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우리 모두의 삶은 연결되어 있을지도
처음 마드리드에 왔을 때가 생각난다. 벌써 7년 전인가 보다. 나는 첫 스페인여행 중이었고 한 달의 일정 중 사흘을 마드리드에서 보냈다. 더블린에서 어학연수생으로 살고 있을 때라 영어학원에서 만난 친구들이 내 주된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있었고, 그 중 자기나라로 돌아간 스페인 친구들을 방문하는 것이 당시 내 스페인여행의 중요한 목적 중 하나였다. 바르셀로나에서 미겔을, 빌바오에서 팔로마를 만난 후 마드리드에서는 마리, 호세 커플을 만났는데, 그때 마리와 호세를 만난 곳이 바로 마요르광장이었다.
마요르광장은 마드리드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요 관광명소다. 실제로 둥근 천장을 머리에 인 좁은 통로를 지나 마요르광장이 ‘딱’ 눈앞에 펼쳐졌을 때, ‘우와!’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그 규모도 규모거니와 중앙건물인 ‘파나델리아’ 앞면 전체를 장식하고 있는 프레스코 벽화의 아름다움이 감동으로 다가왔다. 3월 말의 마드리드는 꽤 쌀쌀했고, 구름 낀 날도 잦았다. 내가 마요르광장을 찾은 날도 좀 춥고 흐린 날이었는데, 친구는 그렇게 약간 흐린 날 그림의 색감이 더 선명하게 살아나기 때문에, 벽화를 제대로 감상하려면 사실 구름 낀 날이 더 좋다고 귀띔했다.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정면에서 다시 바라봤다. 정말 벽화 속 인물들의 조금씩 다른 자세, 다른 배경이 섬세하게 눈에 들어왔다. 건물과 하늘의 경계가 흐릿해서 마치 그림 속 사람들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마요르광장 주변에는 그야말로 ‘스페인스러운‘ 레스토랑, 선술집들이 즐비했다. 자신들의 음식이 세계 최고라고 믿는 스페인사람들은 음식에 대해서 고집스러운 면이 있어서, 음식 자체뿐 아니라 먹는 공간, 음식을 서비스하는 방식까지 전통을 고집한다. 물론 학생이나 젊은층이 주로 모이는 추에까나 말라사냐에는 모던한 요즘 스타일의 공간이 많지만 최소한 마요르광장 근처로 오면 과거로 시간여행하는 기분을 즐길 수 있다. 마리와 호세가 데리고 간 빠에야 레스토랑도 그런 장소 중 하나였다. 물론 이들 레스토랑의 주요고객은 나처럼 ‘스페인스러움’을 찾아나선 외국인관광객일 것이다. 저녁을 먹은 후 둘은 나를 한 바로 안내했다. 동굴처럼 생긴 그곳은 샹그리아를 전문으로 파는 곳이었다. 물론 진짜 스페인사람들은 샹그리아를 거의 마시지 않는다. ‘관광객’인 나를 위한 마리와 호세의 배려 아닌 배려였을 것이다. 어쨌든 달달한 샹그리아에 취하는 건 시간 문제였다. 사실 술보다, 스페인에서 스페인친구들을 만나고 있다는 꿈같은 현실이 나를 취하게 했을 것이다.
7년 후 다시 찾은 5월 말의 마요르광장은 눈을 제대로 뜨기 힘들 정도로 햇빛이 강했다. 나는 부신 눈을 찡그리며 마요르광장의 프레스코 벽화를 바라보았다. 처음 보았을 때처럼 ‘헉’하는 감탄사는 터지지 않았지만 내가 다시 이 광장에 있다는 사실에 왠지 ‘울컥’하는 느낌이 들었다. 광장 한복판은 땡볕이라 오래 서 있기 힘들었다. 광장 가장자리를 돌면서 전에 보았던, 또는 그냥 지나쳤던, 혹은 보았지만 기억하지 못하는 레스토랑과 가게들을 구경했다. 광장 뒤편 골목골목 내공이 느껴지는 스페인 레스토랑들이 즐비했지만 음식을 사먹는 건 패스하기로 했다.사실 마요르광장 주변은 관광객이 많이 찾는 만큼 비싸기로도 유명했고, 난 그동안 번 돈으로 유럽여행을 즐기는 회사원이 아니라 돈도 못 벌면서 감히 낯선 도시에서 한달살이를 시작한 백수였다. 그런 나를 마요르광장의 유명한 맛집골목으로 이끈 것은 정란이였다. 나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독립심 강하고 사려 깊은 친구라 가끔 언니처럼 느껴진다. 벌써 여러 번 만나 점심이나 저녁을 같이 먹었는데, 먹을 때마다 자기가 사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한국 정서로는 언니인 내가 사주는 게 정석인데 매번 얻어먹어서 마음이 쓰였지만, 그럴만한 돈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정란이는 내 형편을 잘 알고 있었고, 필요할 때는 받을 줄도 아는 친구니 나중에 갚을 기회가 있으리라 믿었다.
정란이가 데리고 간 곳은 ‘Meson del champinon´. 번역하면 ‘버섯식당‘쯤 되겠다. 한국에서는 <꽃보다 할배>의 백일섭이 찾은 맛집으로 방송을 탄 후 유명해졌지만, 원래 헤밍웨이의 단골식당으로 오래 전부터 유명했던 곳이다. 채식을 전문으로 하는 식당 말고 전통 레스토랑 중에는 채식하는 내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많지 않은데, ‘버섯’이라니 반가웠다. 물론 전통 레시피는 채식이 아니다. 양송이버섯 안쪽 움푹 파인 곳에 스페니시 소시지인 추리초 조각을 넣어 함께 구워내는 음식인데, 주문을 받으러 온 까마레로(웨이터)에게 추리초를 빼고 양송이만 달라고 부탁했다. 사실 전통레시피를 중요시하는 오래된 식당일 수록 이런 식의 주문을 싫어하고 거절하는 경우도 많은데, 고맙게도 마음씨 좋은 까마레로가 흔쾌히 오케이를 해주었다.
동그란 접시 위에 9개의 양송이가 얌전하게 줄 맞춰 나왔다. 한 개의 버섯에 양쪽으로 이쑤시개가 2개씩 꽂혀 있다. 버섯의 둥근 홈에 고인 즙까지 흘리지 말고 먹으라는 뜻이다. 한국에서도, 아일랜드에서도 자주 먹던 버섯인데, 정말 깜짝 놀랄 정도로 맛있었다. 익은 정도도 딱 알맞고, 숯불에 구웠는지 즙을 호로록 마실 때마다 은은한 연기향이 입안에 퍼졌다. 맛있는 리오하 와인이 한 잔에 1.9유로. 믿지 못할 가격이라 얼떨결에 두 잔이나 마셨다. 식당 안은 동굴처럼 돌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우린 지하에서 먹었는데 냉방을 안 했는 데도 동굴 속에 있는 것처럼 서늘했다. 동굴과 레드와인과 양송이. 셋 사이에 무슨 연관성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완벽하게 잘 어울렸다. 각자 아일랜드, 스페인에서 사는 얘기를 시작했는데 가족, 친구, 일, 꿈, 아픔, 두려움, 그럼에도 붙잡는 희망까지 이런저런 얘기가 끝없이 흘러나왔다. 나와 정란이의 삶은 참 다르면서도 비슷하고,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정란이가 남편과의 갈등으로 힘들어하는 친구 이야기를 했는데, 내가 잘 모르는 그 친구의 아픔에 너무나 공감이 되었다. 아마 모든 인간의 삶은 적든 많든 어떤 부분 타인의 삶과 공유되는 교집합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파나데리아(베이커리)로 사용되던 시절 건물 안에서 빵을 굽던 사람들, 이후 그곳에서 파티를 즐기던 스페인의 권력자들, 프랑코 독재시절 마요르광장 한복판에서 처형을 당한 사람들... 나와 전혀 상관 없어 보이는 그들의 삶도 시간과 공간을 넘어, 어느 한 부분 나의 삶과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동굴 속 작은 탁자에 앉아 있는 나의 심장 박동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와인 잔을 모두 비운 우리 앞에 딱 하나의 양송이가 남아 있었지만 둘 다 그만 먹겠다고 했다. 나는 남은 양송이 하나를 마드리드 마요르광장에 흐르는 시간 한줌과 함께 비닐봉지에 담아 가방에 넣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