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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UNKNOWN Nov 24. 2020

독립영화, 우는 아이의 눈물을 닦아 주는 일

예술보다 중요한 것


예술은 때로 찬란한 방식으로 악한 것을 옹호한다. 일부러 아이를 울리기도 하고, 차별의 시선을 욕망의 시선으로 바꾸기도 한다. 그 모든 악행은 낭만적이라는 이유로 용서된다. 여기에 대한 평가는 분분하다. 어떤 이들은 예술은 그 자체로 평가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반면에 어떤 이들은 도덕이 없는 예술이 무슨 소용이냐고 말한다.


이 논란에 정답을 찾는 일은 아주 오래 걸릴 것이다. 어쩌면 아예 답을 찾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여기, 모두의 마음을 울리는 한 마디가 있다. "사실 예술이 뭐가 중요하겠어요. 우는 아이 눈물 닦아주는 게 더 중요하죠."  영화평론가 이동진이 스티븐 스필버그의 <A.I>를 평하며 한 발언이다.


이 말은 예술이 도덕적이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완벽한 작품까지 단 한 번의 붓질을 남겨 놓고도 우는 아이의 눈물을 먼저 닦아주는 예술가를 떠올려 보자. 사람들이 그에게 '프로의식'이 부족하다고 이야기할까?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감상은 '아름답다'일 것이다. 완벽하지 않아도 멋진 작품과 따뜻한 예술가에게서 우리가 느끼는 아름다움이 분명히 있다.



5년간의 부재


한국영화에서도 이런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을까를 질문한다. 그런데 오히려 그게 부재했던 시기가 더 두드러진다. 적어도 2012년에서 2017년은 확실히 그렇다.


이 시기는 한국형 누아르 영화가 극장가를 휩쓸던 때다. 누아르 영화가 주는 '아름다움'은 따로 있다. 어두운 뒷 세계, 아군과 적군이 구별이 가지 않는 상황, 배신과 신뢰의 뒤엉킴, 파멸과 쟁취의 과정. 우리는 쉽사리 통제되지 않는 남성 캐릭터들에게 열광했다.


하나 잊은 것이 있다면 그 이 외에 모두 버려진다는 점이다. 사람을 편견에 가두는 일만큼이나 드럼통에 가두는 일은 쉬웠다. 재밌는 영화들이었고 그중 어떤 것들은 완성도 높은 영화이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그 5년 간, 우리는 극장에서 어떤 사람들이 사라지는 걸 지켜봤다. 뒤돌아 생각해보면 그렇다. '누군가는 무조건 사라진다'라는 대전제의 영화를 보며 우리는 누구를 잃었나?


재밌는 건 이 영화들의 찬란한 흥행 시기가 <브이아이피>를 통해 막을 내렸다는 점이다. 이후에도 누아르 영화들이 꾸준히 나왔지만 예전만큼은 아니다. 그리고 <브이아이피>가 사람들에게 준 충격에 대해서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과잉된 뒷 세계는 결국 '추접스럽다'라는 평을 들어야 했다.



그래서 독립했다. 그리고 다정했다


그 사이 우리는 '우는 아이의 눈물을 닦아주는 아름다움'의 등장을 보기도 했다. 2016년 6월에 개봉한 <우리들>은 '아이들'을 스크린으로 불러왔다. 초등학생 소녀들이 겪어야 하는 관계의 복잡함을 세밀하게 표현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잊고 있던 '우리'가 되는 일을 떠올리게 됐다. 그 모든 어두운 영화로부터의 독립은 여기서부터 였다.


2019년은 그런 영화들이 두드러진 해였다. <기생충>이 자본주의라는 지배 이데올로기에 돌을 던졌던 거처럼, 이 해의 독립영화들도 자신들만의 돌은 던졌다. <벌새>, <메기>, <윤희에게>로 이어지는 각기 다른 도전은 신선했다. 이 모든 영화들도 <우리들>이 아이들을 스크린에 부른 것처럼 모든 이질적이고 혐오적이라 여겨진 존재들을 '일상'으로 불러왔다. 그 모든 '사라짐'으로부터 독립이었다.


무엇보다 이 영화들은 관객들을 불안하게 하지 않았다. 누아르 영화의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은 매력적이기도 하지만 거부감이 들기도 한다. 누아르 영화의 불안감은 곧 파괴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영화에 익숙해진 탓이었을까? 어떤 관객들은 <벌새>를 보며 불안감을 느꼈다고 했다. 누군가가 주인공을 해칠까 봐. 그러나 영화는 다정했다. 끝까지 주인공은 스스로를 선택했고 스스로 그걸 봉합해냈다.



후유증을 남기는 방식에 작별을 고하며


그간 한국의 독립영화들은 누아르 영화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들은 '후유증'을 남기는 방식으로 전개됐다. 강간당하는 여성, 가난한 남성, 소수자들의 끔찍한 삶을 낭만화해서 그려냈다. 독립영화가 주창하는 '새로움'이란 파멸과 내면의 울분이었다. 그러나 지금 주류를 차지한 독립영화들은 '새로움'을 재정의하는 데 성공했다. 따뜻한 시선으로 삶을 바라본다. 우는 아이의 입을 막는 대신 눈물을 닦아주기로 결정했다.


다시 예술과 아이의 눈물에 대해 생각한다. 최근 한국의 독립영화들은 그 둘 사이에 타협점이 있음을 보여준다. 예술이 먼저인가 도덕성이 먼저인가에 답하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다정한 게 낫다는 답변을 내어 준다.


따뜻한 게 무엇인지, 다정한 시선은 어떤 것인지 우리는 확신하지 못하고 늘 고민한다. 하지만 결국 그게 사람을 품는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여전히 누군가는 스크린으로 소외된 이를 끌고 온다는 점이 큰 위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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