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구름이 드리운 침침한 날씨, 매일같이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뚫고 버스를 타고 스카이트레인(skytrain -밴쿠버 지하철)을 타며 인터뷰를 보러 오라는 곳이며 어디든 달려갔다.
매일매일 이력서를 수십 군데 넣었지만 생각보다 인터뷰를 보러 오라고 연락 오는 곳들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곳들마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절박한 마음으로 인터뷰를 보러 향했다.
한국에서 밴쿠버에 왔을 때 단돈 삼백만 원을 들고 왔다.
사람은 절박할 때 더 큰 힘을 낼 수 있다. 오직 취업과 영주권. 이 두 가지만 생각했기에 나 스스로를 그 절박함 속으로 밀어 넣으려 일부러 충분한 돈을 가져오지 않았다.
한국에서부터 시간이 날 때마다 인터뷰 질문들을 예상하고 대답하는 연습을 해왔기에 인터뷰를 하는 동안에도 그렇게 긴장이 되거나 떨리지는 않았다.
Eye contact (눈 맞추고 이야기하기)이 무조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들어왔고 자신감을 가지고 눈을 맞추며 인터뷰 질문에 대답해 나갔다.
인터뷰 질문들은 주로 시나리오였다. 이런 상황이라면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에 대해서 가정하는 질문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까다로운 학부모를 만난다면 어떻게 대할 것인지, 밥을 잘 먹지 않는 아이가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지 등에 관한 일반적인 질문들이었다.
한국에서 주로 교육열이 강하기로 소문나있는 목동 내 영어유치원에서 주로 일을 했었기에 그동안 별의별 학부모들을 만났었고 아이들을 만났었다. 근무강도가 꽤 있는 곳들에서 일을 해서 나는 어떠한 어려움이나 힘든 상황에서도 잘 대처해 나갈 수 있는 굳은살이 몸에 배어있었다.
이런 내 자신감 있는 모습과 더불어 한국에서 수년간 영어유치원에서 일했었던 경력들이 결국에는 인정을 받았고 와서 일을 한번 해보라는 합격 통지서를 받았다.
영주권을 서포트해 주는 오너를 만나는 것도 쉽지 않지만 오너 입장에서는 한 사람의 영주권 서포트를 위해 이민국에 꽤 많은 양의 서류들을 이민국에 제출하고 입증해야만 하기에 일을 하는 동안 채용된 그 사람을 주시하며 지켜본다. 내가 이렇게 노력과 시간을 들여서 서포트를 해줄 만한 충분한 자격이 되는 사람인지 나에게는 어떤 이익을 가져다주는 사람일지 분석하며 관찰한다.
실제로 나 말고도 오너가 다음 해에 영주권을 서포트해 주겠다고 온 다양한 국적의 동료들을 만났었다. 다들 영주권을 서포트해 주겠다는 그 말만 믿고 일을 시작했는데 오너 마음에 조금이라도 들지 않으면 해고를 당했다.
캐나다 영주권, 그 목표만 생각하며 버텨 나갔다.
때로는 불합리한 상황에 놓이기도 했지만 인내심을 발휘하며 참아 나가야만 하는 날도 있었다. 더럽고 치사하다고 여기서 그만두게 되면 또다시 영주권 서포트 해주는 곳들을 찾아다니며 시간을 버려야 했다.
2016년 1월 4일에 일을 시작했고 6월 30일 날은 내가 한국으로 떠나야만 하는 날이었다. 나에게 남은 시간은 이제 5개월 남짓이었다.
물론 비자연장을 할 수는 있지만 그렇게 되면 학생비자로 다시 연장을 해야 했다. 지금도 학교수업과 일을 병행해서 하는 게 쉽지 않은데 또 학교를 연장해서 다닐 거를 생각하니 감당해 낼 자신이 없었다. 무조건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내가 영주권을 받기까지 2년 반 동안을 그곳에서 일하며 버티어낸 데는 한국에서의 강도 높은 직장 경험들이 내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매달 행사가 있고 이주일에 한 번씩 부모님들과의 상담 전화를 해야 했다. 아이들의 영어 성적에 온통 신경을 세우고 있었어야 했고 혹시라도 성적이 떨어진 아이는 어떻게 해서라도 다시 끌어올려야만 했다. 이외에도 신경 써야 할 일들이 너무나 많았다.
캐나다 데이케어에서 일해보니 행사라고는 요청하는 부모들에 의한 생일파티와 핼러윈, 크리스마스 정도였으며 한국처럼 특별활동 수업도 따로 없었다. 학부모들과 정기적으로 상담을 하는 일도 없었으며 매일매일 레슨플랜을 짜는 일도 없었다.
많은 짐들에서 벗어나 훌훌 날아갈 거 같은 해방된 기분으로 일을 했다. 가끔은 일이 너무 할 게 없어서 뭐라도 만들어하려고 하면 "메이, 너는 왜 매일 그렇게 바쁘게 있어? 좀 쉬면서 일해"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한국에서 숨 가쁘게 매일매일 일을 했고 힘든 나날들의 고단함에 몸이 적응되어 있었다. 그러다 이곳에 와서 한국과는 전혀 다른 환경에서 ECE로 일을 해보니 일이 세상 이보다 더 쉬울 수는 없었다.
가끔은 놀면서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마저도 들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한국에서 높은 강도로 일했던 그 시간들이 나를 참 단단하게 만들어 주었다. 고된 하루의 일과들과 더불어 몇몇 학부모들의 까다로운 요구들로 받았던 그때의 스트레스들과 그 좋지 않았던 경험들은 시간이 지나고 보니 나를 힘든 상황에서 버티게 해주는 힘이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