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BA - 에코빌리지 <Las Terrazas>에서의 하룻밤
이상하고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닭들이 산으로 들로 달음박질하고 아직 야생의 냄새가 물씬 나는 거리의 개들은 늑대처럼 날렵했다. 시커먼 멧돼지 두 마리가 달려오는 차를 피해 꽥꽥대며 길 옆 숲속으로 숨어드는 것도 보았다. 눈길이 닿는 곳마다 하늘을 찌를 듯 뻗어오른 코코넛 나무들과 야자수들, 빽빽하게 우거진 진한 녹색 숲이다. 원초적인 자연의 모습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이곳은 '라스 테라사(Las Terrasas)'. 론리플래닛 쿠바편을 사서 처음 펼쳐본 그날, '쿠바 최초의, 그리고 유일한 에코빌리지'라는 말에 홀딱 반해 바로 형광펜으로 커다란 별표를 해두었던 곳이다. 이곳에 하루 머물기 위해 다른 도시에서의 일정을 줄이고 이동하는 루트의 반대방향으로 잠시 일탈을 해야 했지만, 난 기꺼이 감수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버스가 서는 곳에서 타운센터까지는 2km정도의 긴 흙길이 이어진다. 그 여정에 낡은 양철지붕을 이고 있는 파스텔톤의 단층집들이 드문드문 이어지는데, 난 그 중 하나인 막달리나 아줌마네 집에서 하루 묶게 되었다. 장거리 버스들의 정차 포인트인 카페테리아에서 우연히 만난 다른 버스의 운전기사가 "까사 찾고 있냐"고 묻는데, 딱 걸려들었다. 사실 비교할 만한 다른 까사에 대한 정보도 없고, 지도도 없고, 산길을 혼자 헤맬 자신도 없어 자의적으로 '낚인' 것이다.
카페에서 30분쯤 기다려 나를 마중 나온 까사주인 아들을 만났다. 그를 따라 까사까지 가는 길은 집 하나 찾아볼 수 없는 숲길이었다. 코코넛나무, 바나나나무를 비롯해 크고 작은 열대나무들이 양옆으로 빽빽하게 이어졌다. 가는 길에 방값을 물어보니 하룻밤 30쿡을 부른다. 난 20쿡에 쇼부를 보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간이 작아져 얼떨결에 25쿡을 불렀다. 한마디도 안보태고 기분좋게 합의를 해주는 걸 보니 느낌이 안좋았다.
아니나 다를까, 까사에 도착해 방을 보여주는데 20쿡도 비쌀 만큼 시설이 열악했다. 침대만 달랑 두 개 놓인 창고 같은 방에, 침대 위엔 언제 세탁했는지 알 수 없는 담요 한장뿐. 분명 마음속으로는 20쿡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상대가 세게 나온다고 그렇게 금방 소심한 태도를 취하다니! '지금 나에겐 5쿡도 큰 돈인데' 생각하니 속상해 죽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이미 끝난 일로 기분을 망치면 나만 손해였다. '그래, 이 가족은 내가 더 낸 5쿡으로 하루치 식량을 벌었다며 기뻐하고 있을지도 모르잖아. 내 실수가 누군가에게 복이 될 수 있다면, 그것도 감사한 일이잖아? 내 부족한 예산은 하나님이 다른 방법으로 채워주실 거야!' 역시, 생각을 바꾸면 기분도 바뀐다. 내 마음엔 다시 여행자의 행복한 기운이 차올랐다.
엄청나게 무더운 날이었다. 일단 마을 구경을 좀 하고 '천연목욕탕'으로 유명한 돈호세 강가에 가서 강물에 몸을 담그고 놀다가, 다시 마을로 가서 저녁을 먹고 집에 돌아가는 게 나의 계획. 20분 정도 걸으니 라스 테라사의 랜드마크라 할 수 있는 '모카호텔' 입구에 닿았다. 이 호텔이 들어서면서 이 마을이 '친환경' 컨셉의 커뮤니티로 발달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단순한 숙박업소 이상의 의미가 있는 곳이다.
매우 독특한 구조의 호텔이었다. 호텔은 산중턱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에코호텔'이라는 이름처럼 산을 깎지 않고 그 산의 지형에 맞춰 목재를 이어나간 모습이었다. 그래서 객실들이 산장처럼 여러 방향으로 흩어져 있고, 강에서 끌어온 물로 만든 수영장은 작은 숲속의 호수 같았다. 호텔 로비는 둥근 분화구처럼 생긴 '라스 테라스' 마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명당자리였다. 로비를 지나면 마을로 내려가는 여러 개의 갈래길이 나오는데, 어느 길을 따라가더라도 작은 개울 위의 다리나, 밭둑길 또는 작은 사잇길로 이어져 마을의 어느 곳이든 닿을 수 있었다. 라스 테라사 사람들이 '커뮤니다드'라고 부르는 마을 중심에는 4층 정도 높이의 흰 건물이 있었는데(이 마을에서 가장 높고 큰 건물이었다), 그 안에 환전소, 병원, 각종 가게, 심지어 초등학교까지, 마을에 필요한 모든 시설이 종합세트처럼 들어가 있었다. 집들이 산속에 띄엄띄엄 떨어져 있는 이곳에서 마을사람들이 삶을 공유하고 소통하기 위한 방법으로 지어진 듯했는데, 나에겐 신기하기 그지 없었다. 예산만 넉넉하다면 모카호텔에 하루 묵으며 이 재밌고 이상하고 아름다운 마을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싶었다.
아침에 하바나 페드로 아저씨의 까사에서 만들어온 치즈 샌드위치로 간단히 요기를 하고 왔던 길로 돌아나와, 이번엔 반대편으로 뻗어나간 길을 따라 걷는다. 사실 오후 1시의 땡볕 아래 걷는 것이 너무 힘들어 택시를 타려 했으나 이곳에서는 택시도 귀했다. 그래서 걸었다. 이국적인 자연풍경을 구경하며 걸었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노래들을 흥얼거리며 걸었다. 아무도 듣는 이 없으니 오랜만에 마음껏 소리내어 기도하기도 좋았다. 간간히 한줌의 바람이 뺨을 스치거나 달아오른 흙길 위로 산 그늘이 잠시 드리워질 때면, 깜짝선물이라도 받은 것처럼 행복해지곤 했다. 40분정도 걸었나보다. 가야할 길이 3분의1쯤 더 남았을 때 나를 앞질러가던 낡은 자동차 한대가 20미터 앞에서 멈춰섰다. 그리고 크락숀을 울렸다. 길 위에는 나밖에 없었으니 나를 부르는 것이 분명했다. 차 있는 곳으로 다가갔더니 운전석에 있는 쿠바아저씨가 뒷자석을 가리키며 타라는 손짓을 했다. '바뇨 데 산 호세?' 확인차 물었더니, 무표정한 얼굴로 다시 똑같이 손짓만 했다. 'Gracias그라시아스!' 감사하다 인사하고 차문을 열고 보니 어른 둘에 아이 셋, 이미 만석이었다. 뒷자리의 소년이 수줍게 웃으며 내가 비집고 앉을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예순살은 족히 넘은 할아버지 차가 다시 힘을 내 달리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멈춰설 듯 털털거리는 엔진소리를 들으며, 나도 모르게 자꾸만 웃음이 났다. 이 무뚝뚝하고 포장 없는 친절이라니! 하바나와는 또 다른 쿠바 시골마을의 정취에 마음이 느슨해지는 것 같다.
내가 '산호세 목욕탕'이라고 번역한 '바뇨 데 산호세'는 사실 강물이 흘러가는 계곡이다. 그런데 재밌게도 이 계곡물이 흘러내리는 물길을 따라 크고 작은 바위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물이 고이면서 느리게 흐르는 웅덩이들이 형성되었는데, 그 모양이 꼭 일부러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 같다. 그 개개의 웅덩이에 '탕1', '탕2'라 이름 붙이고 스파처럼 사람들이 들어가 놀 수 있게 한 것이다. 강물 위 작은 다리를 건너 '바뇨 데 산호세'에 다다랐을 때, 난 시원한 계곡물 소리에 들떠 환호성을 질렀다. 사방에서 번져오는 짙은 녹음이 물빛마저 녹색으로 물들이고, 둥근 웅덩이마다 발가벗은 쿠바의 아이들이 첨벙대며 물장구를 치고 있었다. 나도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쿠바의 천연목욕탕에 발을 담갔다. 따가운 오후햇살이 수면 위로 부서져내렸다.
해가 뉘엿해지기를 기다려 다시 길로 나섰다. 이번엔 운좋게도 얼마 걷지 않아 빵빵거리는 크락숀 소리를 들었다. 이번엔 농기구를 잔뜩 실은 작은 트럭 한 대가 멈춰서 있었다. '그라시아스!'를 크게 외치고 얼른 차에 올라탔다. 검게 그으른 쿠바남자 두 명이 하얀 웃음으로 화답해주었다. 갈림길에서 차를 내린 뒤 타운을 향해 걷고 있는데 이번엔 우습게 생긴 자전거 한대가 내 앞에 멈춰섰다. 세발 자전거에 오토바이처럼 모터를 달고 판자를 이어붙여 사람이 앉을 수 있는 의자를 만들어 얹은 모양이었다. 이번에도 말 대신 뒤에 타라는 미소와 고개짓이 건너왔다. 그리하여 난 맘씨 좋은 쿠바아저씨의 이상한 발명품을 타고, 해가 지는 산길을 신나게 달렸다. 덜컹거리는 나무의자에 엉덩방아를 찧어가며 '라스 테라사'의 불타는 노을과 휘파람 같은 바람을 가슴으로 받아 안았다.
아쉽게도 어느새 타운에 도착. 기다렸던 저녁 시간이다. 왜냐하면 쿠바 다른 지방에서는 결코 찾을 수 없는 유기농 채식식당이 이곳에 있기 때문! 검은콩을 으깨 만두속처럼 채워넣은 팬케이크와 훈제가지 샐러드를 저녁으로 먹고, 옆집 '마리아의 카페'에서 마리아가 직접 재배하고 로스팅한 커피콩으로 커피를 내려준 진한 쿠바커피를 마셨다. 그렇게 노을과 바람, 건강한 음식으로 충만한 라스 테라사의 하룻밤이 지나고, 사방에서 메아리처럼 울려대는 닭들의 울음소리가 새벽을 깨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