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의 에너지로 연결된 다른 존재들의 시간을 생각하며
마드리드에 온 지 일주일이 지났다. 생각보다 추운 날씨에 독한 감기와 생리통이 겹쳐 힘든 시간이었다. 얼마나 어렵게 결정한 한달인데 마드리드까지 와서 침대에 누워 며칠을 보내고 있자니, 무심히 흐르는 시간이 약해 빠진 내 몸뚱이가 그렇게 야속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내 상황과 상관 없이 시간은 흘러갔다. 내가 열심히 콧물을 풀어대는 사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폭탄을 쏟아부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내가 스페인어 사전을 뒤적이며 동네마트에서 장을 보는 동안, 깜짝번개로 제주로 떠난 친구들이 봄이 오는 사계의 고운 볕을 받으며 찍은 사진을 보내왔다. 그 와중에 페이스북을 통해 한국에 있는 친한 동생이 갑작스런 피부괴사로 응급실에 실려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지인들의 걱정과 격려의 답글이 빠르게 올라왔고 나도 병원비를 모금하는 손길에 작은 마음을 보탰다.
아일랜드로 돌아간 존도 나처럼 감기를 앓고 있었다. 그나 나나 카디즈에서 보낸 일주일 동안 좀 무리를 한 모양이다. 서로 빨리 낫기를 기도하면서도 남편이 함께 앓아주니 마음으로는 위로가 되었다.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흐르는 시간 속에서 내 몸은 조금씩 회복되고 있었고 기분도 점점 나아졌다. 며칠 비가 뿌리던 마드리드의 하늘이 투명하게 개이고 하루종일 따뜻한 햇살이 가득하던 날, 마드리드에 도착한 후 처음으로 긴 산책을 했다. 한달살이 집이 있는 곳은 유명한 스페인 화가의 이름을 딴 '고야'라는 동네인데, 시내와 멀지 않으면서도 온갖 편의시설과 개성 있는 카페와 상점들, 전형적인 스페인 아파트 건물 주변으로 바, 베이커리, 과일가게 등이 옹기종기 자리를 잡고 있다. 마드리드에서 살고 싶은 동네, 리스트 1순위에 올렸다.
길을 걷다가 예쁜 옷가게에 들어가 아이쇼핑도 하고 직접 로스팅한 커피가 맛있다는 작은 카페에 앉아 커피도 홀짝였다. 검색해 두었던 채식식당을 찾아가 맛있는 점심을 먹고, 오랜만에 한국에 계신 엄마와 통화를 했다.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니 혼자라는 느낌도 눈 녹듯 사라졌다. 나는 안전하고 자유로웠고, 소박하지만 따뜻한 숙소와 음식을 누릴 수 있는 여유도 있었다.
같은 시간, 다르게 흐르는 시간들에 대해 생각한다. 지금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시간 우크라이나에서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나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시간이 흐르고 있을 것이다. 또 다른 전쟁들도 있다. 세계 곳곳에서는 코로나와의 전쟁이 계속되고 있고, 한국은 새로운 대통령을 뽑기 위한 대선 전쟁으로 떠들썩하다.
크고 작은 전쟁이 멈추지 않는 세상에서 우리는 꾸준히 저마다의 일상을 살아간다. 매일 저마다의 이야기를 짓는다. 지구 한편에서는 어떤 이들이 폭탄을 피해 도망가는 동안 어떤 한편에는 친구를 만나 맥주를 마시고 있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구에 사는 우리 모두는 우주의 에너지로 연결되어 있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내가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아픔에 모른 척할 수 없는 이유다. 내가 이 세상 모든 아픔을 그리스도처럼 지고 갈 수는 없어도 마음과 행동을 보탤 수는 있다.
그러니 누군가의 불행을 보고 느끼는 상대적인 행복, 또는 누군가의 행복을 보고 느끼는 상대적인 불행이란 얼마나 덧없는가. 마찬가지로 남의 불행을 보며 느끼는 상대적 안도감을 감사로 착각하며 살기는 얼마나 쉬운가. 반대로 내가 갖지 못한 다른 사람의 삶을 부러워하다가 내가 받은 축복이 무엇인지조차 깨닫지 못하는 경우는 또 얼마나 많은가.
내일부터 나의 일상은 어학원에서 스페인어를 배우고 집에 돌아와 스페인어를 연습하고 공부하는 것으로 채워질 것이다. 아주 개인적인 이유와 목적으로 하는 일이지만, 이렇게 시작한 내 작은 선택과 노력들이 언젠가 지금 나와 다른 종류의 시간을 지나고 있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선한 영향력이 되기를 기도한다. 무엇보다 마드리드에서 흐르고 있는 나의 시간을 감사로 채우고 싶다. 몸과 마음이 아픈 순간에도 감사할 수 있는 내공이라면 어디에서라도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