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열 없는 완벽함'을 비웃다

영화 <콘클라베> 리뷰

by UNKNOWN

부활절 다음 날, 프란치스코 교황이 떠났다. 진보적인 성향의 교황으로 손꼽히던 그는 마지막까지 가자지구의 평화를 바랐다. 그의 선종 소식과 함께 영화 <콘클라베>도 주목받았다. 교황을 선출한다는 그 사실 자체뿐만 아니라 진보적인 교황을 떠나보냈다는 현실이 영화와 아주 가까이 맞닿아 있어서다.


영화 <콘클라베>는 교황을 선출하는 것으로 끝맺음되지만, 현실은 교황을 선출하는 것부터가 시작이다. 현실의 콘클라베는 영화보다 빠르게 결론을 냈고, 최초의 미국인 교황을 선출했다. 그는 전통을 존중하지만, 보수주의자라고 할 수는 없는 인물이라고 평가받는다.


이제 교황청은 어디로 갈까? 그리고 신이 진정으로 뜻한 바는 무엇일까? 영화와 현실의 또 하나의 차이점은,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서 영화가 방향을 보여줄 수 있다는 거다. 현실과 달리 영화는 진보적인 교황을 떠나보내고도 또 한 걸음 나아가기로 했다. 그 한 걸음을 위해 끊임없이 움직인다.



균열 없는 진보라는 환상


추기경 단장인 로렌스는 콘클라베 내내 ‘외부로부터 단절’을 강조한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정보가 추기경들의 판단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해서다. 그는 각 추기경이 세상이나 남들에게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믿음으로 투표에 임하기를 바란다. 단장으로서는 당연히 할 법한 생각이지만, 어쩌면 그가 ‘기도’에 문제를 겪는 이유가 이것 때문일지도 모른다.


로렌스는 선종한 전 교황을 존경했고, 그의 곁에서 교황청이 지금보다 더 많은 이들을 품기를 바랐다. 하지만 동시에 추기경들끼리 부딪치는 상황을 두려워하고, 그 스스로도 자신과 가치관이 다른 이에게 덤벼들지 않는다. 그가 테데스코를 꺼리면서도 결코 그의 가치관에 정면으로 반박하지 않는 모습에서 알 수 있다.


로렌스는 균열도 갈등도 없이 ‘진보’라는 결과를 내려고 하고 있다. 외부와의 단절을 기반으로 갈등 없이 ‘진보적인 교황’을 선출하고자 계속해서 움직인다. 그런데 그게 가능할까? 진보는 언제나 균열과 갈등에서 태동한다. 그 역시 몰랐을 리가 없다. 마음속 깊숙이 그도 불가능을 느꼈을 것이다. 균열 없는 진보라는, 존재하지 않는 환상을 좇는 그가 평안의 기도를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결국은 당신도 틈새를 벌린다


로렌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영화 속 콘클라베는 균열을 반복한다. 숨겨져 있던 마지막 추기경의 등장도 시작에 불과하다. 베니테스는 다른 추기경들에게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며 대표로 식전 기도를 한다. 여기서 그는 그림자처럼 움직이던 수녀들의 존재를 밝힌다. 로렌스와 베니테스의 차이도 여기서 드러난다. 베니테스는 그림자 같은 존재들에게도 시선을 주고, 갈등을 유발할 수 있는 말도 서슴치 않는 자다. 그는 균열이 있어야함을 알고 있다.


베니테스가 수녀들의 존재를 밝히자, 이후에는 한 명의 수녀가 목소리 한 번 내지 않고 세월 속에 묻힌 문제를 꺼내 든다. 유력 후보 중 하나인 아데예미가 30대에 10대 여성에게 손을 댔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여전히 교황직을 원하는 아데예미의 뻔뻔함만큼이나 로렌스의 행동도 눈여겨볼 만한데, 그는 이번에도 공개적으로 아데예미와 수녀의 문제를 지적하지 않는다.


갈등을 막으려던 로렌스의 행동은 점점 무의미해진다. 누군가는 틈새를 벌리고, 문제는 계속 새어 나온다. 그런데 그걸 막기만 하려고 하니, 보수주의자들이 자꾸 몸집을 키운다. 결국 로렌스는 움직인다. 마음 깊숙이 그도 느꼈을 불가능이 고개를 든다. 어떠한 균열도 없이 진보는 불가능하다는 그 사실을 인정한다.


영화 속에서 가장 큰 균열을 만든 건 결국 로렌스였다. 그는 선종한 전 교황의 봉인된 방을 푼다. 직접 꺼내 온 정보를 추기경단 앞에서 쏟아낸다. 그는 스스로도 알지 못하게 꾸준히 틈새를 만들었다. 그리고 의심하면서도 그 결과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끝끝내 그는 그 스스로가 바라던 교황의 모습인, 확신을 두려워하는 자가 되어 ‘베니테스’라는 가장 큰 균열까지도 용인한다.



신의 이름으로 ‘균열 없는 완벽함’을 비웃다


로렌스가 갑작스럽게 모든 걸 받아들인 건 아니다. 베니테스에게 문제가 있는지 여부를 끝까지 쫓은 이도 로렌스다. 그는 베니테스의 의료기록을 끝까지 물고 늘어진다. 이런 모습은 로렌스가 얼마나 확신을 두려워하는지, 교황직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있는지를 보여주지만 그가 결정을 할 때에는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기도 한다.


딱 한 번, 로렌스는 최선을 다 하지 않고 결론을 내리려고 한 적이 있다. 투표용지에 그의 이름을 적은 것이다. 보수주의 후보들의 민낯이 드러나며 후보의 수는 계속 줄었다. 교황답지 않은 이들이 유력 후보 자리를 떠난 것까지는 좋았지만, 사람 수가 줄어드는 만큼 보수주의자들의 결집은 커진다. 이런 상황에서는 로렌스 역시 초조해진다. 그는 자신의 이름이 적힌 투표용지를 들고 투표함 앞에 선다. 그가 ‘보수주의자들을 막기 위해 나라도 교황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전하려는 순간, 틈새 없이 막았던 투표장의 창문이 터져나간다.


높이 달려 있던 창문이 굉음과 함께 부서지며 빛과 먼지가 뒤엉키는 모습은 마치 신의 꾸짖음 같았다. 어느 순간 세상의 안위가 아닌 교황청의 안위를 최우선에 두고 투표에 임하는 추기경들의 헛짓거리를 도저히 참아 줄 수 없다는 분노 같기도 하다. 신이 내려다본 그들의 모습은 한심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이것조차 단편적인 모습에 불과하다.


조금 더 들여다보면 꾸중이라기보다는 질문 같기도 하다. ‘그렇게 완벽하게 외부와 단절되어 정말로 새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또다시 피어오른다. 진보적인 성향이라면서 단절을 강조하던 로렌스에게서 느낀 위화감이 이렇게 돌아온다. 세상과 멀리 떨어져서 투표를 반복하는 일, 새 교황이 외부 세상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보다 교회의 안위를 걱정하는 일이 정말로 옳았냐는 큰 질문이다.


외부 세상은 결코 매끄럽지 않다. 콘클라베 현장처럼 모든 걸 틀어막을 수 없다. 수녀들이 해주는 밥을 먹으며 추기경들끼리 수군거리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누군가는 자살폭탄을 매달고 있고,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무고한 목숨이 희생된다. 교회라고 하여 성스러운 것도 아니다. 추기경들의 민낯은 그 어떤 것보다 부끄럽다. 성추문부터 성직 매매까지, 그들이 지켜야 하는 ‘아름다운 교회’가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세상이 어떤지, 그들이 내일로 가지고 가려는 교회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추기경들은 ‘독립적인 선택’을 하려고 든다. 테러로 부서진 창문은 이 독립적인 선택의 환상을 깬다.


로렌스가 꿈꾸는 ‘균열 없는 완벽함’은 여기서 완전히 사라진다. 어쩌면 분노가 아닌 비웃음일지도 모른다. 천벌이 아닌 창문으로 끝난 일이라서다. 경고이자 조소라고 해도 된다. 사실 이런 일들은 바티칸뿐만 아니라 모든 사회와 국가가 겪고 있다. 전쟁터와 같은 곳에서는 사람의 운명이 초단위로 바뀌고 있다. 그런 일과 비교하자면 교황을 선출하는 일은 사소하다. 새로 선출된 ‘레오 14세’의 말을 빌리자면 ‘불화와 증오, 폭력, 편견 등으로 인한 두려움, 지구 자원을 착취하고 가장 가난한 이들을 소외시키는 경제 논리가 만든 상처’가 가득한 세상이다. 외부 상황이 어떻든 분열되지 않는 교황청을 최우선에 두는 교황을 찾는 일은 ‘해일이 밀려오는 데 조개껍데기나 줍고 있는’ 것과 같다. 폭탄을 매단 인간의 이름으로, 신은 ‘균열 없는 완벽함’을 비웃는다.



균열은 우리를 연결한다


추기경들은 테러를 경험하고도 투표를 진행한다. 이제 그들은 이전과 다른 사람이 되어 투표장에 앉아 있다. 겁에 질렸다는 의미가 아니다. 꽉 막혀 있던 투표장은 깨진 창문을 통해 외부와 연결된다. 추기경들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과 빛을 충분히 느끼고, 그제야 이름을 적기 시작한다. 그들은 드디어 교황청을 떠나 외부와 연결되어 ‘선택’을 시작한다.


깨진 창문은 그전에 있었던 베니테스의 연설과 같은 역할을 한다. 테러 직후 추기경들은 다시 작은 방에 옹기종기 모인다. 미처 먼지조차 털어내지 못한 이들은 두려움에 떤다. 테데스코는 성경을 만지작 거리며 교회를 과거로 데려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겁에 질린 그는 다른 이들을 배척하고 다시 교회가 그들만의 세상을 구축하는 것이 답이라고 말한다. 그런 교회만이 자신을 보호해 줄 거라고 생각하는 걸지도 모른다. 이때 베니테스는 극 중에서 가장 격앙된 모습을 보인다. 두려움 때문에 감히 전쟁을 입에 올리는 모습에, 그는 교황청에 대한 희망까지 버리려 한다. 신이 창문을 깨고 추기경들을 혼내고 비웃었다면, 베니테스는 그걸 어떠한 은유 없이 직접 한다.


베니테스의 연설은 추기경들의 마음을 깼다. 추기경들은 다시 교황청의 역할에 대해 생각하고, 외부와 연결될 준비를 한다. 균열을 충분히 받아들이고, 교황청은 결코 완벽하게 홀로 존재할 수 없다는 걸 마음 깊이 인정하고 투표에 임한다. 그 결과, 오래된 전통에 가장 확실하게 균열을 낼 수 있는 사람을 교황으로 선출한다. 오직 남성만이 교황이 될 수 있다는 견고한 규칙을 깨고 ‘간성’인 베니테스가 교황의 자리에 오른다.


로렌스만이 베니테스가 간성이란 걸 알고 있다는 건 중요하지 않다. 베니테스가 간성이라는 사실은 마지막까지 ‘균열 없는 진보는 없다’는 명제를 분명히 한다. 베니테스는 자신의 몸에는 남들과 달리 통합되지 않은 두 존재가 공존한다는 사실을 알고 교황의 자리에 임하기로 한다. 그가 스스로의 정체성을 받아들인 것과 별개로 그는 존재 자체로 교회의 균열이자 갈등이다. 동시에 그는 또 하나의 사실을 드러낸다. 교황청이 외부라고 여기던 존재들은 이미 교황청 안에 들어와 있다는 그 사실 말이다. 그는 그렇게 누구보다 교회를 멀리 데려갈 수 있는 자가 된다.


마지막 장면에서 로렌스가 그 가능성을 보여준다. 베니테스와의 대화를 끝낸 그는 창문을 통해 밝은 빛이 내리쬐는 길과 그 길 위의 수녀들을 바라본다. 보이지 않던 존재들, 남자들의 세계라는 교황청의 내부에 기꺼이 균열을 내는 존재들, 외부라고 여겼지만 이미 이 안에 있던 존재들. 베니테스와 마찬가지로 여겨지는 건, 추기경들이 아니라 수녀들이다. 로렌스는 그들을 내려다보며 신의 뜻을 가늠해 보았을 것이다. 그런 존재들을 인식하고, 그들이 만드는 균열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 그가 바라는 진보 역시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신이 뜻한 바를 알게 되리라


로렌스는 전 교황이 뜻한 것을 충실히 행한다. 로렌스의 존경심 가득한 모습을 통해 전 교황은 마치 ‘신’처럼 묘사된다. 진보적인 교황이 남기고 간 것이 신의 뜻이라면, 현실도 비슷할지 모르겠다.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에 안치된 프란치스코 교황의 관 곁으로 한 수녀가 다가왔다. 교황의 관 근처는 전통적으로 남성 성직자만 접근이 가능하지만 수녀는 멈추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 역시 그를 제지하지 않았다. 그가 프란치스코 교황과 각별히 우정을 나눈 제느비에브 자넹그로스 수녀였기 때문이다. 낡은 규칙은 두 사람의 우정 앞에서 깨졌다.


신이 뜻한 바는 이런 것일 거다. 균열을 허용하고, 구석에 있어야 했던 존재들이 걸어 들어오고, 오래되고 낡은 규칙보다 친구를 떠나보내는 인간적인 슬픔이 더 중요해지는 것. 영화 <콘클라베>가 현실의 교황청이 그곳으로 나아가길 바라는 마음 없이 만들어졌을 리 없다.






[표지 사진 출처] https://medium.com/amazing-cinema/conclave-65f29a56fa1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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