 본 경서가 새로운 소맥을 얼른 만들어 앞에 대령했다.
"술이 좋은 점이 뭔지 알아요?"
"취하고 싶을 때 취하게 해준다는 거?"
나는 새로운 소맥을 또 꿀꺽꿀꺽 마셨다.
"정제되지 않은 솔직함을 추하지 않게 해준다는 거. 술에 취한 추함으로 치환해 주니까."
경서가 내 입에 고기를 얼른 쏙 넣어 주었다.
"내가 오늘 너무 추했어요?"
"아니, 세련씨는 추한 적 없어요. 그런 종류의 추함이라면."
"솔직하지 않아서?"
나는 술잔을 내려 놓고 경서를 바라봤다. 우리 앞의 연기는 여전히 자욱했다.
"털어놓을 줄을 몰라서."
경서가 내 말을 정정했다.
"난 술기운에 기대서 감정을 마구 터뜨리는 거야말로 추하다고 생각해요."
나는 술을 한 모금 더 마실까 하다가 집게를 집어들고 그를 도와 다 익은 고기를 옆으로 밀어내며 말했다.
"술 없인 자기 마음 하나 털어놓을 용기가 없는 사람이라면, 그건 추한 걸 수 있죠."
내말을 듣는 둥 마는 둥 경서는 이제 자기를 위한 소맥을 만들고 있었다. 맥주 가득에 소주는 반잔. 소맥에 대해 잘 몰라도 이건 뭔가 좀 공평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징징거리는 사람 별로 안 좋아해요."
경서가 말했다. 그는 수저를 휘리릭 화려하게 저어 또 하나의 회오리를 술잔 안에 피워냈다.
나야 말로. 징징거리는 사람은 좋아하지 않는다. 술에 쩔어 살던 엄마 조차도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나는 조급한 갈증에 두번째 술잔을 급히 비웠다. 목구멍을 적시며 내려가는 술이 시원했다. 그러나 나에게서 자꾸만 엄마의 모습을 발견할까봐 그게 조금 무서웠다. 우리가 비슷하다고 생각될 때마다, 그녀가 망가지던 순간의 마음이 혹시나 공감될까봐.
"근데 어떤 사람은 그럴 필요가 있기도 하더라고요."
경서는 내 빈 잔을 보았지만 세번째 소맥을 만들지는 않았다.
"가끔 세련씨를 보고 있으면 눌러 담은 그 마음이 다 어디로 갈까 궁금해요."
"......"
"눈물에 녹아서 흘러갈까? 내 쉬는 한숨에 섞여서 흩어질까?"
경서가 말을 끊고 술잔을 반쯤 비웠다. 그도 갈증을 느낀 걸까?
"매 순간 생긴 마음은 어디로 갈까요?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는 걸까요, 아니면 먼지처럼 어딘가에 계속 쌓이는 걸까요?"
"......"
글쎄요. 그건 다 어디로 갔을까요? 지금 모두 다 어디에 있는 걸까? 나는 내 마음의 행방을 새삼 생각해봤다. 내 생각만큼 마음이 생겨나는 거라면 내가 만들어 낸 마음은 대기권을 가득 채우고도 남았을 것이다. 나는 늘 머리가 터질 듯 생각을 하니까. 하기 싫다면서도 계속, 계속.
"세련씨의 마음이 너무 가득 차서 무거울까 봐 걱정돼요."
"......나중에 터질까봐?"
"난 차라리 터뜨리고 싶은데?"
"그걸 경서씨에게 떠뜨리면요?"
"그럴 수도 있지. 우리 사이에."
"그것 때문에 우리가 서로 불편해지면? 내가 징징거리는 게 싫어지면?"
"이제 충분하니까 그만하라고 하면 되지."
"내가 멈추지 못하면?"
"그땐 내가 징징거리면 되구. 내가 이해해 준 것처럼 그땐 날 봐주면 되잖아요."
"우리가 생각한 대로 되지 않으면?"
"어차피 최선의 모습만 보여주려고 한다 해도 그렇게 되리란 법도 없는 걸?"
"누구가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아."
"그런 건 짐이 아니야. 감정을 나누는 거지. 연인 사이에 그 보다 더 자연스러운 게 어딨어?"
"결국은 그게, 그게 문제가 된다구. 이 정도는 괜찮겠지, 이 정도는 봐 주겠지 하던 것들이 나중엔."
"......헤어진 남자랑 나는 다른 사람이야. 자기가 받고 싶은 선물은 자기에게 물어봐 달라며?"
"그건 선물이었잖아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모든 것이 선물이지."
"......"
"......"
유치한 대화를 끝없이 쏟어내던 우리는 잠시 말을 멈췄다. 사실 서로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서로의 문답은 꼬리의 꼬리를 물고 대단한 뭔가를 파헤치는 듯 했지만 결국 술취한 남녀였을 뿐이다. 그래도 뭔가 속이 시원한 것도 같았다. 술에 취한 기분이 이런건가, 누군가 우리를 보면 똑같은 말만 계속 해대는 주정뱅이 둘로 보일까 싶었다.
경서는 가만히 나를 보다가 내 술잔을 가져가 자기 잔과 나란히 두고 또 다른 소맥을 제조했다. 이번엔 맥주 반, 소주 반, 우리 둘 다 똑같은 비율이었다. 잔 밖으로 술이 흐를 정도로 거칠게 소맥을 휘저은 경서는 도전적인 눈빛으로 탁! 소리를 내며 내 앞에 술잔 하나를 내려 놓았다. 우리는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각자의 잔을 한번에 비운 뒤 또 탁! 하고 거칠게 술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니까,"
경서가 다시 입을 뗐지만 딱히 할말이 있어보이진 않았다. 그러니까, 그러니까만 맥없이 반복할 뿐이었다.
"그러면 경서씨는 뭐,"
내가 말을 받았다.
"내가 뭐!"
경서가 얼굴을 앞으로 얄밉게 내밀었다.
"자기는 나한테 숨기는 거 진짜 없어요? 내가 알아야 하는데 모르는 거 진짜 없어?"
"어떤 거?"
"나야 모르지. 형이 자기 믿지 말라던데? 믿을만한 사람이 아니라던데?"
"형은 평생 날 못 미더워했어."
"이유가 있었겠지."
"애인보다 애인 형 말을 더 믿는 거야?"
"아니야."
"형이 아니라 나랑 사귀는 거잖아. 내 말만 듣고 나만 믿어야지."
"그러다 뒤통수 맞으면?"
"맞은 적 있어?"
"있어."
"나는 그 남자가 아니야."
"아닌 거 알아."
"......"
"......"
우리는 이상한 유사 말싸움에 서로 꽤 몰입했다. 정말 아무 생각없이 아무 말이나 내뱉었던 것 같다. 뇌를 거치지 않고 말한다는 게 이런 건가 싶었다. 이게 경서가 말한 술기운의 효용성인가하는 바보같은 생각도 했다. 물론 그 속에 유치함을 포장으로 한 진심이 하나도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이 아무 의미 없는 릴레이를 계속 하다보니 내가 무엇 때문에 울적했는지, 내가 무엇에 속상해 했었는지도 잠깐씩이나마 잊게 됐다. 괜히 씩씩 거리는 동안 술은 빠르게 혈관을 장악해 감각을 무디게 만들었고 눈 앞의 것들을 선명하지 않게 만들었다. 여전히 울고 싶은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동시에 신나게 웃고 싶은 기분도 들었다. 기분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내가 결정하기에 달린 것 같았다.
그렇게 둘이 투닥거리는 동안 아무도 불판에 새로운 고기를 올리지 않아 불판은 텅비었다. 불판이 계속 달아오르다가 까맣게 그을리기 시작하자 저 멀리서 어린 알바생 하나가 달려왔다.
"더 안드실 거면 불 꺼 드릴게요."
탁.
이글거리며 모든 걸 태워버릴 것 같던 불이 꺼졌다.
그 뒤로 기억나는 건 어둡고 따뜻한 차의 뒷좌석이었다. 나는 경서의 무릎을 베고 옆으로 누운 채였는데 어렴풋이 보이는 운전석에는 아마도 대리 운전기사였을 처음 보는 아저씨가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내게 무릎을 내어준 경서는 조용한 숨소리를 규칙적으로 내며 자고 있었다. 고양이처럼 조용히 그릉거리는 자동차의 엔진소리와 의자에서 굴러 떨어지지 않도록 내 허리를 감고 있는 그의 팔의 감촉에 나는 아저씨가 급브레이크를 밟을 때마다 한번씩 자다깨다 했다.
그 다음 기억은 그의 집에 도착 하자마자 나를 부축하는 그를 애써 뿌리치고 화장실로 달려 간 것이었다. 한참을 변기통을 붙잡고 있다가 나갔더니 경서가 내게 무언가를 마구 들이키게 했다. 뭔지도 모르면서 받아 마셨는데 달콤했다. 꿀물이네? 라고 바보 같은 말을 하곤 스르르 잠들어 버렸다.
마지막 기억은 그의 침대에서였다. 잠들어 버린 나를 굳이 일으켜 세우더니 뭔가 튜브에 들어 있는 약같은 걸 입에 쭉 짜주었다. 나는 아무런 저항없이 그걸 아기새처럼 냠냠 받아 먹었다.
"왜 이렇게 잘해줘요?"
잔뜩 꼬인 혀에 게슴츠레한 눈으로 묻는 내게 경서가 대답했다.
"오늘 첫사랑이랑 헤어졌잖아요. 원래 첫사랑은 안 이루어지는 거야. 그러니까 아프고 힘든 거고. 오늘까지는 위로고, 내일은 축하파티 하자."
"......뭘 축하하는 건데요?"
"내 애인이 첫사랑이랑 완전히 헤어진 거. 나한텐 경사지."
술에 취한 나는 그게 전혀 이상하게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럴싸하고 논리적으로 들리기까지 했다. 그래서 어어, 그래 그럽시다! 라고 시원하게 대답하고는 완전히 골아 떨어졌다.
하지만 우리의 축하 파티는 다음 날 열리지 못했다. 새벽녁에 홀로 깬 나는 조각난 간밤의 기억들이 너무 부끄럽고 쪽팔리기까지 했다. 마구 퍼 마시던 그 순간에는 그렇게나 속 시원했던 것이 깨어보니 한심스럽기 그지 없었다.
나는 내 옆에 웅크리고 있던 경서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일어나 거실로 나왔다. 그의 얼굴을 볼 용기도 나지 않았다. 온전한 정신으로 그의 얼굴을 마주할 걸 생각하니 자꾸만 발이 동동 굴러졌다. 생각보다 속은 괜찮았다. 지난 밤 경서가 열심히 먹였던 꿀물이며 숙취해소제 덕인 듯 했다. 하지만 그게 더 창피했다. 날 왜 이렇게 일찍 멀쩡하게 잠에서 깨게 만들었을까 그를 조금은 원망했다. 차라리 둘 다 엉망진창인 채로 눈 비비며 배를 쓸어내리며 일어났더라면 이 쪽팔림이 좀 덜했을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거실 소파에 앉아 멍하니 창 밖의 소나무를 쳐다보다가 목이 말라 주방으로 갔다. 식탁에는 경서가 내게 줄 꿀물을 탔던 흔적이 가득했다. 왈칵 열려 있는 꿀단지, 그 주변으로 뚝뚝 떨어진 끈적한 꿀, 따르고 반쯤 남은 생수통.
나는 그 꼴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개수대 위에 널려있던 행주를 적셔 끈끈한 식탁을 문질러 닦고 전기포트에 물을 끓였다. 그리곤 커다란 머그 컵 하나를 찬장에서 꺼내어 꿀을 큰 수저로 듬뿍 세 숟갈 정도를 넣고 따뜻한 물을 조금 부어 꿀을 녹였다. 뭉치지 않도록 꼼꼼히 꿀을 녹인 뒤 남은 생수로 컵을 채우고 다시 한번 정성스레 저어서 꿀물을 완성했다. 그걸 그대로 식탁 위에 둘까 고민하다가 싱크대 서랍을 뒤져서 랩을 찾아냈다. 컵 사이즈 만큼 작게 뜯어낸 랩으로 입구를 감싸고 냉장고에 넣고 나자 잠이 완전히 다 깨는 것 같았다.
그리고 잠시 고민했다. 그가 깰 때까지 기다렸다가 얼굴을 보고, 사과를 하든 같이 민망하게 웃어버리든 하고 갈지 아니면 그 순간은 다음으로 미루고 도망갈지. 시계를 보니 6시반쯤이었다. 카페 오픈을 하려면 집에 들러 씻고 옷이라도 갈아입어야 하는데 경서가 언제 일어날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밤 새 내 술시중에 고달팠을 그를 깨워 인사를 하고 가기에도 좀 그랬다. 나는 소파 위에 내팽개쳐진 가방을 뒤적여 노트와 펜을 꺼내어 짧은 편지를 남겼다.
자기의 차가운 꿀물은 냉장고 안에.
출근 해야 해서 먼저 감.
파티는 다음에.
꼭 해요.
Ace of Batons (에이스 오브 바톤스) : 새로운 시작, 긍정적 시작과 변화. 좋은 소식으로 기분 좋은 두근거림. 아직 시작 단계라 불안감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