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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ya Lee Jun 05. 2019

집으로 가는 길

마드리드 리오 곁, 내 작은 공간을 찾다

오페라극장이 있는 에스파냐광장에 서서 나는 생각했다. 오페라씨어터를 향해 커메라셔터를 누르는 관광객들, 가짜 나이키신발이나 가짜 프라다가방을 파는 흑인이민자들, 마드리드에서 나고 자란 로컬들 사이, 나는 어디쯤 있는 걸까. 낯선 도시가 익숙해지는 시간. 여행자의 시공간에서 생활자의 시공간으로 넘어가는 데 걸리는 시간. 짧기도 길기도 했던 그 시간을 지나 나는 지금 이곳, 마드리드에 생활자로 안착했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무엇보다 아일랜드와 전혀 다른 마드리드의 온도와 습도에 나의 몸이 적응하면서 마음에 안정감이 찾아왔다. 하루 종일 스페인어에 둘러싸인 언어 환경에서 받던 스트레스도 조금씩 느슨해지고 있었다. 스페인어학원 수업도 점점 재밌어지고, 생활 속에서 스페인어를 써야할 때 머리를 심하게 굴리지 않고 단어를 뱉어낼 수 있는 뻔뻔함도 생겼다.

에어비앤비를 통해 찾은 세르지오의 집은 ‘마드리오 리오’(한강공원과 비슷하게 강물을 따라 조성된 공원 지대) 지역에 있었다. 시티센터와 거리가 좀 있는 대신 가격이 저렴하고, 평범한 마드리드 노동자계층이 살아가는 일상의 분위기를 가감 없이 느낄 수 있는 동네다. 오래된 건물 창고를 주거공간으로 개조한 그의 집은, 그래서 독립된 번지수가 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73번지 건물의 한 귀퉁이를 빌려주고 있는 형태였다. 애어비앤비 사이트에 그가 설명해놓은 대로, 식탁과 거실탁자는 물론 식기수납함, 나뭇가지를 잘라 만든 벽면의 옷걸이까지, 직접 뚝딱뚝딱 지은 솜씨가 제법이었다. 홍대나 합정 쯤 어느 예술가의 스튜디오가 그와 비슷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가 에어비앤비 사이트에 올린 사진을 보고 상상했던 집의 이미지와는 많이 달랐다. 사진 속, 볕이 잘 드는 창가 곁에 놓인 낮은 탁자와 빈티지소파를 보며 아늑하고 따스한 공간을 상상했는데, 돌로 된 바닥과 중앙이 텅 빈 구조 때문인지 조금 차갑고 휑한 느낌이 들었다. 사진 속에서 봤던 빈티지 소파와 탁자는 그 텅 빈 스튜디오의 한쪽 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 옆에는 제법 큰 책상과 최신버전의 애플컴퓨터가 놓여 있었다. 프리랜서로 예술공간 설계 일을 하는 세르지오의 업무공간인 듯했다. 거기에서 나무 층계를 네 칸 오르면 오른쪽에 직은 식탁과 냉장고, 왼쪽에 가스레인지와 개수대가 있고, 그 안쪽으로 방 2개와 화장실이 있었다. 그 중 왼쪽 끝방이 내가 한 달 동안 지낼 방이었다. 밖으로 난 창이 없어 어둡고 서늘한 느낌이 없지 않았지만 혼자 쓰기에 넉넉한 크기의 침대와 폭신하고 깨끗한 이불, 자연친화적인 빈티지 서랍장과 조명등이 마음에 들었다. 처음 며칠은 화장실과 거실, 주방을 낯선 사람과 함께 쓰는 것이 은근히 불편했지만, 일단 세르지오의 생활패턴을 파악하고 나니 공간을 나눠 쓰는 일이 훨씬 수월해졌다. 그가 일어나기 전에 샤워와 아침식사를 마치고 집을 나서고, 그가 8시쯤 저녁 준비를 시작하기 전에 간단히 저녁을 챙겨 먹는 등, 그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나만의 시간과 공간을 확보하는 방법을 터득한 것이다.

어젯밤에는 처음으로 하루일과를 마치고 집에 가는 길이, 정말 ‘내 공간‘, ‘쉴 곳’으로 돌아가는 길로 느껴졌다. 해가 뉘엿이 기울면서 한낮의 열기가 잦아드는 시간, 동네 야채가게는 저녁장을 보는 사람들로 붐비고, 선술집들이 길가에 펼쳐놓은 플라스틱 탁자마다 동네사람들이 삼삼오오 둘러앉아 차가운 맥주로 목을 축이고 있었다. 민소매에 슬리퍼차림으로 개와 산책을 나온 아줌마가 우연히 만난 이웃과 속사포 스페인어로 수다를 떠는 동안, 나는 100미터 남은 언덕길을 온 힘을 다해 올랐다. 그리고 집에 닿았다. 마드리드의 내 집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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