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aya Lee Aug 10. 2019

복합문화공간 ‘엘 마따데로‘(El Matadero)

죽음의 공간에서 창조와 생명의 공간으로

“혹시 독립영화나 다큐멘터리필름 좋아하면 엘마따데로에 꼭 가봐. 영화관 말고도 갤러리, 카페 등등 시설도 다양하고 흥미로운 기획전도 자주 있어. 주말에는 유기농마켓도 열리고.” 세르지오의 추천을 받고 알아본 ‘엘 마따데로‘는 아주 흥미로운 장소였다. 지도를 보니 세르지오의집에서도 그리 멀지 않았다. 엘 마따데로(El Matadero)라는 이름은 ‘도축장’이라는 뜻으로, 실제로 아주 오랫동안 마드리드 최대 규모의 도축장으로 사용되었던 건물을 복합문화공간으로 바꾼 곳이다. 물론 이런 대담한 기획이 자연스럽게 도출된 것은 아니었다. 도축장이 문을 닫은 후 꽤 오랫동안 유령건물로 방치되어 있었고, 결국 새로운 도시계획에 따라 그대로 사라질 운명이었다. 그 운명을 바꾼 것은 일반시민들이었다. 건물의 용도가 무엇이었든지 간에 역사적 의미가 있는 건축물을 없애 버린다는 것은 국가적 손실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 건물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을 방도를 놓고 머리를 맞댄 결과, 마드리드의 다른 문화공간들과 차별된 독특한 복합문화공간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 엘 마따데로에 가보기로 마음먹은 토요일, 날씨는 더 없이 맑고 화창했다. 매일 아침 샌들에 짧은 원피스 차림으로 집을 나설 때마다 내가 스페인에 있다는 것이 실감났고, 존에 대한 그리움과는 별개로 아일랜드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커지곤 했다. 아일랜드에서 쌀쌀한 바람을 막기 위해 늘 몇 겹씩 옷을 껴입고 다닐 때는 미처 몰랐다, 옷의 무게에서 해방되는 기분이 그렇게 자유로운 것인지. 마침 주말장터가 열리는 날이라 더 기대가 됐다. 세상에 시장 구경만큼 재미있는 것도 없다. 라페이스 지하철역에서 출구로 나가니 제각각 갈라져 나간 큰 길이 네 개나 되었다. 다행히 대각선 길 건너편에 ‘엘 마따데로’라고 쓰인 커다란 글씨가 금세 눈에 들어왔다. 공중에 탑처럼 솟은 기둥의 머리둘레에 그렇게 적혀 있었다. 입간판이 보이는 방향으로 걸어가다 보니 아치형 입간판이 걸린 입구가 나왔다. 눈앞에 펼쳐진 공간은 생각보다 훨씬 넓고, 나란히 줄을 맞춰 길게 이어진 벽돌 건물들의 모습은 아름답고 웅장했다. 붉은 벽돌과 크림색 벽돌을 타일처럼 일정한 패턴으로 쌓아올린 외벽과 여러 개의 네모난 기둥으로 높은 천장과 바닥을 연결한 내부의 모습은 20세기 초 네오-무다헤르(Neo Mudajer) 스타일이라 했다. 실제로 20세기 초에 초에 지어진 건축물이라는데, 세월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무척 잘 보존되어 있었다. 숫자와 알파벳의 조합으로 이어진 건물들은 이제, 원래의 탄생 목적과는 전혀 다른 역할을 하고 있었다. 입구에 있는 카페 옆으로는 다양한 나라의 독립영화를 상영하는 시네테크가, 그 옆으로는 강의, 세미나, 포럼 등이 열리는 강의실, 그 옆은 아이들이 나이에 맞는 예술활동을 하며 뛰어 놀 수 있는 창의적 놀이공간이 있고, 맞은편으로는 로컬예술가들의 사진, 그림, 설치작품 등을 전시하는 몇 개의 갤러리가 이웃해 있다. 나는 그 건물들 하나하나 천천히 구경하고 나와, 건물의 지붕이 만들어준 그늘 아래 앉아 잠시 쉬었다. 친구들과 함께 온 젊은 층이 특히 눈에 많이 띄었고, 눈에 아이들을 위한 공간이 있어서인지 가족 단위로 온 사람들도 많이 보였다. 시내 중심에 있지 않고, 주류가 아닌 비주류 예술과 더 친한 곳인데도 누구나 부담 없이 올 수 있는 포용의 분위기가 그곳에 있었다. 처음 그 공간 안에 발을 디딜 때는 각 건물 안에서 고기가 되기 위해 죽어나갔을 소들이, 그 장면들이 자꾸만 상상되어 솔직히 마음이 좀 수선스러웠는데, 각 공간이 멋지게 변신한 모습과 마들레뇨들이 행복한 모습으로 그곳을 찾는 모습을 보니 다시 기분이 좋아지고 평화가 찾아들었다. 물론 동물의 권리와 상관없는 이유로 예술 공간의 옷을 입게 되었지만, 그래도 그 건물들이 사라지지 않고 ‘죽음’이 아닌 ‘창조’를 목적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의미 있게 생각되었다.

건물 왼편으로 학교운동장처럼 직사각형으로 넓게 펼쳐진 공터에는 토요일 장터가 한창이었다. 직접 만든 빵과 잼, 케이크 등을 파는 가게들, 올리브유, 와인식초, 천연비누 등 스페인 특산품을 파는 가게들, 각종 스페니시 타파스부터 비건버거까지 식욕 돋우는 음식을 즉석에서 만들어 파는 가게들, 스페인맥주를 직접 탭에서 따라주는 간이 바와 유기농야채와 과일을 파는 가게들까지, 다양한 가게들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구경만 하고 있어도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재미있었다. 전통적인 푸드마켓의 형태에 현재 사람들의 관심과 비전, 스타일이 더해진 현대적 푸드마켓, 딱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라 더 그랬던 것 같다. 비건버거를 시도해보고 싶었으나 배가 별로 고프지 않아 포기, 대신 다음날 아침에 먹을 유기능 스펠트밀로 만든 바게트와 과일100%로 만들었다는 패션푸르트 아이스크림을 샀다. 옛날 동네에서 사먹던 샤베트바처럼 생긴 아이스크림을 조금씩 깨물어 먹으며 집으로 가는 길. 내가 나중에 마드리드에 살게 된다면 이곳이 내 아지트가 될 거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남자에 대한 직감은 틀린 적이 많아도 장소에 대한 직감은 틀린 적이 없으니, 이 특별한 ‘도살장’과 나는 분명히 또 반갑게 만나게 될 것이다. **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