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딩크레딧에 꽃봉오리를 놓기 위해 사는 삶.
꽃으로 쓰는 독후감, 꽃후감은 책을 읽고 떠오른 심상, 느낌, 주제, 캐릭터 등을 꽃으로 표현합니다. 글로 쓰는 독후감은 브런치에, 영상으로 쓰는 꽃후감은 유튜브 채널에 업로드 됩니다.
꽃후감 여섯번째 작품은 김지수의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입니다.
제목은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이지만 이어령 선생이 직접 글을 쓰지는 않았습니다. 죽음이 가까이 다가온 그의 곁에서 김지수 작가가 대화의 형식으로 들려 준 이야기를 글로 옮긴 책이죠. 그래서 책의 표지에 작가는 김지수라고 적혀있습니다.
저는 이어령 선생의 전성기를 나눈 세대는 아닙니다. 그저 뉴스에서 본 엄숙하고 날카로운 눈빛을 한 문화부 장관 시절의 모습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을 뿐이죠. 하지만 그가 88올림픽 개회식의 기획자였다는 것을 알게된 것을 알게 되고, 유치원생이던 내 기억속에 굴렁쇠 소년의 퍼포먼스가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을 떠올리곤 '그를 모른다'고 했던 것이 사실이 아니란 걸 알았죠.
그는 시인이자 소설가면서 평론가이고, 논설위원이면서 장관이었고, 공연예술의 기획자면서 언어 학자였습니다. 요즘말로 하면 다방면에 두루 능통한 제너럴리스트지만 제너럴하다고 하기엔 다빈치의 천재성이 돋보이는 인물입니다.
세상 이치에 능통한 듯 보이는 천재가 죽음을 앞두고 남긴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요? 이 책은 그의 죽음 이전에 나왔지만 저는 그의 죽음 이후 이 책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이어령 선생이 소천한 날, 나의 선생님에게서 갑작스러운 메시지가 왔다.
'한 때 시민주의 사상에 젖어있어 이어령이란 이름 대신 '이떠벌', '이어용'이란 격하로 과소평가했던 젊은 날 내가, 그의 마지막 저서 '마지막 수업'을 겸허한 공손으로 받아들였던 몇 날 전과 오늘, 디지털 신문 3단의 '이 시대의 지성 이어령 교수의 부음'으로 그를 떠나보내네. 인생이란 그렇게 가는 것인 것을....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처음에는 나한테 보낸 게 맞나? 싶게 느닷없는 내용이었다. 매일처럼 메시지를 주고 받던 사이도 아니었고 평소 이어령선생이나 그의 책이 우리 대화의 주제가 되었던 적도 없었기에 선생님의 메시지는 뜬금없음을 넘어 뭐라고 대꾸를 해야하나 몰라 멈칫했다.
그리고 생각해 보니 나는 이어령선생을 잘 몰랐다. 어릴적 어렴풋한 기억 속에 문화부 장관으로 뉴스에 나왔던 무서운 할아버지의 모습만 떠오를 뿐 그의 책 한권 읽어본 적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기록자들, 작가나 예술가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야.
도덕자나 지식자가 아니라네.
감추고 싶은 인간의 욕망, 속마음을 광장으로 끌어내 노출시키는 사람들이지.
거울로 비춰주는 거야.
보통 사람은 비참한 자기 얼굴을 안 보려고 해.
흐린 거울이나 깨진 거울로 보지. 직면할 용기가 없으니까.
예술가만이 일그러진 자기 얼굴을 똑바로 봐.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124p
다 크고 나서야 그가 88올림픽 개폐회식의 총괄기획자였고, '갓길', '디지로그'라는 이제는 흔하게 쓰는 말을 만든 언어학자였으며, 대한민국에 '문화부'라는 부서가 생길 때 첫번째 장관을 지낸 올라운더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이미 다 지난 일이고 현재의 나에게 이어령이라는 인물은 늘 심각한 얼굴을 한 꼰대력 높아 보이는 할아버지의 이미지일 뿐.
올라운더라는 건 이어령식의 표현으로는 제너럴리스트에 가까운데, 이것도 알고, 저것도 알고, 대충 못하는 것 없이 척척 해내는 사람으로 그는 시를 쓰기도 하고 소설을 쓰기도 했지만 왠지 나는 그런 이유 때문에 그의 문학을 펼쳐볼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냥 '땡기지' 않았다.
그러다가 결국 김지수라는 작가를 필터로 쏟아낸 이야기가 궁금하기도 하고, 나의 선생님이 동요한 그 책이 궁금하기도 해서 그가 죽음을 앞두고 쓴(사실은 말 한) 책을 펴들었다.
덮어놓고 살지 말라고.
왜냐면 우리 모두 덮어놓고 살거든.
덮어놓은 것을 들추는 게 철학이고 진리고 예술이야.
그런데 지금 우리 시대가 가장 감쪽같이 덮어놓고 있는 게 무엇일 것 같나?
…
우리가 감쪽같이 덮어둔 것. 그건 죽음이라네.
모두가 죽네. 나도 자네도.
…
현대는 죽음이 죽어버린 시대라네.
그래서 코로나가 대단한 일을 했다는 거야.
팬데믹 앞에서 깨달은 거지. 죽음이 코앞에 있다는 걸.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70p
하지만 주문한 책이 도착했을 때 가장 궁금했던 건 인세의 지분율이었다.
죽음을 앞둔 자의 이야기이면서 그가 죽은 이후 읽게 된 책 앞에서 든 호기심치고는 지나치게 세속적인 궁금증이었지만 나는 그게 참 궁금했다. 책을 쓴이는 분명 '김지수'작가다.
그러나 이 책의 제목은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이고, 책의 표지도 이어령선생의 독사진으로 꾸며져있다. 당연히 책 속 내용도 모두 이어령선생의 입에서부터 나온 것이다. 그러나 표지에 작가는 '김지수'만 표기되어 있다.
이 책은 이어령의 책인가, 김지수의 책인가.
나는 그게 참 궁금했다.
이 책을 다 읽고 난 뒤 말할 수 있는 건, 플라톤이 쓴 '소크라테스의 변명'이 소크라테스의 이야기이고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을 플라톤이 옮긴 것이라 해도 소크라테스가 아닌 플라톤의 책이라 보는 것처럼 이 책은 김지수의 책으로 보는 것이 맞다는 것이다.
물론 이 책은 이어령 선생이 지배하고 있다. 그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선생은 중간 중간 내가 하는 말을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너의 머리로 생각하고 너의 머리를 거쳐 재구성해야 한다고 하지만 저자인 김지수는 이 책에서 자신을 완전히 드러내지도, 자신의 생각을 적극적으로 표현하지도 않는다.
읽는 내내 그녀는 이어령의 그림자처럼 중간 중간 스르르 나타났다 스르르 사라진다. 던지는 질문들이 날카롭지도, 특이하지도 않다. 어쩌면 이어령선생은 그녀의 질문이나 리액션이 없어도 스스로 이야기를 잇고 끊고, 만들어나갔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는 타고난 이야기꾼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왜 그렇게 조심스러웠을까?
나는 그게 이어령이라는 스승의 마지막 말을 책으로 옮겨야 하는 이의 부담감 때문이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이렇게 큰 스승의 말을 전달해도 될까?하는 부담, 그것을 그의 의도와 다르게 표현하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나로 인해 틀어지면 안되는데 하는 고민,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길지 않은 데 이상한 이야기로 허비하면 안된다는 강박 같은 것.
아니면,
어쩌면,
그 둘 사이의 대화에서는 그런 쓸데없는 이야기나 질문들이 오갔을 수 있으나 그것을 책으로 전달하는 과정에서 많은 것들이 정제되고 다듬어져 오히려 평범해진 것일 수도 있겠다.
“선생님, 럭셔리한 삶이 뭘까요?”
“럭셔리한 삶……
나는 소유로 럭셔리를 판단하지 않아.
가장 부유한 삶은 이야기가 있는 삶이라네.
‘스토리텔링을 얼마나 갖고 있느냐’가 그 사람의 럭셔리지
…
똑같은 시간을 살아도 이야깃거리가 없는 사람은 산게 아니야.”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153p
어쩐지 더 많은 것들을 더 빨리 찾고 배우고 채울 수 있는 시대에 가르침을 내려주는 '스승'을 갈구하는 사람들이 많아 보인다. 몇년전 유행했던 '멘토'라는 개념이 바로 스승이라고 생각한다. 지식을 가르치는 교사나 강사가 아니라 먼저 가본 길의 앞에서 우리가 길을 잃지 않도록 인도하는 가이드 같은 존재.
36억년이나 지속된 인간의 역사지만 반복되는 건 없다는 듯 사람들은 더더욱 선지자를 찾아 헤맸다. 학교 뿐 아니라 회사에서 조차 신입사원과 사수를 묶어 '멘토-멘티' 프로그램 같은 것을 잔뜩 내어 놓았었다.
김지수 작가는 '스승'이 필요한 시대에 이어령선생을 우리 모두의 스승으로 만들고 싶었던 것 같다. 날카로운 지성인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지금은 죽음을 앞두고 있는 사람이라면 무언가 우리가 꼭 필요한 한마디를 내어놓을 수 있으리라 믿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어령 선생은 한마디가 아니라 길고 긴, 그리고 기승전결을 파악하기 힘든, 구조화 되지 않은 구불구불한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읽어보면 그의 비유는 적절하고 이해하기 쉬웠지만 한 장 한 장 읽어나다가 보면 수많은 비유들에 둘러싸이게 되고 나는 다시 길을 잃었다.
산다는 건 이런건가? 싶으면 그것은 죽음에 대한 이야기였고, 이렇게 살라는 건가? 싶으면 그건 네가 생각해야 한다고 차갑게 잘라내기도 하고 이런 죽음을 준비해야 하나? 싶으면 죽음이란 것은 끝이 아니라고 도닥이기도 했다.
또한 이 책이 인터뷰 형식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선생의 입장은 한 페이지 사이에 갑자기 바뀌기도 했다. 내가 했다면 이랬다 저랬다 자기가 한말도 기억 못하고 매번 번복하는 사람 처럼 보였겠지만 그는 죽음을 앞둔, 80년이 넘는 생을 산 노인이었다. 살아보니 바뀔 수 있어! 케이스 바이 케이스야! 한마디면 갑자기 앞에서 쌓아온 이야기가 와르르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답이 정해져 있으면 대화해서 뭘 하겠나?
자네가 만약 내일 같은 질문을 한다면 내 대답은 달라져 있을지도 몰라.
그래서 오늘의 대화가 중요한 거야.
우리가 내일 이 대화를 나눴더라면 오늘 같지는 않았을 걸세.
그래서 오늘이 제일 아름다워.
지금 여기.
나는 오늘도 내일도 절대로 변하지 않는 신념을 가진 사람을 신뢰하지 않아.
신념 가진 사람을 주의하게나. 큰일 나.목숨 내건 사람들이거든.
…
오늘도 내일도 똑같으면 뭐하러 살텐가.
진리를 다 깨우치고 신념을 가진 사람들은 더 이상 살 필요가 없네.
이제 다 끝났잖아.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174p
신념을 가진 사람은 인생 프로세스를 생략한 사람이야.
목표만 완성하면 끝이지.
돈이 신념이다? 백만장자 되고 나면 어떻게 살거야?
집 한 채 갖는 게 목표다? 집들이 하고 나면 허무해서 어떻게 살아?
...
꿈이라고 하는 것은 꿈 자체에 있는 거라네.
역설적이지만 꿈이 이루어지면 꿈에서 깨어나는 일밖에는 남지 않아
…
꿈이라는 건 빨리 이루고 끝내는 게 아니야.
그걸 지속하는 거야.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175p
이 책을 읽고 난 뒤, 나에게는 무엇이 남았나 생각해 본다.
뭔가 굉장한 이야기들을 여러 시간에 걸쳐 내 몸안에 꽉 찼지만 정리를 할 순 없었다. 이 책을 다 읽은 날 저녁 치킨을 먹으며 남편에게 물었다.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어? 계획 같은 게 있어?'
굉장히 대략적인 질문이었는데, 일부러 질문을 더 자세히 덧붙이지 않았다. 이런 러프한 질문을 들었을 때 그는 어떤 말을 먼저할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는 '글쎄. 지금처럼? 20대나 30대초처럼 지금은 계획을 막 세우진 않고, 지금처럼 나한테 주어진 일들을 하면서 지내려고. 그때는 뭘 하고, 강의를 몇번하고, 이런 계획을 세웠다면 지금은 그런 건 없어.'라고 대답했다.
'그건 목표잖아? 뭘 얼만큼 하겠다하는 달성해야 하는 목표 말고 어떻게 살아야겠다는 방향성 같은 거 없어?'
나는 더 캐물었다.
그는 '그냥 큰 문제가 없으면 지금 다니는 회사를 조금 오래 다녀보고 싶어.'라고 했다. 그리고 '자기는?' 이라고 되물었다.
질문을 했지만 답은 몰랐기 때문에 나는 대답을 하며 생각할 수 밖에 없었는데, 꽤 오래전부터 나는 '내가 행복한 삶을 살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를 행복하게 하는 일을 하면서 살거야.
그래서 나는 '나를 행복하게 하는 일'을 늘 생각했는데, 무엇이 날 행복하게 하는지보다 쉬운 건 '나를 행복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을 제거하는 것'이었기에 늘 네거티브한 방향으로 내 행복을 추구했다.
저 사람이 나를 힘들게한다면 그 사람을 제거하는 것으로, 이 일이 나를 우울하게 한다면 그 일을 때려치는 것으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불행을 제거하는 것이 내가 행복을 추구하는 방향이었다. 사실 지금도 그게 가장 효율적인 행복추구 방법이라고 생각하고는 있다. 다만 행복을 추구하며 불행한 요소들을 늘 살피는 것이 무언가 맞지 않는다고도 생각한다. 행복을 느끼기 위해 불행도 신경쓴다는 것은 느낄 필요 없는 불행을 늘 예민하게 감지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말에 버려두라는 말이 있지?
버리는 것과 두는 것의 중간이야.
그런데 버려두면 부풀고 발효가 되고,
생명의 흐름대로 순리에 맞게 생명자본으로 가게 된다네.
그게 살아 있는 것들의 힘이야.
버리는 건 쓸모없다고 부정하는 거잖아.
버려 두는 건, 그 흐름대로 그냥 두는 거야.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273p
그래서 나는 늘 약간 날이 서 있고 많은 이들이 거슬리고 많은 일들이 못마땅하다. 그것들을 피해가기 위해 그것들이 어디에 있는지, 언제 내 앞에 닥쳐올지 곁눈으로나마 주시해야했다. 그게 진정한 행복은 아닐 것이다. 알지만,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이어령 선생도 알지만 그런 사람이었기에 느껴야 했던 불행이나 비애가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어릴적 느꼈던 죽음의 정오에 대한 에피소드에 잘 나와있다. 여섯살 때 느꼈다는 절정 이후의 죽음은 어린 아이에겐 좀 과한 감정이다. 그건 누가 가르쳐서, 혹은 강요해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은 아니다. 그저 그가 그런 것을 느낄 줄 아는 사람으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정오가 지나면 모든 사물에 그림자가 생긴다네.
상승과 하락의 숨 막히는 리미트지.
나는 알았던 거야. 생의 절정이 죽음이라는 걸.
그게 대낮이라는 걸.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57p
'이렇게 태어난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나는 그런 고민에 빠졌다. 그것이 이 책이 나에게 던져 준 화두이자 의미였다. 스승은 나에게 답이나 길을 열어준 것이 아니라 길을 찾아 떠나야 한다고 등을 떠밀어 줬다.
결국 남을 가르친다는 것은 엉터리라네.
남을 가르칠 수도 없고 남에게 배울 수도 없어. 인간이 그런 존재야.
거기로부터 시작해야 하네. 그게 실존이야.
‘나는 혼자다’라는 걸 모르는 사람과는 얘기가 통하지 않아.
군중은 남이 이 말 하면 이리로 가고, 남이 저 말 하면 저리로 가지.
휩쓸려 다녀. 자기가 없으니까 자꾸 변하는 거라네.
…
궁극적으로 인간은 타인에 의해 바뀔 수 없다네.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만족할 수밖에 없어.
그게 자족이지.
자족에 이르는 길이 자기다움이야.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23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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