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st Cork에서의 사흘밤(1)

작은 강이 노래하는 마을 'Skibbereen'

by Maya Lee

아침 일찍 일어나 어젯밤 덜 꾸린 베낭을 쌌다. 오랜만의 혼자 여행이다. 몇 주 전 아이리쉬타임즈 주말매거진에서 '웨스트 코크 푸드 페스티벌' 기사를 본 뒤로 줄곧 마음이 끌리던 차였다. 4년 전 혼자 코크 시티와 킨세일을 다녀왔고, 지난해 존과 함께 코브항에서 주말을 보내긴 했지만, 시티에서 좀더 외떨어진 코크의 서쪽지역 '웨스트 코크'는 이번이 처음이다. 해외로 나가는 것도 아니고 3박4일의 짧은 여행인데 이상하게 좀 긴장이 됐다. '여행이란 혼자 하는 것'이었던 삶에서 '둘이 하는 것'으로 바뀐 뒤로 일어난 변화다. 하지만 결혼한 뒤에도 혼자 여행을 할 땐 예전의 나로 돌아가 가난한 베낭여행자가 된다. 저가의 호스텔이나 게스트하우스에서 잠을 자고, 버스나 기차를 탄다. 존과 함께라면 두리번거렸을 멋진 레스트랑 대신 아침에 부랴부랴 만든 샌드위치와 과일 몇 개로 두어 끼의 식사를 때우게 되겠지만, 이것도 나쁘지 않다. 아니, 결혼한 후에도 가끔은 이렇게 홀로 떠나는 시간이 필요함을 느낀다. 내 자신을 돌아보고, 새로운 내 자신을 발견하고, 서로에 대한 그리움을 확인하는 시간들이.

브레이에서 버스를 타고 더블린의 휴스턴 기차역으로 가서 기차를 타고 코크 시티로, 거기서 다시 버스로 갈아타고 2시간을 더 가야 하는, 반나절의 긴 여정이었다. 내가 그동안 아일랜드를 조그만 나라라고 얕봤구나 싶었다. 그래도 지루하거나 힘들지는 않았다. 차창 밖으로 끝없이 흘러가는 아일랜드의 초록 들판과 산, 점점이 하얀 집들, 강과 바다, 평화롭게 풀을 뜯는 소, 말, 양, 염소 무리를 바라보다 까무룩 선잠이 들기도 하고, 잠이 깨면 아이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가져온 책을 읽기도 하며, 눈을 감고 하나님께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다시 졸기도 하는 사이, 난 드디어 웨스트 코크의 스키버린(Skibbereen)이라는 작은 마을에 와 있었다.

낯선 도시나 마을에 도착하면 늘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숙소를 찾아 짐을 푸는 것이다. 일단 그날 밤의 잠자리를 확인하고 어깨를 누르고 있던 짐을 내려놓고 나면, 긴장감이 사라지고 기대감에 들뜨면서 모험을 시작할 몸과 마음의 준비가 된다.

워낙 작은 타운이라 다행히 많이 안 헤매고 예약한 호스텔을 찾아냈다. 다음날 아침 일찍 반트리로 떠날 예정이라 엄청 혹독한 리뷰에도 불구하고 위치를 생각해 타운 중심에 있는 호스텔을 예약했는데, 문을 열고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낡은 카페트에서 올라오는 케케묵은 먼지와 곰팡이 냄새 같은 것들이 동시에 훅 끼쳐왔다. 순간, 내가 읽은 리뷰들이 과장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좁은 층계를 따라 오르고 있을 때, 바쁜 걸음으로 내려오고 있는 한 남자와 마주쳤다. 호스텔 직원인 것 같아 '방을 예약했다'고 했더니, '그러냐, 확인하고 열쇠를 갖다줄 테니 리셉션에서 기다리라' 하고는 밖으로 사라졌다. 한층을 더 오르니 그가 말한 '리셉션'이 나왔다. 그런데 그가 말한 '리셉션'이라는 게 낡은 검정 가죽소파와 나무 테이블 하나만 덜렁 놓여 있는 서너평짜리 공간. 오래된 여관 같기도 하고 변두리 만화방 같기도 한, 어두침침한 그 공간에 혼자 앉아 그 남자가 돌아오길 기다리는 동안 나는 바짝 긴장이 되었다. 지금이라도 다른 숙소를 알아봐야 하는 거 아닌가 고민하고 있는데, 남자가 헐레벌떡 돌아왔다. "따라 와. 방 보여줄게."

그를 따라 간 제일 구석진 방. 3명이 함께 쓰는 도미토리룸을 예약했는데, 방에는 벙크침대 하나뿐이었다. 낮은 쪽 침대가 좀더 큰 것을 보니, 2인용인 듯했다. 화장실이 딸린 방이었는데 제대로 청소가 안됐는지 방 전체에서 화장실 냄새가 났다. 그나마 다른 예약한 사람이 없어 방을 혼자 쓰게 될 거라는 남자의 말에 위로가 됐다. 남자는 바로 옆 건물에 있는 펍으로 와서 내라"는 말을 남기고 또 바쁘게 사라졌다. 아일랜드에 살기 시작한 이래 만난 최악의 숙소였다. 하지만 어차피 하룻밤 잠만 자고 일찍 떠날 예정이니 크게 마음 쓰지 말자 다독이며 천천히 동네를 탐험할 준비를 했다.


스키버린은 생각보다 더 작고 조용한 시골마을이었다. 기대했던 푸드 페스티벌에 대해 먼저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상상한 떠들석한 '축제'와는 거리가 멀었다. 나름 신문에 크게 실렸던 축제인데, 메인거리에 플래카드 하나 걸려 있지 않다니 좀 이상했다. 그나마 페스티벌의 일부로 'Bread & Butter' 전시가 진행 중인 타운홀과 웨스트 코크 출신 작가들의 작품이 전시 중인 아트갤러리 앞에 세워진 판넬, 몇몇 레스토랑 유리창에 붙어 있는 포스터가 축제 중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일단 배도 채울 겸 아트갤러리 안에 있는 카페에 들어가 스프를 한 그릇 시켜놓고 브로슈어를 다시 꼼꼼히 살펴봤다. 대부분의 메인 프로그램이 웨스트 코크의 레스토랑들이 그 지역에서 생산된 식재료로 만든 음식을 특별메뉴로 선보이는 식이었다. 문제는 저녁 한끼를 40~50유로씩 내고 사먹을 돈도 없거니와, 해산물이 유명한 지역이라 채식주의자인 내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이 거의 없다는 것. 실망감이 스멀스멀 올라오려는 찰나, 한 프로그램에 시선이 멈췄다.

'뮤지컬 리뷰 공연 - Eileen and Marilyn do New York' / Riverside cafe / 6~8:30pm'

카페에서 열리는 작은 뮤지컬 공연인 듯한데 저녁식사까지 포함된 가격이 15유로! 이 정도면 쓸 수 있겠다 싶었다. 무엇보다 로컬 배우들의 공연을 소극장 같은 분위기에서 볼 수 있다는 것에 마음이 끌렸다. 장소도 확인해 둘 겸 카페에 직접 찾아가 자리를 예약하고, 남은 시간은 아트갤러리에서 코크 작가들의 페인팅, 조각, 펠트 작품을 감상하며 보냈다. 거칠고도 순수한 아틀랜틱해의 푸른 물과 하얀 소용돌이, 짙은 초록의 계곡과 한가로이 풀을 뜯는 양들...앞으로 발견하게 될 웨스트 코크 지방의 마술 같은 풍경을 그렇게 미리 맛봤다.


리버사이드 까페는 이름대로 작은 강 옆에 있었다. 카페 안쪽 문을 통해 테라스에 나가면 강물이 흐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강둑에 울창한 나무들 덕분에 젖은 잎냄새, 흙냄새도 났다. 강이 바라보이는 창 곁으로 피아노가 놓인 무대가 준비되고, 무대를 바라보며 의자들이 열을 몇춰 놓였다. 나도 사람들 사이에 섞여 의자 하나를 차지하고 앉았다.

'Eileen and Marilyn do New York'은 친구 사이인 코크 출신 여자 두 명이 뉴욕에 함께 가면서 벌어지는 해프닝을 코믹하게 그린 작품이다. 배우들의 감칠맛 나는 연기도 연기지만 아이리쉬 여자들이 뉴욕에서 경험하는 문화적 충돌을 담은 이야기가 워낙 현실감 넘쳐, 2시간 내내 관중석에 웃음과 박수가 끊이지 않았다. 작품성을 떠나 개인적으로 너무나 행복한 시간이었다. 공연을 보며 깔깔 웃는 동안 호스텔에서 받은 충격, 축제 분위기에 대한 실망감은 말끔히 사라지고, 내 마음은 강물 위로 조용히 내려오는 하루의 마지막 햇살과 작은 강물의 다정한 속삭임이 건네주는 행복감으로 채워졌다. 중간 쉬는 시간에는 집밥 같은 소박한 음식을 나눠먹고, 모르는 옆 사람과 친구처럼 얘기를 나누며, 그 시간 그 곳에 있는 것에 대해 감사했다. 누군가 사랑 많은 어떤 사람의 집에 초대 받은 것처럼, 그렇게 한없이 따뜻한 느낌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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