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춤바람의 다정한 위로 <Swing>
바람이 많이 불고 가는 빗발이 진눈깨비처럼 흩날리는 날이었다. 바람막이 점퍼의 지퍼를 귀 뒷머리까지 바싹 올려 채우고, 정신 사납게 펄럭이는 앞머리에 간난이처럼 머리핀을 질러 꽂은 채, 몇 겹으로 겹쳐 입은 옷 속에 숨듯이 몸을 웅크리고 걸었다. 글을 쓰려고 노트북도 넣고, 읽을 책도 두 권이나 넣어 이미 충분히 무거워진 베낭이 어깨를 짓눌렀다. 하지만 막상 글을 쓰려고 노트북을 펼치면 생각들이 문장이 되기 전에 조각조각 흩어져 버렸다. 억지로 붙잡아 구겨 집어넣어 문장들을 만들어 봐도 어느 하나 맘에 들지 않았다. 문득,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써야 했던 시간들이 생각났다. 매체마다 원하는 색깔과 형태의 글이 있었고 마감이라는 정해진 시간이 있었다. 난 각 매체의 요구에 맞춰 글을 만들어냈고, 그 대가로 돈을 받았다. 내가 사랑했던 내 직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뭔가 쫓기며 글을 써야 한다는 것이 슬펐다. 할 수만 있다면 가슴이 벅차오르듯 충만해지면서 새로운 표현과 문장들이 팝업창처럼 머리에서 열리는 순간, 소위 '영감이 올 때'만 글을 쓰고 싶었다. 하지만 이것이 얼마나 오만하고 게으른 생각인지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성공한 베스트셀러 작가든 작품으로 우리 문학사에 이름을 남긴 작가든, 어느 누구도 타고난 재능만으로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오히려 글쓰기가 얼마나 단단한 인내심과 지난한 시간의 싸움을 필요로 하는 노동인지 고백한다. 그러니 1%의 타고난 문학천재들을 제외하고는...그렇다, 계속 '글쟁이'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글'이란 녀석을 끈질기게 붙잡고 마음과 영혼을 쏟아내는 방법밖에 없다. 그러니 오늘 글이 한줄도 안 써져 '내가 계속 글을 쓸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절망이 엄습하더라도, 내일 다시 던져 놓았던 노트북을 열고 전원을 꽂아야 한다.
결혼 전 홍대 근처 작은 오피스텔에서 혼자 살며 프리랜서로 글을 쓸 때도 종종 이런 날이 있었다. 이렇게 제대로 된 문장을 한 개도 만들어내지 못해 답답하고 슬픈 날이면, 난 혼자 영화관이나 극장에 가곤 했다. 주로 광화문에 있는 씨네큐브나 스폰지하우스, 상수역 근처의 상상마당영화관을 많이 갔는데, 영화에 대한 내 취향이 그렇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혼자 숨어들기 좋은 곳들이었다. 연극이 보고 싶은 날은 주로 대학로의 소극장들을 찾았다. 작고 어두운 소극장 의자에 앉아 무대 위의 삶을 바라보고 있으면 죽었던 마음의 세포들이 다시 온화한 공기를 품고 살아나는 것 같았다.
아일랜드 살이 초기에 가장 그리웠던 것도 바로 내가 종종 마음의 위로를 얻던 그 공간들이었다. 더구나 영어는 딸리지, 영화표는 비싸지, 사실 그땐 괜한 돈 낭비만 한 것 같은 기분으로 영화관을 나서는 날도 많았다. 그런데 1년, 2년 시간이 지나면서 영어로 가득한 세상에 익숙해지고 내일 또 비가 올 거라는 사실에 무덤덤해지니 좀 살 것 같았다. 무엇보다 지도 없이 찾아갈 수 있는 길들이 많아지니, 전에 보지 못했던 작은 골목과 장소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특히 갤러리를 비롯해 음악, 영화, 연극 등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의 발견은 늘 날 설레게 했다. 마음이 답답하고 창작을 위한 새로운 영감의 수혈이 필요할 때마다 몰래 숨어들 수 있는 그런 공간들, 나의 아지트가 이제 아일랜드에도 생겼다.
던리어리 거리에 걸려 있는 'Swing' 포스터를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에 품고 있었더랬다. 2년 전 Bewley's cafe 소극장에서 했던, 보고 싶었는데 놓쳤던 그 연극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바로 그날, 존이 기타연주하러 친구집 가버리고 없더라도, 그래서 혼자 가야 하더라도 꼭 봐야겠다 싶은 날이었다.
<Swing>은 사교댄스의 하나인 '스윙'을 함께 배우며 친밀감을 쌓아가는 남녀의 이야기를 춤과 음악 속에 녹여낸 작품이다. 단 두 명의 배우가 단 두 개의 의자가 놓인 무대에서 1시간 동안 10명의 역할을 해낸다. 작지만 꽉찬 느낌.
내가 마음의 위로를 얻기 위해 극장으로 숨어든 것처럼, 두 사람도 비슷한 이유로 스윙댄스클럽을 찾는다. 너무 익숙해서 진짜인지 아닌지 알 수 없어진 삶의 공간을 벗어나 낯선 스탭을 밟아보는 거다. 원, 투, 쓰리, 포...두 사람은 락앤롤 리듬에 맞춰 다리를 앞, 뒤, 옆으로 바쁘게 움직이며, 파트너에게 의지해 스릴 있게 멋진 회전을 시도해 보기도 한다. 춤은 안 쓰던 다리의 근육뿐 아니라 마음의 근육도 움직이게 만든다. 단단하게 굳었던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탄력이 붙기 시작하면서, 서로를 향해서도 서서히 열리기 시작한다.
파트너가 바뀔 때마다 두 사람은 각각 새로운 파트너의 독특한 캐릭터를 연기하는데, 그들이 코믹하게 그려내는 다양한 인간군상이 단순한 무대를 단조롭지 않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1시간 동안 쉬지 않고 춤을 추며 대사를 쳐낸 두 배우의 얼굴이 땀으로 범벅이 되고, 대사 끝에 가쁜 숨이 매달리는 무대 마지막 순간의 카타르시스. 암전이 되고 박수가 쏟아졌다. 그리고 두 사람이 함께 밟는 스탭에 따라 낮게 가라앉았던 내 마음 어딘가로부터 가볍고 따스한 생기가 춤을 추며 올라오고 있었다. 스윙스윙스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