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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ya Lee Jun 19. 2019

내가 꿈꾸는 마드리드의 일상, 참베리(Chamberí)

언젠가 마드리드에서 살게 된다면

단 며칠 마드리드를 여행한다면 가보지 않았을 곳들을 지나고, 멈추고, 머물며, 느낀다. 짧은 시간 많은 것을 보기 위해 하루 종일 피곤하게 돌아다니지 않아도 되고, 왠지 유명한 관광지는 놓치면 안 될 것 같은 부담도 없다. 머무는 여행의 가장 큰 축복이다. 하지만 종종 힘들고 외로운 시간도 찾아온다. 스페인어 공부도 열심히 하고 매일 글도 쓰겠다고 큰 맘 먹고 왔는데 마음처럼 되지 않는 날에는 ‘내가 여기까지 와서 시간 쓰고 돈 쓰며 뭐하고 있지?‘라는 물음표가 아프게 맴돈다. 그리고 내 편이 되어줄 사람이 유난히 그립다. 이럴 때 마드리드에 만날 친구가 있다는 것만큼 위로가 되는 일은 없다. 로사를 만난 금요일은 마침 5월의 마지막 날이자 내가 마드리드에 온 지 딱 2주가 되는 날이었다. 그 사이 날씨는 완연한 스페인의 여름으로 접어들어, 한낮에는 30도가 넘나드는 뜨거운 날이 이어지고 있었다. 썬크림을 열심히 발랐건만 어느새 내 얼굴과 팔, 다리는 스페인의 태양빛에 가무잡잡하게 그을렀다. 마드리드에 온 이후로 비가 한 방울도 오지 않아, 어색할 지경이었다. 아일랜드에서 가져온 우산은 캐리어 안에 넣어온 그대로 잠들어 있었다.

로사가 자기 사는 동네 구경을 시켜주고 싶으니 ‘참베리(Chamberi)‘에서 보자고 했다. 참베리는 마들레뇨들에게 가장 인기 많은 주거지역으로 마드리드 중산층의 삶을 엿볼 수 있는 동네다. 관광객으로 북적이지 않아 여유롭고 안전하면서도, 시내에서 가깝고 교통도 더없이 편리하다. 물론 그만큼 집값이 비싸다는 단점도 있지만, 어쨌든 한 번 참베리에 정착한 사람들은 웬만해선 이사를 안 가고 눌러 산다고 한다. 우리가 만나기로 한 이글레시아 지하철역은 트라팔가에서 참베리로 넘어가는 경계선 즈음에 있었다. 조금 먼저 도착한 내가 지하철역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기울어가는 저녁햇살의 우아함에 감탄하고 있을 때, 커다란 빈티지 선글라스에 시원한 민소매블라우스를 입은 로사가 내 시야 안으로 불쑥 들어왔다. “올라, 구아빠!!” 로사는 늘 나를 그렇게 불렀다. 영어로는 ‘헤이, 프리티!‘쯤 되는 로사의 애정표현인데, 들을 때마다 마음이 따뜻해졌다. “올라, 로사!” 나도 그녀에게 화답하고, 우리는 스페인식으로 양 볼에 한 번씩 가벼운 키스를 했다.

우리는 참베리광장(Plaza de Chamberi)을 향해 걸었다. 저녁 9시가 가까워오는 시간이었지만 여전히 빛이 가득했다. 직선으로 쭉 뻗은 차도 양편으로, 가로수가 풍성한 인도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여름해 아래 키가 훌쩍 큰 나무들이 짙은 녹색 잎들을 뻗어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었다. 참베리 광장은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중앙의 분수대에서는 뻗어 오르던 물줄기가 반짝이는 햇빛에 부딪히며 부서져 내렸다. 사람들은 군데군데 놓인 벤치에 앉아 삼삼오오 수다를 떨거나, 혼자 책을 읽거나, 개와 산책을 하며 여름저녁의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다정하고 아늑했다. 나는 첫눈에 이 동네가 좋아졌다. 무엇보다 전통적인 레스토랑과 세련된 카페, 넓고 시원스레 뻗은 길들과 나무와 꽃이 풍성한 공원 등 서로 다른 성격의 것들이 소란하지 않게 어울리는 점이 좋았다. 유행의 변화에 휩쓸리지 않고 지켜온 마드리드의 고유함과 21세기 마드리드의 모던함이 함께 존재하는 동네, 참베리. 아, 나중에 마드리드에 살 기회가 온다면 이 동네에 살고 싶다! “목도 마르고 배도 슬슬 고파오는데? 시원한 맥주 한잔에 타파스 어때?” 시원시원한 성격의 로사는 내가 고민할 필요도 없이, 그녀가 점찍어둔 장소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말 빠르고 열정 넘치기는 딱 스페니시인데, 계획적이고 시간 개념이 확실한 건 보통의 스페니시들과 다르다. 로사가 나를 데리고 간 곳은 올라비데광장(Plaza de Olavide). 키 큰 나무들 아래 나무벤치와 어린이 놀이기구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중앙의 작은 공원을 둘러싸고 수많은 음식점이 성업 중이었다. 대부분 스페니시 안주류와 술을 파는 전통적인 스페니시 바들이었다. 한 마디로, 상상할 수 있는 주말 저녁의 모든 쾌활함이 그곳에 있었다.

실내에 빈자리가 많았지만 테라스에 앉기 위한 경쟁이 치열했다. 한국과 달리 이들은 아직도 실외 테이블에서 자유롭게 담배를 피우기 때문에 사방에서 무작위로 날아드는 담배연기를 감수해야 하지만, 해가 길고 습도가 높지 않은 마드리드의 여름밤에는 역시 테라스에 앉아야 제대로다. 우리가 테이블을 찾아 서성이고 있을 때, 운 좋게도 바로 앞 테이블에 막 자리가 났다. 우리는 맥주와 함께 매콤한 토마토소스를 얹은 감자튀김 ‘빠따따스 브라바스(Patatas Bravas)‘와 꽈리고추를 올리브오일에 볶아낸 ‘삐미엔토 데 빠드론(Pimiento de Padron)’을 안주로 시켰다. 떠들썩한 웃음소리와 속사포로 쏟아지는 스페인어의 향연에 둘러싸여 우리가 함께했던 더블린의 시간을 추억하는 동안, 우리의 어깨 위에 내려앉는 저녁 해의 긴 꼬리와 붉어진 뺨을 스쳐가는 바람이 새로운 추억으로 새겨지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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