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악함, 중력을 거스르는 그 힘

영화 <위키드> 리뷰

by UNKNOWN

사악한 초록마녀는 죽었다. 더 이상 악은 없고 이 땅에는 평화만 남았다. 그런데도 서쪽 하늘을 바라보게 되는 건, <위키드>(이하 위키드 1)가 그의 도약으로 끝맺음 됐기 때문이다. <위키드 1>은 이미 죽은 초록마녀의 삶을 되짚음로써 악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추적한다.


그가 중력을 거스르면서까지 얻고자 했던 ‘사악함’의 정체는 뭘까? 그가 도약할 때 그는 너무나도 빛났는데 왜 사악한 마녀가 된 걸까? 아름다운 마법사 글린다 역시 초록마녀의 죽음을 노래하면서 착잡한 표정을 짓는다. 그가 친구에게서 본 ‘사악함’이란 뭐였을까? <위키드 2>를 앞두고, 반짝이는 소녀였던 두 마법사의 이야기를 다시 들춰본다.



칼날 같은 소녀들

‘잘 맞지 않는 두 소녀의 우당탕탕 우정 만들기’라고 요약하기엔 엘파바도 글린다도 너무 날카롭다. 함부로 다가섰다가는 어느 쪽이든 베이기 십상이다. 엘파바는 예민하다. ‘평범’하게 태어나지 못해서 늘 배척받던 그의 어린 시절이 그를 예민하게 만들었다. 누군가에게 제대로 다가가지도 못하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누군가를 본 적도 없다. 늘 사랑만 받아온 글린다 역시 남 말할 처지가 못된다. 그는 모났다. 누구에게든 쉽게 다가가고 모든 호의를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그의 커다란 자기애는 불툭 튀어나와 때로 누군가를 불편하게 찌른다. 다른 방식으로 날카롭게 벼려진 소녀들은 같이 붙여 놓기만 해도 칼싸움이 나는 법이다.


만나면 맞부딪히 못해 안달 났던 두 ‘밥맛’이 베스트프렌드가 된 과정은 어쩐지 이해하기 어렵다. 두 사람 다 그저 호의에 약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엘파바는 자신에게 모자를 선물해 주고 파티에 초대해 준 글린다에게 약간의 호감을 느낀다. 그는 자신만이 독차지하고 있던 마법 과외에 글린다를 추천해 준다. 글린다도 마찬가지다. 그는 자신을 과외에 추천해 준 엘파바를 위해 기어코 파티에서 이상한 춤을 함께 쳐 준다. 그렇게 미워하던 이들이 갑자기 서로에게 겨눈 칼날을 거둔다.



너의 시선으로, 나 자신에 대한 사랑으로


영화가 뮤지컬을 뛰어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영화였기에 뮤지컬 보다 이들의 관계가 급속도로 좋아진 계기를 이해할 장면이 있다. 엘파바가 파티장에 들어섰을 때, 카메라는 엘파바의 시선으로 파티장을 보여준다. 평생을 멸시 속에 살아도 도저히 적응되지 않는, 호의적이지 않은 타인에게 둘러 싸인 기분을 관객에게도 보여준다. 그 속에서 엘파바가 추는 춤은 발버둥처럼 느껴진다. 누구와도 연결되지 않고 아무도 다가와주지 않는 이의 춤은 처절하다. 잘하면 섞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파티장에 들어갔지만 그 기대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단순히 엘파바가 철면피여서 이런 춤을 췄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자신이 있었다면, 글린다가 뛰쳐 나와 함께 춤춰 줬을 때 그가 그렇게 울었을 리 없다. 자신의 ‘이상함’까지 받아줄 이가 있다는 사실에 눈물 흘렸을 리가 없다.


이 장면은 글린다에게도 특별하다. 그의 자기애가 이 정도라는 사실에 놀랍기도 하다. 글린다는 관객들 눈에는 착함을 흉내 내는 거처럼 보이지만, 본인 스스로는 누구보다도 자신이 진짜로 착하다고 믿는 인물이다. 보통 이런 캐릭터는 얄밉고, 어딘가 나쁘게 느껴진다. 하지만 이건 글린다의 자기애를 너무 얕본 평가다. 글린다의 나르시시즘은 상상을 뛰어넘는다. 그는 자기 자신이 너무도 좋아해서 자신이 갈망하는 걸 가져다주는 이를 내칠 줄 모른다. 일반적인 나르시시스트들은 타인을 얕보고 심지어는 도구로 생각한다. 하지만 글린다의 자기애는 다르다. 다른 모두가 그 사람을 싫어해도 글린다는 그 사람을 껴안을 수 있다. ‘인기가 없다고? 내가 popular 하게 만들어주면 돼!’라는 자신감까지 보여준다. 글린다가 엘파바와 이상한 춤을 함께 춰주는 장면은, 커다란 자기애가 타인에게로 확장되는 순간을 보여준다.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그의 이상함까지도 흉내 내며 껴안는다는 점에서 글린다는 사랑스럽다.



이해 없는 연대는 있을 수 없다


두 사람의 우정은 아름답지만 그들이 칼날이라는 사실을 가려주지는 않는다. 끝끝내 두 사람은 다시 부딪힌다. 칼싸움이 아닌 쪼개지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점점 말을 잃어가는 동물들과, 억지로 날개가 달린 원숭이들을 보며 엘파바는 분노한다. 그 배후가 자신이 그토록 만나고 싶어 하던 오즈의 마법사라는 사실에는 참담함을 느낀다. 타인과 평범하게 어울려 살고 싶다는 그의 꿈, 초록색 피부가 평범해졌으면 좋겠다는 소원을 잊을 만큼 엘파바는 충격을 받는다. 하지만 글린다에게 이건 이해가능한 선이다. 오즈의 마법사가 자신을 마법사로 만들어준다면 이 정도 희생은 눈감아 줄 수 있다. 오히려 글린다는 엘파바가 안타깝다. 자신에게 어떠한 피해도 오지 않는데 왜 다른 동물들의 고통에 이입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글린다는 엘파바를 아끼지만 그가 초록 피부로 살아온 고통까지 아끼는 건 아니다. 엘파바는 글린다의 반짝거림을 사랑하지만 그 반짝거림을 만들기 위해 타인에게 고통을 주는 것까지 사랑하는 건 아니다. 둘이었다가 사랑에 녹아 하나가 된 칼날들이 다시 쪼개져야 할 시간이 왔다.


이해할 수 없는 이들은 연대할 수 없다. 떨리는 몸에 망토를 덮어주고 서로 행운을 빌어주더라도 ‘네가 선택한 길’을 함께 걸어줄 수는 없다는 사실은 잔인하고 선명하다. 글린다가 자기애를 확장해서 엘파바를 끌어안았듯이, 엘파바는 자신의 고통을 확장해 동물들을 껴안는다. 그들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이해해서다. 엘파바에게 있어 동물들의 고통은 자신의 고통이다. 그에게 있어서 이건 글린다를 사랑하는 일 이상이다. 나와 비슷한 고통에 연대하는 건, 나를 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토록 중요한 일이지만 엘파바는 글린다를 억지로 끌고 가지 않는다. 그 역시 글린다가 이걸 이해하지 못할 거라는 걸 알고 있다. 글린다는 엘파바가 왜 자기 일도 아닌 동물 차별에 열을 내는지, 그저 사과하면 되는 일을 왜 더 키우는지 진정으로 알지 못한다. 그는 그런 종류의 고통을 겪은 적이 없고 이해하지 못하기에 엘파바의 떨림을 보고도 홀로 보낸다.



사악함, 중력을 거스르는 그 힘

글린다가 선물한 모자와 그가 둘러준 망토를 입고 엘파바는 날아오른다. 그가 서쪽 하늘로 떠나자 오즈의 마법사와 그 수하들은 ‘사악한 초록마녀’가 나타났다고 세상에 알린다. 그들은 단 한 번도 사악했던 적이 없었던 거처럼. 영화는 분명히 ‘사악한 마녀가 죽었다’라고 말하며 시작했고, 그 사악함을 찾으려고 여기까지 되돌아왔건만 정작 발견한 건 ‘사악한 초록 마녀’는 없다는 사실이다. 그저 친구를 두고 떠나는 소녀만이 남아있다. 초록 마녀가 날아 오른 자리에는 진짜 사악함이 무엇인지, 오즈의 시민들을 둘러싸고 있던 공포가 무엇인지만 남았다.


약자들을 억압하고 그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세상에서, 사악함은 말 그대로 중력을 거스르는 힘이다. 함부로 권력의 편이 되지 않고 다른 세상을 만들기 위해 떠오르는 것이 곧 사악함이다. 힘 있는 자들, 그 힘으로 약자의 눈에서 눈물을 뽑아내는 자들이 정의한 사악함이란 그런 것이다. 엘파바는 Defying Gravity를 부르며 스스로를 재정의한다. 만약 자신이 원하던 게 이런 악한 세상의 사랑이라면, 나 자신이 아닌 그중의 하나가 되는 것이라면 차라리 사악해지길 선택한다. 모든 혁명가가 그랬듯이 엘파바는 기꺼이 악역이 되어 규칙에 도전하려고 한다. 이해하지 못해도 사랑했던 친구와 사랑했지만 이해받지 못했던 이전의 삶을 두고. 엘파바는 세상을, 중력을 거스른다.



마법사들이 기다린 초록 마녀를 또다시 기다리며


엘파바는 오즈의 마법사가 그토록 기다리던 인물이다. 오즈의 마법사는 오래된 마법서 ‘그리머리’를 읽어줄 자를 찾고 있었다. 다만 엘파바는 그가 휘두를 수 없는 칼이었을 뿐이다. 세상의 모든 신묘한 마법이 담긴 그리머리 역시 엘파바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사라진 언어를 자신의 것처럼 읽고 마법으로 구현해 낼 이를 말이다. 그리고 그리머리는 엘파바를 받아들였다. 엘파바는 오랜 세월 누구도 하지 못한 마법을 해낸다. 그리고 그 순간, 엘파바는 세상이 숨기고 있던 비밀과 자신 안의 ‘사악함’을 알게 된다.
어쩌면 그리머리는 그 긴 시간 동안 서서히 현자들이 사라지는 걸 보며 새로운 ‘사악함’을 찾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을 이용해 새로운 세상을 보여줄 이를 기다리며 숨죽이고 있었을 거다. 어둠의 시대에 현자의 책이 세상을 뒤집어 줄 혼란의 존재를 반기지 않을 이유란 없다. 초록 마녀는 오즈의 마법사가 기다린 착한 마법사가 아닌 멸종된 현자들이 기다린 혁명가다.


언젠가 날 기꺼이 읽어 줄 초록마녀를 기다리는 건 그리머리뿐만이 아니다. 나의 고통을 알아줄 사람, 이 억압에서 날 도망치게 해 줄 사람, 자유의 중요성을 마음 깊이 이해하는 자, 권력 있는 자를 뿌리치는 사람, 무엇보다 나의 고통을 이해하고, 어쩌면 나와 비슷한 고통을 안고 있는 그 사람을 찾는 이들 모두가 또다시 엘파바를 기다리고 있다. 너무 사악해서 세상의 고통을 자신의 원동력으로 삼는 그 마녀를. 그래서 그의 죽음과 모든 이야기를 알면서도 <위키드 2>를 기다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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