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바삐에스(Lavapies)의 냄새와 소리를 따라
처음 코끝에 와 닿은 것은 인도 향신료의 냄새였다. 인디언음식에 굶주려 있던 참이라 내 코가 더 예민하게 잡아낸 것인지도 모른다. 터머릭, 큐민, 커리 잎사귀, 고수와 계피 등이 기름과 함께 불에 볶아지는 냄새. 분명히 누군가 인도음식을 만들고 있는 것이 분명해, 생각하며 주위를 둘러보니 아니나 다를까, 20미터 앞에 ‘인도레스토랑‘이라고 쓰인 간판이 보였다. 마드리드에 와서 처음 보는 인도식당이었다. 아일랜드에서는 흔하디흔한 인도식당이 보이지 않아 궁금하던 차였다. 그런데 그 식당을 지나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인도식당이 눈앞에 나타났다. 음식사진으로 빼곡한 커다란 메뉴판과 음식의 가격도 약간 촌스럽고 허름한 분위기도 비슷했다. 그러고 보니 그 옆으로 터키음식, 아랍음식, 아프리카음식을 파는 식당들이 줄줄이 이어졌다. 식당과 이웃한 가게들도 독특했다. 남대문시장처럼 액세서리 재료, 실, 옷감 등을 전문으로 파는 가게, 물담배 시샤와 타일모자이크 등 아랍 제품을 파는 가게, 할랄제품만 취급한다는 식료품점, 아프리칸 레게머리를 땋아주는 헤어숍... 모두 스페인 밖의 나라에서 온 것들에서 나는 가슴속에서 일렁이는 어떤 달뜸을 느꼈다. 내가 살고 있어 익숙한 유럽보다는 좀 더 멀고 낯선 곳의 냄새가 나서였을까.
전통적인 스페인과 전혀 다른 스페인의 얼굴을 만날 수 있는 곳, 일명 ‘이민자의 동네‘ 라바삐에스는 마드리드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된 동네이기도 하다. 좁고 경사가 가파른 길들을 오르내리며, 끊임없이 검은 피부의 사람들과 마주쳤다. 아프리칸 이민자의 수가 특히 많아서인지 어느 길로 들어서든 마치 아프리카의 어느 곳에 와 있는 것만 같았다. 베란다를 공유하는 마드리드 전통양식의 주택들은 낡고도 낡아 이제 마지막 수명을 살고 있는 듯 보였다. 베란다 난간에 기댄 채 빼꼼히 고개를 내민 검은 얼굴들 뒤로 빨래줄에 걸린 알록달록한 옷들이 바람에 펄럭였다. 그래피티로 화려하게 채색된 담벼락과 마주한 작은 모래바닥 공원에는 3개의 벤치가 있었는데, 각 벤치마다 한 사람씩 모로 누워 잠을 자고 있었다. 새우처럼 등을 구부린 몸의 지친 표정이 마요르광장의 레스토랑에서 와인을 마시며 볕을 즐기는 사람들의 그것과 너무도 달랐다. 어느 나라에서든 이민자로 살아가는 삶은 녹록치 않을 것이다. 특히 아무런 미래도 약속해주지 않는 고국을 떠나 살아남고자 유럽으로 건너온 제3세계 이민자들이 견뎌내야 하는 시간은 어떤 것일까. 마음 바닥으로 묵지근한 무게가 내렸다. 하지만 전쟁터에서도 사랑이 꽃피고 끈질긴 생명이 이어지듯, 이들이 불어넣는 라바삐에스의 생명력은 다양한 빛깔로 피어난다. 실제로 라바삐에스는 마드리드의 젊은이들이 나이프라이프를 즐기러 많이 찾는 동네다. 시티센터에 비해 싼 물가, 얼터너티브한 분위기가 그 인기에 한몫했을 것이다.
언덕길을 오르다 문밖으로 흘러나오는 음악소리를 듣고 멈춰 섰다. 중고 레코드판을 파는 음반가게였다. 가게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소울재즈를 연주하는 색소폰의 긴 호흡이 온몸을 휘감았다. 레코드판을 하나하나 넘길 때마다 풀썩이는 먼지와 함께 오래된 시간의 냄새가 났다. 음반가게 옆옆에 있는 작은 서점은 일러스트가 들어간 스토리북을 전문으로 파는 곳이었다. 라바삐에스에는 이국적인 식당과 가게들 사이사이, 이런 문화공간들이 마치 ‘숨은그림찾기‘ 퀴즈 속의 그림들처럼 숨어 있다. 책 하나하나가 너무 예뻐서 삽화만 보고 있어도 기분이 좋아졌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색색의 그림들과 함께 은은한 잉크냄새가 기분 좋게 피어올랐다. 입구에 걸린 게시판을 살펴보니 저녁때는 이런저런 책 관련 이벤트를 진행하는 듯했다. 그런데 그 중 ‘속초에서의 겨울’이라는 책 제목이 눈에 꽂혔다. 맞다. 한국의 속초, 그 속초였다! 엘리사 듀사핀이란 젊은 여성작가가 자신이 쓴 이 책으로 강연을 하는 모양이었다. ‘속초바다‘라 식당의 흑백사진이 표지를 장식하고 있었다. 어느 해 겨울, 한국의 바닷가도시 속초에서 그녀는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느꼈을까? 나중에 기회가 되면 꼭 읽어보고 싶다. 반대편 길을 따라, 이번에는 내리막으로 접어들었다. 떠들썩한 밤을 보내고 늦잠에 빠진 청춘들처럼, 라바삐에스의 오후는 조용하고 느리게 흘러가고 있었다. 길 아래쪽에서부터 청량한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피아노곡으로 흐르던 어느 영화의 사운드트랙. 하지만 영화제목도, 노래제목도 생각나지 않았다. 뜨겁고 고요한 한낮의 공기를 가르는 아름다운 멜로디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나는 라바삐에스란 동네가 점점 더 궁금해졌다. 예쁘기만 하지 않고 상처가 보여서 더 마음이 많이 가는 친구처럼. 언젠가 화장 안 한 라바삐에스의 민낯을 마주하게 되는 날이 오면, 좀 더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줘야지. 올라, 라바삐에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