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첫날 아주 작은 일상의 조각에서 찾은 행복
어젯밤 막 2021년으로 넘어가는 순간을 축하하고 방으로 돌아와 휴대폰을 충전하려는데 케이블핀이 휴대폰 충전단자 중간에 걸려 더 이상 들어가지 않았다. 마침 아이폰 케이블이 하나 더 있어 그 것으로 시도해 봤지만 마찬가지였다. 휴대폰 자체 기능에는 이상이 없는 것을 보면 충전단자의 문제 같았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아무 문제 없던 휴대폰에 갑자기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새해 첫 순간을 '휴대폰 고장'으로 시작하다니, 기분이 아주 별로였다. 설상가상 1월 1일이라 문 연 수리점도 없을 테고 다음날은 토요일이니 일요일까지 3일 동안은 꼼짝 없이 휴대폰 없이 지내야 할 판이었다. 게다가 일주일 전부터 5단계 봉쇄조치가 내려진 상황이라 평일이라도 문을 열기나 하는지 미지수다. 그나저나 월요일까지 기다려보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그리하여 새해 첫날 아침, 나는 휴대폰도 없고 남편도 (일하러 가서) 없는 적막한 집에 혼자 덩그러니 남겨졌다. 일단 나한테 연락이 안되면 걱정할 몇몇 사람들에게 컴퓨터로 사정을 설명한 카톡메시지를 보내두었다. 지난 한해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데 어느 정도 훈련이 된 덕분에 답답하거나 외롭지는 않았지만, 늘 손에 있던 휴대폰이 없으니 나도 모르게 마음이 안절부절했다.
하지만 일단 휴대폰이 없는 상황을 받아들이고 나니 점점 휴대폰에 대한 집착이 희미해졌다. 처음 느낌은 바깥세상과의 연결고리가 끊어지는 것에 대한 불안이었지만, 오히려 시간이 갈 수록 내가 연결되어 있던 수많은 복잡한 고리가 끊어져 단순해진 시공간 속에서 미묘한 자유를 느꼈다. 현실을 벗어나 내면의 소리에 집중하고 싶어 떠났던 숱한 여행의 이유가 뜻밖의 순간 내 현실에서 실현되어 버린 기분이랄까.
오랜만의 맑은 날이었다. 아일랜드의 겨울 동안 이렇게 해가 반짝 나는 날은 정말 만나기 힘들다. 더구나 바람도 없다. 새해 첫날의 선물 같았다. 점심으로 떡국을 만들어 먹으려 했는데 냉동실에서 떡을 꺼내놓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쉽지만 떡국은 내일 먹기로 하고, 현미가루를 풀어 남은 호박을 쫑쫑 썰어 넣고 호박 부침개를 만들었다. 그리고도 조금 남은 호박과 양파는 된장을 살짝 푼 채수에 넣어 맑은 된장국을 만들었다. 식탁 위로 내리는 햇살이 너무 좋아, 블라인드도 내리지 않고 눈이 부신 채로 먹었다.
오후 2시 조금 넘어 산책을 나섰다. 산책이라고 해봤자 브레이 타운까지 걸어갔다가 오는 루트지만, 집이 타운에서 꽤 멀다 보니 타운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데만 1시간이 넘게 걸린다. 아일랜드 겨울 치고 그리 춥지 않은 날씨였다. 날씨가 추우면 저절로 몸을 움츠리고 앞만 보고 걷게 되는데, 날씨가 좋으면 걸음걸이와 시선에도 여유가 생긴다. 나뭇잎을 모두 떨궈낸 나뭇가지들이 어깨를 맞대고 하늘을 향해 가늘게 길게 뻗어오른 모습이 참 예뻤다. 한 걸음씩 내딛을 때마다 두 뺨에 와닿는 맑고 차가운 공기의 느낌,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사람들의 머리 위에서 스타카토처럼 튕겨오르는 투명한 햇빛 조각들, 살짝 가빠진 내 숨소리까지... 내 세포 하나하나가 그 순간을 온전히 느끼려고 깨어나는 것만 같았다.
타운에서 필요한 물건을 몇 가지 사고, 카페에서 아메리카노를 사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조금씩 홀짝였다. 따뜻한 커피가 한 모금씩 목줄기를 타고 넘어갈 때마다 찬 공기에 굳어 있던 몸이 노곤하게 녹아내렸다. 아일랜드의 겨울해는 유난히 짧다. 오후 4시도 채 되지 않았는데 벌써 뉘엿 기울기 시작했다. 집을 나설 때보다 한층 차분하고 부드러워진 빛이 다정한 친구처럼 곁에서 집까지 동행해 주었다.
4층까지 걸어올라 집 현관문 앞에 도착했을 때, 난 마지막 남은 한 모금의 커피를 들이켰다. 그리고 열쇠로 문을 열며 생각했다. 새해의 첫날에 어울리는 가장 평화롭고 완벽한 산책이었다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