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을 아끼지 않는 모든 이야기와 사람들에게 박수를

영화 <더 폴> 리뷰

by UNKNOWN

<더 폴>이 만약 사람이라면, 아주 뻔한 인사말을 건넸을 것만 같다.

"너는 어떻게 하나도 변하지를 않았니?"

근 20년 전에 만들어진 영화가 재개봉을 했는데 그 큰 스크린에서도 세월감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진짜는 낡지 않는 법'이라더니 <더 폴> 같은 영화를 두고 하는 말일지도 모른다. CG 없이 만들어진 영화의 매력은 오래될수록 커진다. 하지만 멋진 화면만 이야기하기에는 아까운 영화다. 온갖 상상력을 동원해 삶을 구하려는 이야기의 멋짐 역시 <더 폴>을 빛나게 하는 요소다.



이야기는 그렇게 멈추고, 그렇게 다시 시작한다


움직이던 말은 축 쳐지고, 열차는 원래 가야 할 곳에 도착하지 못한 채 중간에 멈췄다. 로이의 영화 역시 이 순간 멈춰 버린다. 아무런 전조 없이 흑백으로 시작되는 이야기 속에서도 이 '멈춤'은 선명했다. 어떤 이의 영화가 완전히 멈췄다고 말하는데 말과 열차의 멈춤을 쓴다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활동사진 '움직이는 말'은 최초의 영상으로 불리기도 하고, 영화가 탄생할 수 있는 바탕이 된 작품이다. 말이 달리고 난 뒤 온 건 열차였다. 뤼미에르 형제가 만든 <열차의 도착>은 최초의 영화가 되어 이후 만들어지는 모든 영화의 전신이 됐다. '영화'라는 매체를 존재하게 한 두 소재가 바로 말과 열차라는 뜻이다.


로이의 영화가 멈췄다는 표현도 같은 의미다. 로이는 서부극의 스턴트맨이다. 영화의 역사뿐만 아니라 서부극에서도 뺄 수 없는 요소가 말과 열차이다. 서부극은 말과 열차를 소재로 미국 영화의 근간이 된 장르다. 미국이 스스로 개척해 만든 장르이기도 하고, 이후 생겨난 모든 영화들의 뼈대를 만들어 준 장르기도 하다. 서부극에서 말과 열차가 멈췄다는 건, 영화 자체가 멈췄다는 것과 같다.


로이의 추락, 멈춰버린 영화. <더 폴>은 이 순간에 시작된다. 무언가 멈췄을 때 우리는 고장난 부분을 점검하고는 한다. 영화 역시 당연히 로이가 실패한 그 지점부터 다시 시작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더 폴>은 크게 돌아간다. 우연히 로이의 병실을 찾은 알렉산드리아가 시작점을 보여준다. 알렉산드리아는 로이의 병실 앞에서 열쇠구멍 사이로 말의 상이 거꾸로 맺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카메라 렌즈에 상이 맺힌 듯한 그 모습을 본 알렉산드리아는 이후 로이를 통해 새로운 이야기를 만나게 된다. '움직이는 말'이 '카메라'에 비치는 듯한 그 순간. <더 폴>은 영화를 말하기 위해 영화가 있기도 전인 그 순간부터 다시 시작하려고 한다.



상상과 무대, 영화는 거기서 왔다


공교롭게도 로이와 알렉산드리아의 이야기는 영화로 발전하지 못한다. 그저 말이 움직이는 그 태초의 순간으로 돌아갈 뿐이다. 영화가 '영화'가 되기 전에는 어떤 상태였을까? 아무렇게나 터져 나오는 상상과, 그 상상을 엮어서 만든 무대가 있었을 뿐이다. 영화의 DNA라 할 수 있는 상상력과 스토리는 거기서부터 존재했다.


아닌 게 아니라 영화가 지금의 형태를 띠게 된 건 조르주 멜리아스가 <달로의 여행> 이후의 이야기다. 본디 조르주 멜리아스는 마술을 하는 무대 예술가였다. 사람이 달에 간다는 허무맹랑한 상상이 이야기가 되고, 영화가 됐다. 영화의 원형은 언제나 상상이자 무대다.


상상을 빼놓고 <더 폴>을 얘기할 수는 없다. 로이가 들려주는 '무법자 이야기' 역시 '상상을 아끼지 않겠다'는 포부로 시작된다. 바다를 헤엄치는 코끼리가 등장하자 이야기는 비로소 움직인다. 그전까지의 이야기는 인물소개에 불과했다. 무법자 이야기가 코끼리를 보여준 건, 이 이야기가 상상을 동력으로 한다는 선언과도 같다.


그런데 왜 하필 코끼리일까? 육지에서 가장 거대한 생명이 연고도 없는 바다를 헤엄치는 것은 그 자체로도 장관이긴 하다. 거대함이나 의외성은 상상의 요소기도 하다. 하지만 왠지 '상상'이라는 단어 그 자체를 떠올리게 된다. 한자 문화권에서나 통용될 이야기지만, 그래도 안 떠올릴 수가 없다. 상상이라는 글자는 생각 상과 모양 상으로 이뤄져 있다. 여기서 모양 상(像)은 사람(人)과 코끼리(象)를 합친 글자다. 생각과 사람 그리고 코끼리가 만나야지 비로소 만들어지는 글자가 '상상'이라는 뜻이다. 마치 무법자 이야기의 요약과도 같다. 거대한 상상이 말도 안 되는 인물과 비현실적인 요소(코끼리)로 구현되는 것. 결국 무법자 이야기는 그 자체로 상상이라는 뜻이다. 멈췄던 영화를 움직이기 위해 상상부터 다시 시작하겠다는 거다.


상상으로 문을 여는 무법자 이야기는 마치 연극처럼 재현된다. 배경은 크고 인물은 작다. 3층 관객석에서 무대를 바라보는 것처럼. 화면에 가득한 여백은 인물들이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된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로이와 알렉산드리아의 이야기는 빈 공간을 많이 필요로 한다. 그러니 여백은 당연한 걸지도 모른다. 빠르게 변하는 뒷배경들 역시 구식 연극 무대를 떠올리게 한다. 인물들은 그대로고 배경지만 골라 끼워 공간을 바꾸는 그 방식이다. 커다란 여백은 인물을 자유롭게 만들 뿐만 아니라 순식간에 바뀌는 공간들도 어색하지 않게 만든다. 비어있는 무대를 채워나가며 공간을 바꾸는 방식이 그대로 적용된 것이다.


또 하나 연극의 흔적은 무법자 이야기의 전개 방식에서도 나온다. 로이는 알렉산드리아의 이야기를 충실히 듣고 이야기에 반영해 준다. 그에게 있어서 알렉산드리아의 이야기는 돌발상황인 동시에 영감이다. 어떤 상황이 발생했을 때 순식간에 이야기로 끌어들이는 것 역시 무대 예술의 요소이다. 가끔 무대에 끼어드는 관객들이 있다. 비어있는 남자 파트의 노래를 대신 불러준 관객이나, 뮤지컬에 나오는 주인공에 답해 버리는 관객들. 무대에 선 배우들은 순식간에 그 관객들의 의견을 이야기에 반영하고, 돌발상황에 대처한다. 때로는 관객들의 반응에서 영감을 얻기도 한다. 연극이 영화로 진화하는 과정에서 들고 갈 수 없었던 상호작용이다. <더 폴>은 멈춰버린 영화를 다시 움직이려고 하면서도 영화가 놓친 이야기의 속성에 대해서도 말하는 셈이다.



죽음이 아닌 모든 추락, 이야기는 삶을 구한다


로이는 불안정한 사람이었고, 그의 이야기가 죽음으로 치닫는 것 역시 예상가능한 일이었다. 그의 트라우마는 인물들의 죽음에도 그대로 반영됐다. 이야기 속 첫 번째 죽음은 파란 무법자에게 찾아온다. 그는 천장에 매달려 죽었다. 이후 로이는 길게 늘어진 천을 두고 그의 장례식을 치러준다. 여기서는 로이가 정의하는 죽음이 나타난다. 길게 수직으로 내려오는 죽음. 그가 추락해서 영화를 잃어버린 방식과 같다.


다른 모든 캐릭터들의 죽음 역시 '수직'으로 찾아온다. 총에 맞아 건물에서 떨어져 죽거나, 폭탄을 가득 들고 가 건물이 무너져 내리는 것으로 죽음이 보인다. 남은 인물들도 비슷하다. 수직으로 꽂아 내리는 화살비에 맞아 죽고, 나무에서 선 채로 죽는다. 아예 밧줄을 타고 올라가다가 떨어져 죽는 캐릭터도 있다. 종국에 로이는 자신의 캐릭터를 물에 빠뜨려 죽이려 들기도 한다. 반면에 죽음의 위기에서 빠져나온 인물도 있다. 도중에 무법자들이 납치한 공주는 총살을 당할 뻔 하지만 '수평'의 총살 현장에서 보란 듯이 살아난다.


재밌는 건 현실 세계와 무법자 이야기 사이의 간극이다. 로이는 '수직'의 죽음에 사로잡혀 있지만 현실 세계의 죽음은 모두 수평으로 묘사된다. 알렉산드리아가 로이라고 착각한 시체도, 뱀에 물려 한 순간에 죽어버린 아이도 모두 수평으로 뉘어져 있다. 오히려 다리에서 추락한 로이와 실수로 높은 곳에서 떨어진 알렉산드리아가 생존해 있다.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데 있어서 죽음만큼 쉬운 장치는 없다. 그리고 추락만큼 죽음을 주기 쉬운 설정도 없다. 하지만 로이는 끝내 자신의 캐릭터를 이야기 속에서조차 죽이지 못한다. 그가 이야기를 마무리해야 했을 때, 그는 높은 곳에서 떨어졌지만 죽지 않는 알렉산드리아를 보고 있었다. 죽음의 위기를 넘긴 어린아이가 자신에게 울면서 간절하게 죽음을 거둬라고 호소하는 걸 마주하고 있었다. 그는 결국 검은 무법자를 끌어올린다. 쉽지 않은 방식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하기로 결정한다. 로이는 알렉산드리아를 보면서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모든 추락이 죽음을 의미하는 건 아니라는 걸. 알렉산드리아는 이야기 속 인물을 구원하려 했고, 그 방법으로 모르핀을 찾아 로이를 구하려고 했다. 그리고 로이는 알렉산드리아가 자신이 아닌 이야기 속 인물을 구하려는 걸 알면서도 결국 인정했다. 떨어져도 살 수 있다는 것을. 결국 이야기가 그의 삶을 구했다.



이해할 수 없어도 사랑할 수 있는


<더 폴> 끝자락에서 로이와 알렉산드리아는 나란히 앉아 영화를 본다. 멈췄던 로이의 영화가 돌아온 순간이다. 알렉산드리아는 영화라는 매체를 잘 모르지만 로이를 발견한 이후로 몇 번이고 영화를 보게 된다. 그리고 인사를 전한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알렉산드리아의 인사를 보고 있으면 피식 웃게 된다. 알렉산드리아는 자기가 가장 듣고 싶어 했던 이야기의 작가가 사실은 자기 자신이었다는 걸 알까? 그리고 로이의 찬란한 영화들이 사실은 자기 때문에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는 걸 알까? 물론 알렉산드리아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않아도 된다.


<더 폴>은 어떤 상상이나 이야기를 만들고 듣는 데 있어서 '이해'를 강요하지 않는다. 알렉산드리아와 로이의 이야기가 언제나 쉬운 단어와 부가 설명으로 이뤄져 있었던 것과 같다. 알렉산드리아는 영어가 서툴렀고 로이는 그런 알렉산드리아를 위해 이야기 속 요소를 바꿔주기까지 했다. 중간중간 알렉산드리아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부분도 있었지만 어쨌든 이야기는 알렉산드리아를 관통했다.


로이와 알렉산드리아가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은 서로를 완벽하게 설득하지 못했다는 것에서 온다. 우리가 어떤 언어나 요소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이야기의 의도를 완벽하게 알지 못하더라도 충분히 이야기를 사랑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여기까지 생각이 닿으면, 알렉산드리아가 연발한 감사 인사의 진짜 주인공을 알게 된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지만 사랑했던 모든 것. 찬란했던 모든 영화들, 있는지도 몰랐지만 분명히 존재한 배우들과 늘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관객들. 상상을 아끼지 않은 모든 이야기와 사람에게 전하는 박수갈채였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흔히 발전은 솟아오르는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모든 생명체가 조상으로부터 갈라져 내려온 것처럼 발전과 진화 역시 '내려오는 것'에 가깝다. 열차가 도착한 순간부터, 영화는 끝없이 아래로 떨어져 자신만의 방식으로 발전해 왔다. <The Fall>이 영화에 대한 영화라면, 이 제목은 흠잡을 데가 없다.


필요한 얘기는 아니지만, 엔딩 이후 로이의 생사를 두고 벌어진 논쟁을 본 적이 있다. 나는 당연히 로이가 살았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영사기가 돌아가서 그런 건 아니다. 작중에서 로이는 다리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를 겪는 것이기 때문에 여자를 잊어야 산다는 평을 받는다. 그랬던 그가 무법자 이야기 끝에 사랑했던 여자를 보내준다. 여자를 잊었기 때문에 로이는 살아서 나아갈 것이다. 무법자 이야기 속 검은 무법자가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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