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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ya Lee Apr 16. 2020

부활절의 햇살 한 줌

4월 12일 : 내면으로 흐르는 시간을 바라보다

Dear diary. 우리는 아주 조용한 부활절을 지나고 있어. 아일랜드에서 부활절은 여름휴가와 크리스마스 다음으로 긴 연휴가 주어지는 절기라, 보통 많은 사람들이 여행을 가거나 가족들과 집에 모여 시끌벅적 만찬을 즐기며 보내는데 이렇게 민둥민둥한 부활절이라니!

덤으로 분위기마저 험악해. 지난주 부활절 연휴가 시작되면서 사람들의 이동이 많아질 것을 대비해 경찰들이 길거리에 쫙 깔렸거든. 지나가는 차량을 일일이 세워 어느 가는 길인지 묻고, 주소지를 확인해 특별한 사유 없이 2킬로미터를 벗어난 경우는 집으로 돌려보내는 강도 높은 통제가 이어지고 있어.

부활절 연휴에 떠나려고 두 달 전 계획해 두었다가 결국 포기해야 했던 프랑스 남부 여행이 생각난다. 비행기표랑 숙소랑 다 취소하면서 얼마나 가슴이 쓰렸는지 몰라. 원래 계획대로라면 지금쯤 우리는 마르세이유에서 칸으로 가는 기차를 타고 있을 텐데. 게다가 오늘은 구름이 낮게 깔린 회색 하늘이 스산한 바람을 데리고 종일 내 방 창가를 두리번거리는 탓에 마음이 가라앉지 않도록 두 배로 기운을 내야 했어.

코로나바이러스가 시작된 이후 맞은 성패트릭스데이와 부활절에 이어 앞으로 다가올 많은 기념일들도 이렇게 ‘역사상 가장 조용한 기념일’로 지나가겠지? 5월까지 바이러스가 어느 정도 잡힌다고 해도 이미 수많은 축제들이 취소된 이번 여름은 여느 때와 달리 많이 쓸쓸할 것 같아. 더구나 올해 여름에 엄마, 언니랑 채환이, 동생네 네 식구까지, 온 가족이 다 같이 아일랜드에 오기로 했던 우리 가족 일생일대의 계획마저 소리 없이 물거품이 되어 버린 걸. 엄마랑 둘이 가려던 뉴욕 여행 계획도 마찬가지고. 그래도 난 이번 여름이 기다려져. 여름은 아일랜드에서 가장 아름다운 계절이니까. 덥지도 춥지도 않고, 바람은 다정하고 햇살은 눈부시며 산과 들판은 한없이 녹색인, 한 달 남짓의 짧고 빛나는 시간. 그때 나라 안팎의 상황이 어떨지, 또 나는 어떤 상황에 있을지 전혀 모르지만, 내가 사랑하는 계절이 변함없이 찾아와 줄 거라는 사실만으로도 큰 위로가 돼. 자꾸만 가라앉는 마음을 추스르며 생각했어. ‘그래도 부활절이잖아.’ 그래,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날. 그래서 내 영혼도 다시 살게 된 날. 죽은 듯 생기를 잃어버린 도시, 걱정과 불안으로 웃음을 잃어버린 사람들, 집에서 고립되어 흐린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나. 이런 우울한 상황에서 ‘다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내 안에 떠오르는 단어는 ‘자유’와 ‘기쁨’이었어. 멈추었던 경제가 다시 움직이고 다시 친구들과 모여 웃고 떠들 수 있게 되면 자유와 기쁨을 느끼겠지만, 그렇게 찾은 자유와 기쁨은 상황에 따라 언제든 다시 빼앗길 수 있는 거잖아.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신 이유는 우리가 상황과 관계없이 누릴 있는 자유와 기쁨을 주기 위해서고, 나는 그 자유와 기쁨을 다시 찾고 싶었어. 나는 조용히 내 안으로 흐르는 시간을 바라봤어. 코로나 바이러스로 전 세계 모든 분야에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는 가운데도 변하지 않는 진실이 있었어. 우주의 시간과 인간의 지식을 초월해 지금 나와 우리 모두를 향하고 있는 사랑. 오늘 오후 오래도록 그 사랑을 생각했어. 불안하고 우울했던 마음이 편안해지고 봄처럼 따듯한 기운이 부드럽게 내 몸을 감싸주었어. 인간사회의 움직임이 멈춘 요즘, 어쩌면 앞만 보고 바쁘게 달려온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멈추고 각자의 내면을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게 아닐까. 내 삶에서 더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 더 사랑해야 할 것과 덜 사랑해야 할 것, 취해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 매일매일 조금씩 찾아나가려고 해.


우리에게는 지금 이 시간이 길고 아득하게 느껴지지만 영원의 시간에서 보면 찰나의 순간에 불과하겠지. 하지만 현재의 순간순간이 영원만큼 소중하다고 믿어. 흐린 날 찾아든 한줌의 햇살이 한여름 바닷가에서 온몸으로 즐기는 뜨거운 햇볕만큼 큰 힘이 될 수 있다고 믿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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