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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yaron 하의정 May 27. 2024

봄 같던 그 길 속으로 자박자박

반려견 마야 _ 1

“이게 뭐야?” 

“봄.” 

“봄? 하하”

하얀 꽃이 새겨진 분홍색 양말 한 켤레를 선물 받았다. 생각지도 못한 선물에 마냥 ‘봄’ 같던 그 시절이 떠올랐다.     


2003년 1월. 그해 겨울은 매섭게 추웠다. 부모님 사업이 큰 빚더미에 올라 모든 재산이 사라진 후 두 번째 겨울을 보내고 있었다. 겨우 구해 들어간 집은 나무로 된 창틀을 덜컹거리며 찬바람을 들여보냈고, 비닐로 막은 벽을 빵빵하게 부풀렸다. 몸과 마음도 꽁꽁 얼어붙었다. 그 중 가장 큰 일은 부모님께서 의욕을 잃은 것이고, 불도 켜지 않는 컴컴한 방에서 점점 더 나오는 횟수가 줄어갔다.     


“아빠! 엄마! 산책이라도 다녀오세요!” 

출근 때마다 인사를 했지만 알았다는 대답뿐이었다. 야근과 아르바이트로 자정을 넘어 퇴근하는 딸에 대한 미안함이 어느 날 벽 사이로 들려왔다. “여보, 우리 그냥….”

‘하… 이러다 큰일 나겠네.’ 머릿속이 온통 눈보라가 회오리치는 것 같았다. 우리의 겨울을 녹여버릴 강력하고 압도적인 무언가가 있을까 고민했다. 


나는 결정했다. 모두의 반대를 무시하고 부모님을 밖으로 끌어내 줄 무언가로 그해 봄, 악마견이라 불리던 사냥개 “비글”의 새끼를 입양했다.      


힘이 폭발하던 비글 강아지는 산책을 거르기라도 하면 집을 폭파할 기세였다. 내방과 부모님 방 사이 벽을 파내어 개구멍을 뚫었고, 장판과 벽지는 벅벅 긁고 뜯어내어 너덜너덜 누더기 방으로 만들었다. 멀쩡한 욕실 실내화를 강력한 이빨로 긹아내어 주걱 모양이나 반달 모양으로 재탄생시켰다. 옷, 가방, 모자 등 빨래 건조대에 널려 있는 것들도 끌어내 질겅질겅 씹어 모두의 패션을 빈티지로 완성해 주었다. 작은 강아지가 벌이는 일이라고 상상할 수도 없는 여러 상황에 어이없게 웃음이 터졌고, 웃음은 마음을 열었다. 산책하러 안 나가면 다 물어뜯어 버릴 듯 이빨을 번득이는 강아지를 데리고 아빠, 엄마는 틈만 나면 산책하러 나가게 됐다.      


주말에만 시간을 낼 수 있었던 나는 주말 산책과 같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여러 훈련을 맡았다. “앉아!” “손!” “기다려!”를 시작으로 “빵!”을 하면 옆으로 쓰러졌고, “돌아!” 하면 돌았고 “짖어!” 하면 짖었다. 훈련을 응용하다 보니 30여 가지를 알아듣고 할 수 있게 되었는데, 명령 방법을 알게 된 부모님은 공원에 나가 산책 나온 사람들 앞에서 시범을 보였다. 강아지의 재롱은 부모님과 동네 어르신들의 웃음이 되어주었다.       


“엄마, 산책 다녀오셨어요?” 

“그럼~! 골목 끝 할머니도 강아지를 키우더라? 한참을 얘기했지” 

“아빠는 어디로 다녀오셨어?”

“아빠는 날씨가 좋다고 강까지 다녀오셨어! 고라니도 보셨데!”

매일매일 곁에서 자박자박 걷는 강아지와의 산책으로 이야깃거리가 많아지고, 아빠 엄마에게서 흥얼흥얼 콧노래가 나왔다. 고마운 산책이었다. 우리 가족에게 따스한 봄이 시작된 듯했다.     


사실 나는 강아지를 키우기 전까지 산책을 즐기지 않았다. 늘 잠이 부족했고 피곤해서 시간만 나면 잠을 잤다. 하지만 운동을 시키기 위해 시작한 산책은 꽤 흥미로웠다. ‘삐옥삐옥~ 뾱뾱~ 쪼롱쪼롱~ 짹짹~ 쪽쪽쪽~ 딱딱딱’ 울창한 나무가 빼곡한 공원을 걷는 아침 산책길은 새소리로 가득했다. 까치, 참새, 직박구리, 오목눈이, 박새 등이 뭐라고 조잘거리는 소리인지 궁금해 의자에 걸터앉아 눈을 감고 있기도 했는데 마음이 새처럼 붕 날아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아! 좋다.’


볼을 보드랍게 만져주는 햇살을 받으며 골목 구석구석을 걷는 오후 산책길은 아기자기하고 활기찼다. 빨간 옷을 입고 빠르게 걷는 사람, 벽돌집 담벼락에 빼곡하게 피어난 노란색 개나리, 연두색 잎이 달랑달랑 달린 나무. 강아지가 함께하지 않았다면 다니지 않았을 골목길에는 생각지도 못한 풍경들이 있었다. 담벼락에 그려진 익살스러운 그림이나 집 앞을 꾸며 놓은 화단들이 나를 피식 웃게 했다. 


하늘색이 온통 분홍에서 붉게 물들어가는 저녁노을 산책길은 내일은 어떤 풍경이 펼쳐질지 기대하게 했다. 노을 지는 하늘을 눈에 한가득 보기 위해 강까지 자주 갔는데, 노을 속에 빠져 걷다 보면 해가 지고 밤이 되어 강물에 반짝이는 야경까지 보고 돌아오는 날이 많았다. 나는, 우리는, 산책이란 것에 빠져들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15차례 지나갔다. 그사이 우리는 집을 사서 이사도 했고, 자동차도 사서 먼 곳까지 함께 여행도 갈 수 있게 되었다. 늘 우리 곁에서 자박자박 같이 걸어줄 것만 같던 강아지는 겨울이 가고 봄이 시작된다는 날(雨水) 우리의 곁을 떠났다. 봄 같이 따스한 15년을 선물로 준 강아지의 이름은 ‘마야’였다. 

오늘은 선물 받은 꽃 양말을 신고 ‘마야’와 함께 걸었던 길로 산책하러 나가보려 한다.           



                                  마야 : “천천히 와~ 내가 먼저 좋은 산책길 알아보고 있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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