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다로움의 문제

지극히 개인적이고 독립적인 행복론

by 문혜정 maya





까다로움의 문제








나의 행복을 찾기 위해, 나에게 '행복'의 감정을 주는 여러 상황과 사물, 사람에 대한 것들을 생각해보기에 앞서 약간 삐딱한 시작이긴 하지만 나에게 행복하지 못한 감정을 선사하는 것들에 대해 먼저 살펴보기로 했다. 행복에 대해 이야기 하는데 행복함을 주는 것들이 아니라 행복하지 못함을 주는 것들을 먼저 정리한다는 건 어쩌면 내 성향적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행복은 행복한 것들이 터질 듯 많이 모인 상태일까, 행복하지 못한 것들이 하나도 없는 상태일까?


아마도 나는 후자 쪽을 먼저 떠올린 것 같다.자, 나의 행복론에 대해 생각을 해보자! 하고 가만히 앉아 무엇이 행복인가를 떠올려보려고 하니 '난 저런 사람, 저런 상황이 없으면 스트레스를 좀 덜 받을 거 같아.'라고 생각하는 나를 발견한 것이다. 행복을 '플러스'가 아니라 '마이너스'에서 찾고 있는 것이었다. 여기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나는 전체적으로 행복한 상태에 해당한다. 그렇기 때문에 몇가지 부분적인 불행을 제거하면 다시 전체적으로 행복한 상태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작은 스트레스에도 크게 영향을 받는다. 전체적 평균으로 보았을 때는 행복한 상태인데 작은 부분의 불행들이 전체적인 행복에 지장을 줄 정도로 예민하다.

어쨌거나 두 가지 해석 모두 내가 일정 부분 '까다로운 인간'이라는 전제가 있어야 자연스럽다. 자연상태에서는 배양이 어려운 실험체처럼, 생육 조건이 완벽히 세팅된 무균실이어야 무럭 무럭 자라날 수 있는 그런 까탈스러운 존재.

그렇다면 행복을 위해 나 자신의 '까다로움의 문제'에 대한 고찰이 조금 더 필요할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나는 까다로운가?

이 질문에 대해 엄마는 무조건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녀는 내가 까다로움의 정점에 있던 시기를 아주 가까이서 함께 보낸 사람 중 한명으로서 지금도 종종 궁극의 까탈을 부리던 나를 나보더 더 잘 기억하고 에피소드를 들려준다. 그 중 인상적인 에피소드는 아기에서 어린이로 넘어가던 시기의 나에 대한 이야기이다.

"너는 과자 봉투 입구를 가위로 잘라주지 않으면 안 먹었어. 그냥 뜯어주면 새로 사서 잘라줘야 먹었어."

"손톱에 봉숭아 물을 들여주는데 손에 묶어준 비닐이 삐뚫어지면 다 풀어버렸어."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다만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부분적이나마 그것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전체를 버리는한이 있더라도 새로 시작하는 쪽을 선택했다는 것은 어렴풋이 떠오른다. 지금의 나는 과자를 먹을 때 봉투 귀퉁이를 찢어서 뜯어 먹는다. 손톱을 꾸미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그 시절의 나의 분노조절장치를 폭파시키기 충분했던 조건들은 지금의 나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언제부터 바뀌기 시작했는지는 모르겠다.

본질적으로 내가 까다로움을 느꼈던 것은 '과자'와 '봉숭아물'이 아니라 '똑바로 자른'과 '삐뚫어진'이라는 조건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조건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그다지 생소한 것은 아니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똑바로 배열된 타일에 편안함을 느끼고 삐뚫어진 선에 불편함을 느낀다. 그래서 유머 게시판에는 마음의 안정을 주는 사진이라면서 같은 색으로 진열된 상품 사진이 올라오거나, 종류 별로 나란히 잘 정리되어 주차된 주차장 사진이 종종 올라온다.

사람들은 질서를 사랑하고 질서 안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 뜻이다. 나는 까다롭지만 특별난 까다로움은 아니었다.

지금 현재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 중 한 명인 남편에게 질문을 던진다면 어떨까?

그는 엄마처럼 바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조금 망설일 것이다. '음....글쎄.'라고 잠시간의 고민에 빠지겠지만 결국 답을 내놓기는 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의 답이 무엇일지도 쉽게 예상할 수 있다.

"까다로운 면이 없잖아 있지. 어떤 것에 대해서는 놀라울 정도로 무덤덤하고 무신경하지만 또 어떤 것은 엄청나게 까다롭게 굴고 싫어해."

"멍청한 사람을 싫어해."

"자기 할일을 안하는 사람을 싫어해."

"시끄러운 걸 싫어해."

"정확하지 않은 걸 싫어해."

"예의없이 구는 사람을 싫어해."

"일관성 없는 사람을 싫어해."

그래.

그는 나에대해 다른 사람들보다 꽤 많은 것을 알고 있고 꽤 정확하게 알고 있는 편이다. 나의 까다로움이 발현하는 순간들을 옆에서 자주 지켜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가 나열하는 나의 까다로움의 순간들이 그렇게 까다로운 것들이냐는 것에 대해서는 또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멍청한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나? 자기 할일을 안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은? 시끄러운 걸 싫어하는게 그렇게 특이한 케이스인가? 정확한 것을 좋아하는게 그렇게 흔치 않은가? 예의없이 구는 사람을 기쁜 마음으로 참아내는 사람이 보통의 인간인가? 이랬다 저랬다 하는 사람을 대체 누가 좋아한단 말인가?

나의 포인트들은 내가 까다로운 사람이라고 부르기엔 또 너무 식상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또 하나. 어떨 땐 까다롭고, 어떨 땐 무신경한 양면성 역시 그다지 특이한 일은 아니다. 일관성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양면성이 있다는 게 말이 안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정확하게 말하자면 동일 상황에서의 양면성이 아니다. 각각의 상황하에서의 일관성은 유지하는 편이다. 사람은 누구나 일정한 상황이나 사람들 사이에서 발현하는 서로 다른 얼굴을 가지고 있는 법이다. 학교에서의 나와, 일터에서의 나, 집에서의 나는 조금씩 다를 수 밖에 없다. 콘서트장에서의 나와 카페에서의 나, 지하철 안에서의 나 역시 달라질 수 있다. 그리고 그건 사회화의 성공적인 결과 아닌가.




나는 사실 '내가 까다롭다'는 것을 은연중에 전제로 깔고 '내가 까다로운 사람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생각을 하면 할 수록 나의 까다로움의 조건과 발현 상황 자체는 그다지 까다로운 것이 아니라는 결론에 자꾸만 도달했다. 말그대로 '나만그래?'라는 질문을 역으로 던지고 싶다.

조건 자체는 까다롭지 않다. 그러나 왜 이런 조건들에 나의 행복이 예민하게 흔들리는 걸까? 기준을 낮추면 되는 문제일까? 내가 거슬려하는 시끄러움의 역치값이 다른 사람에 비해 예민하기 때문에 내가 그런 스트레스에 취약한 것일까? 왜 나는 그런 역치값이 낮은 것이까?

하지만, 나만 그래?

누구나 다 자신만의 이상하게 낮은 역치값이 있지 않나?




다시 돌아가서.

나를 행복하게 하지 않는 요소들을 제거하면 나는 행복해 질 수 있을까?

아침에 누군가 페이스북에 박경리의 소설 토지의 한 구절을 써 놓은 것을 읽었다.


사시장철 갠날만 있다믄 그기이 어디 극락이것나. 산천초목도 사람도 다 말라 죽어부리는 지옥이지 머겄노 말이다.


내 행복을 저해하는 요소들이 모두 사라진다고해서 행복만이 남는 건 아니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었다. 맞는 말이다. 행복은 절대적인 상태가 아니라 상대적인 상태라는 것. 아주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에 의한 결론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마스크를 쓰지 않고 자유로이 사람들을 만나 침을 튀며 이야기를 나누고, 연인과 빨대 하나를 두고 음료를 나누어 먹던 때, 단 한번도 그 상황을 행복하다고 생각 한 적이 없었다. 마스크를 쓰지 않는 게 뭐. 사람들과 침을 튀며 큰소리로 이야기를 나누고 깔깔거리는 게 뭐.

정확히 코로나19가 그 일상을 특별한 상황으로 만들어버리기 전까지는 그랬다. 일상적인 상황보다 번거롭고 귀찮고 답답한 상황이 일상이 된 후에야 아무것도 아닌 상황을 행복하고 벅찬 상황으로 인지하게 되었다. 비교는 우리는 불행하게 만든다 배웠는데 비교할 수 있는 더 나쁜 상황이 없다면 행복의 역치값이 올라가버려 행복을 쉽게 느낄 수 없게된다니 아이러니하다.

내가 정확하고 일관성 있는 사람과 상황을 좋아하고 그 상태에서 편안함과 행복감을 느끼는 것이 그렇지 않은 사람과 그런 상황 때문이라니. 그렇지 않으면 그런 행복을 느낄 수 없게 될 거라니, 맞는말 같으면서도 선뜻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왜일까. 맞는 말인데 왜 안 맞는 것처럼 느껴질까?

말장난 같지만 둘이 조금 다르기 때문이다. 나는 정확하고 일관성 있는 상황과 사람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부정확하고 일관적이지 않은 상황과 사람을 싫어하는 것이다. 그 두가지를 같은 의미로 받아들이는 건 조금 투박한 해석이다. 물론 때에 따라서는 같은 뉘앙스가 될 수도 있겠지만 정확히 말하면 다르다. 그런 사람과 상황이 없어야 행복해지는 게 아니라 그들이 있어서 나는 불행한 것이다. 행복해지기 위해서 없애고 싶은게 아니라 있으면 불행한 느낌이기 때문에 없애고 싶은 것이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행복은 행복한 것들이 터질 듯 많이 모인 상태일까, 행복하지 못한 것들이 하나도 없는 상태일까?


행복한 상황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가 이 질문에 서로 다른 답을 도출해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의 행복은 불행과의 비교우위에서 오는 것 같지 않다. 0의 상황에서 -를 만나 생각해 보니 사실 -상황보다 0베이스의 상황이 비교적 더 행복했다는 결론은 나와는 맞지 않는다. 나의 기준이 0에 있다면 나에겐 지금 이 상황이 +든, -든 중요하지 않다. 둘 다 적합하지 않은 상태이다. 그게 내 기준에서의 '정확함'이고, 내가 불행함을 느끼지 않는 지점이다. 그리고 나의 주변인들이 어떨 때에만 발현되는 나의 '까다로움'을 느끼는 지점은 바로 이 기준을 잘 모르기 때문인 경우일 것이다. 지난번과 비교해 보니 지금이 훨씬 더 나은데 왜 싫어할까, 지난번과 비교해 보니 지금이 더 나쁜 것 같은데 왜 괜찮다고 할까, 의아해하며 '너는 어떨땐 까다로운데 어떨땐 무덤덤해.'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당연히 그들은 내 안의 모든 기준점들을 알 수 없을테니 그 정도의 결론이라면 나를 꽤 오랫동안 여러경우에 거쳐 관찰하고 내린 합리적 결론일 거라고 생각한다.

여기까지 읽고 '아 참 까다로운 사람이네.'라고 느꼈다면 당신은 나와 아주 다른 사람이다. 세분화된 기준을 하나하나 살펴보고 파악하고 그것을 가지고 사유하는 것이 피곤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그렇지만 '어떤 것은 나를 행복하게 하지만 모두가 행복하다고 하는 것이 나는 행복하지 않을때가 있었다'라고 떠올리는 사람들은 나와 비슷한 타입의 행복론을 가진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우리같은 타입들은 그렇게 뭉뚱그려진 상태에서는 행복을 찾아갈 수 없다. 우리는 남들이 불행하고 복잡하고 피하고싶다고 하는 그 과정을 모두 이해하고 사유하고 나만의 기준점을 만들어 놓아야만 행복으로 가는 길의 지도를 그릴 수 있다.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게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하는지 그림을 그려볼 수 있다는 것이다.




당신이 우리와 다른 사람이라면 그냥 조용히 우리를 지나쳐 가주길 바란다. 당신은 우릴 행복하게 만들 수는 없지만 불행하게 만드는 바로 그 사람이 될 수는 있다. 누군가에게 불행의 요소가 되고싶지는 않을 것 아닌가. 당신이 나와 비슷한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들은 조용히 옆으로 치우고 무시해 버리길 바란다.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지만 불행은 거기에 있을 수 있다. 피해가는 게 상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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