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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I SEO Oct 26. 2019

어긋난 진심이 빚어낸 비극 [뮤지컬 시라노]

좁고 얕은 덕질기- 1

‘누구나 하나의 세계를 이룰 수 있다’는 역사상 가장 오래 되풀이된 거짓말 중 하나일 거라고 주영은 생각했다. 세계를 만들 수 없는 사람도 있다. 아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탁월하고 독창적인 사람들이 만든 세계에 기생할 수밖에 없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똑같이 기여하는 것이 아니다. 거인이 휘저어 만든 큰 흐름에 멍한 얼굴로 휩쓸리다가 길지 않은 수명을 다 보내는 게 대게의 인생이라는 게 주영은 어째선지 아주 어린 나이에 깨달았다.

-정세랑 [지구에서 한아뿐] 중에서-


이 문장을 만났을 때, 나는 단번에 극장을 떠올렸다. 노래로, 연기로, 작은 숨소리로 만들어내는 뮤지컬의 세계에 내가 매혹된 건 어쩌면 저런 선망일까.


그리고 이어서 그들이 생각났다. 시라노, 록산, 크리스티앙. [뮤지컬 시라노] 속에서 만난 ‘탁월하고 독창적인’ 사람들.

이 극을 이렇게까지 사랑할 생각은 없었는데 배우들의 연기에 완전히 설득당했고 우연한 비극에 매료됐다. 아마도 정세랑의 소설 속 주영의 말처럼, 그들이 만든 연약하고 아름다운 세계에 반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태풍이 지나던 날. 7시 30분 공연을 8시 공연인 줄 알고 여유부리는 지연관객(나)


[뮤지컬 시라노]에 등장하는 괴상한 코를 가진 주인공 시라노는 17세기 프랑스의 실존 인물을 모델로 하고 있다. (물론 코는 아니고..) 극 중 시라노와 크리스티앙처럼 실존인물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는 1604년 아라스 포위전에 참여했다가 심각한 부상을 입고 돌아온 뒤, 물려받은 유산으로 문인들과 교류하며 살았다고 한다.


희곡 속에서도 그렇지만 뮤지컬 속 시라노는 탕진할 유산 같은 건 없어 보인다.

그러나 두려움을 모르는 자유롭고 올곧은 영혼. 그리고 위대한 시인이자 극작가이며 뛰어난 전사, 시라노.

완장 믿고 나대는 귀족(드기슈)이나 권력에 아첨하는 실력 없는 배우(몽플레뤼)를 보면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조롱하고 혼쭐을 내는데, 까탈스럽고 불같은 성미를 뒷받침할 실력이 있어 그는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는다.

시라노라는 캐릭터를 드러내는 넘버는 극 초반에 나오는 [거인을 데려와(Bring me giants)]이다.


저 하늘이 날 버려도 이 육체가 소멸해도 내 영혼만은 영원히 숨 쉬리
바위 같은 걸음으로 빛나는 용기를 품고
혼자라도 한 걸음 한 걸음 가야만 해
백 명이든 천 명이든 고통이든 파멸이든 무엇이든 다 데려와
세상 모든 거인들과 맞서리라.

-1막 [거인을 데려와 Bring me giants]


내가 [뮤지컬 시라노]를 사랑하게 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천재가 검을 드는 이유 때문이다.

그는 거대 악과 싸우지도 않고 구국이니 인류 구원 같은 대의를 이야기하지도 않는다.

그저 공짜 빵을 축내며 기껏 빵 봉지로나 쓰일 시를 쓰는 시인들이 내일도 펜을 드는 자유를 위해 (*저렇게 멋진 넘버를 부르며) 100명의 검사들과 맞선다.

그리고 서툰 연인, 록산과 크리스티앙의 저녁을 지키기 위해 몸을 던지고 전장으로 향한다.


아참, 쓰다 보니 빼먹은 것이 있다.

2019 뮤지컬 시라노, 시라노 역의 조형균배우

사진처럼 완벽한 시라노에게 딱 한 가지, 콤플렉스가 있으니 바로 저 툭 튀어나온 ‘코’다.

1막에서 시라노가 처음 등장해 부르는 넘버가 바로 [나의 코 (Why are you looking at my nose)]다. 그가 대장으로 있는 가스콘 부대에서는 ‘코라는 말 꺼내지도 마, 코로 숨 쉬지도 마.’라는 불문율이 전해져 내려올 정도. 다만, 시라노 역할의 배우들이 워낙 외모가 출중한 데다가 다른 능력들이 뛰어나 대체 코가 왜 콤플렉스인지, 저만하면 잘생겼지 (17세기 프랑스 벤츠남, 대극장 뮤지컬 유일무이 벤츠남...)라며 관객들은 납득이 어렵긴 하다.


어쨌든, 그나마 극 중에서 이 코 콤플렉스가 영향을 크게 미치는 건 시라노와 록산의 관계에서다.


록산, 시라노와 같은 영혼을 가진 사람.

시라노의 세계를 누구보다 가장 잘 이해하고 그 자신 또한 아름다운 세계를 창조할 수 있는 남다른 용기를 가진 인물로 등장한다.

2017년 초연 당시보다 2019년 재연에서는 훨씬 주체적인 캐릭터로 다시 태어난 록산은 어린 시절 코 때문에 놀림받는 시라노를 대신해서 버터나이프를 들고 악동들을 혼쭐 냈고, 함께 숲을 달리고 말을 타고 칼싸움을 하며 성장했다. 성인이 되어서는 검술을 배우고 글을 쓰며 여성 문학지를 만든다. 전쟁이 길어지자 고립된 가스콘 부대를 위해 전장을 가로질러 식량을 공수하기도 한다.

이토록 거침없고 용감한 록산에 비해, 정작 시라노는 사랑 앞에서는 자신이 없다.

시라노가 자신의 콤플렉스 때문에 그녀에게 다가가기를 망설이던 사이, 록산은 또 하나의 순수한 영혼을 발견한다.

2019 [뮤지컬 시라노] 록산 역 나하나, 박지연 배우

록산이 발견한 운명, 크리스티앙.

극장에서 록산의 가방을 훔친 소매치기를 잡아준 가스콘 부대 신입 대원. 일단 잘생겼다.

크리스티앙은 귀족 가문이지만 장남이 아니라 집안에서는 머물 곳이 없어서 ‘멋있게 살아보자’는 생각에 용병대로 들어왔다. 대체 애를 얼마나 구박해서 키웠으면 사회성이 1도 없는 건지, ‘가스콘 용병대 다운 패기를 보여주겠어!’라며 코가 콤플렉스인 대장 앞에서 ‘코! 코! 코!’를 외치고 사랑하는 여자 앞에서는 말문이 막히거나 아무 말이나 해버리는 문제적 인간이다.

아름다운 문장을 사랑하는 시라노나 록산과는 결이 다른 듯 보이는 인물이지만 세 사람은 어쩐지 극이 진행될수록 닮아간다. 어쩌면 그 또한 비극일지도.


뭘까 그 닮음은.

올곧고 순수한 영혼?

나는 외로움의 정서라고 생각했다.

그 자신에게만 크게 보이는 코 콤플렉스 때문에, 그의 용기를 기행으로 보는 세상 때문에 외로운 시라노.

부모 없이 홀로 살며 귀족(드기슈)에게 원치 않는 결혼을 재촉당하고 몰래 여성 문학지를 만들어야 하는 17세기의 여성, 록산.

집안에서 자리를 찾지 못해 용병대로 왔지만 어디 가든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쭈뼛쭈뼛하는 크리스티앙.

안쓰러운 파리의 고아들.

그래서 그들에겐 정확하고 구체적인 사랑이 필요했다.

시라노는 ‘겉모습이 아닌 나의 영혼을 봐’ 줄 사람을 꿈꿨고, 록산은 찬사가 아닌 영혼의 고백을 기다렸고, 크리스티앙은 자신의 ‘온전한 모습대로 사랑’ 받기를 바랐다. 그들은 그 소원들을 모두 이뤘지만 한편으로 모두 실패했다.


약은 약사에게
고백은 당사자에게

이 극을 처음 봤을 때의 감상은 “고백은 본인에게 하자.”였다.

세 사람의 진심은 늘 수취인이 잘못되었다.

고백 편지를 품고 찾아간 시라노는 록산으로부터 ‘크리스티앙을 사랑하게 됐어요.’라는 말을 듣게 된다. 정작 당사자인 크리스티앙은 록산의 마음을 모르는 상태에서.  결국 자신의 고백을 포기하고 크리스티앙을 만나 록산의 마음을 넌지시 전해주는 시라노. 그러자 크리스티앙은 자신도 그녀를 사랑하지만 그 마음을 전할 말솜씨가 없다고 하소연한다. 록산의 행복을 위해 시라노는 크리스티앙의 이름으로 록산에게 유려한 편지를 보내게 되는데 결국 사랑 고백까지 어둠을 빌려, 타인의 얼굴을 내세워하게 된다. 시간이 흐른 뒤에 편지의 행간 속에서 또 다른 진심을 발견한 록산이 ‘이 영혼만을 사랑한다.’고 말했을 때, 그 고백을 듣는 사람은 크리스티앙이었고 그는 그 사랑은 시라노의 것이라고 확신하게 된다.


시라노는 그런 비극이다.

엄청난 음모가 도사리지 않고 신이 인간을 시험하지도 않지만 엇갈린 마음, 누구도 서로에게 잘못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피해자이자 모두가 가해자가 되어버리는 공교로움의 비극.

가장 순수하게 서로의 행복을 바랐고 진실했지만 그것이 가장 큰 거짓과 위선이 되고 말았다.


시라노의 대사처럼...

내 삶이 오직 진실되기만을 바랐는데
역시 우스꽝스러운가요, 내 코처럼



1막은 시라노의 콤플렉스와 크리스티앙의 어설픔에 시인들의 재치까지 더해져 굉장히 유머러스하게 진행되지만 2막부터는 무대가 전장으로 옮겨지면서 분위기는 침잠한다.

시라노와 록산, 크리스티앙의 세계에는 대의가 끼어들 자리가 없었다.

배경이 되는 ‘아라스 포위 작전’은 윗분들이 만든 완벽하게 망한 전쟁으로 적군을 포위하러 갔다가 도로 포위당하면서 세 사람을 더욱 비극으로 이끌 뿐이다.

시라노의 표현을 빌리자면 오만과 편견, 위선으로 만든 ‘거인’이 아무렇게나 휘저어 세 사람의 세계를 망쳐버린다. 대의라는 건 겨우 그 정도다.

2막을 여는 앙상블 넘버 [파리의 추억 (Memories of Paris)]에서 그렇듯, 나는 그 전장을 보며 벨쥐락의 여름이 그리울 뿐이었다.


한없이 푸르렀던 어느 여름날 향긋했던 그 바람에
당신처럼 해맑게 웃던 여름날 포근했던 그 빗소리
웃고 울며 함께 한 아름다운 추억들
눈을 감아도 선명하게 떠올라 마을 축제 몰래 갔죠
당신과 함께 보낼 여름날만을 기다리곤 했어
별을 세다 잠들던 꿈결 같은 시간들

- 1막 [벨쥐락의 여름 Summer in Bergerac]


거짓과 위선이 끼어들 틈 없는 시라노와 록산이 마음껏 달리던 벨쥐락의 여름.

그 작고 순수한 세계를 나는 너무 사랑해서 공연이 끝난 지 2주가 됐지만 아직 [뮤지컬 시라노]를 보내지 못하고 있다.


시라노 회전문의 기록들. 총 8회 관극 (보다시피 거의 조형균 배우 중심으로 회전)





(*아래에 쓸데없는 스포 있음)







사실 극 중에서 시라노와 크리스티앙이 죽는 날이 바로 어느 가을, 26일 토요일이다. (원작에서는 9월 26일 토요일)

[뮤지컬 시라노]는 지난 13일에 막을 내렸지만, 오늘을 시라노의 ‘기일’로 치고... 제작사인 씨뮤까지 유튜브 라이브를 하고 팬들과 질척대며 슬퍼하고 있다.

물론 그 질척대면서 “시라노 못 보내”하고 우는 사람 중에 나도 있다.

아 정말.. 조형균 배우 이야기하면서 질척대고 싶다. 조형균의 시라노가 얼마나 매력적인지 모르는 사람 없어야 하는데...

시라노 삼연을 기다리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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