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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I SEO Nov 03. 2019

선로 위에서, 어디로든 [뮤지컬 안나 카레니나]

좁고 얕은 덕질기-2

이것도 그거 아냐? 그거, 페미니즘?


극장 블루스퀘어 앞에서 [뮤지컬 안나 카레니나]를 보고 나온 중년 남성이 일행에게 이런 말을 하는 걸 들었다.

내가 이 극을 한 번만 보고 끝냈다면 ‘웃기고 있네. 여자가 타이틀롤이면 다 페미니즘 극이냐?‘하고 비웃었을 것이다. 젊고 잘생긴 장교와 사랑에 빠져서 결국 파국에 이르는 여자, 안나 카레니나. ‘정숙한 여인에겐 좋은 남편이라는 상을 주고 자유를 찾는 여자는 피폐와 죽음으로 벌주는 이야기를 2019년에 꼭 봐야할까?’ 가 자첫(*자체 첫 관극)때의 솔직한 내 감상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중년 남성들이 나보다 먼저 이 극에서 페미니즘을 발견했던 걸까.


어쩌면 이 넘버 때문이 아닐까.


절대 돌아보지 않겠어
‘높이 날아갈래 난 자유로운 하늘로
이 모든 것 다 잊을래
잊어 그들의 눈빛따위 잊어 그들의 잣대
악몽에서 벗어나 문을 열고 날아갈래
저 푸른 하늘 향해 자유와 행복 향해
내 모든 삶과 사랑 향해
사랑 그리고 삶

-1막 마지막 넘버, [자유와 행복 Freedom and happiness]  


가사도, 배우의 표정과 목소리도 어찌나 힘차고 전투적인지 사랑노래라기보다는 출사표에 가깝다.

안나는 사랑을 찾아서 떠나는 것이 아니라 편협한 세상과의 전쟁을 선포하는 듯 느껴진다.

첫 관극 때 심드렁했던 내가 다시 표를 끊고 또 끊고..(하지만 막공이 가까워서 결국 세 번 밖에 못 봤다.) 했던 것도 아마 자유와 행복을 쟁취하고야 말겠다는 안나의 열정과 용기에 반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원작자인 톨스토이의 의도는 결코 아닐거라 생각하지만, 나에게도 또 중년의 남성 관객에게도 뮤지컬 [안나 카레니나]는 충분히 여성주의극으로 읽혀진다.


2019 뮤지컬 안나 카레니나, 안나 역의 윤공주 배우


(*스포 있습니다)



우선 안나 카레니나의 남편 알렉세이 카레닌을 보자.

원작에서는 여행에서 돌아온 아내를 마중하면서 카레닌은 “세상에 나처럼 친절한 남편이 어디있겠어.”라며 자기 입으로 치하하는 수준이라면 뮤지컬에서는 그의 가부장적인 성향이 더욱 도드라진다. 남편과 브론스키의 인사가 불편해서 자리를 피하고 싶은 안나에게 카레닌은 “남편의 말을 끊다니, 옳지 않아.”라며 꾸짖는다.  안나의 부정을 눈치채고도 ‘남들 눈에 띄지 말라’며 자신의 체면부터 챙기던 카레닌은 결국 안나가 떠나자 “은혜를 모르는 것!”이라고 노래까지 부른다. (*물론 사람 죽어도, 살아도 노래 부르는 장르가 뮤지컬이긴 하죠.) 결혼생활을 ‘은혜’로 정리하는 남자라니, 과연 그에게 부부관계란 무엇일까.


재밌는 건, 연극[인형의 집] 이나 영화[82년생 김지영]속 남편들이 한국 여성들에겐 ‘저 정도면 괜찮은 남편 아니냐?’라는 재평가를 받듯이 카레닌 역시 꽤 적지 않은 여성 관객들에게 ‘고쳐 쓸 만한 남자’또는 ‘(후반부 때문에)찐 사랑러 카레닌’으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대체 한국 여성들에게 ‘좋은 남자’란 무엇일까.

남자들이 흔히 하는 말처럼 ‘내가 때렸어, 돈을 안 벌어왔어, 바람을 폈어?’ 그거면 되는 것일까. 폭행은 범죄이고 혼자 살아도 생계는 열심히 해야 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정말 그거면 ‘좋은 남편’이 될 수 있는 걸까.


그리고 안나에게는 자유와 행복의 표상이 된 남자, 알렉세이 브론스키가 있다.

브론스키는 스케이트장에서 키티를 만나 이렇게 말한다. “난 내가 한 약속은 꼭 지킵니다.” 그러나 이 말을 뱉은 직후부터 브론스키는 자기가 한 말을 하나도 지키지 않는다. 무도회장에서 키티에게 마주르카를 추며 고백(청혼)을 하겠다고 말하고서 곧이어 안나에게 반해서 키티를 외면했으며 안나에게는 멀리 해외로 떠나서 함께 살자며 ‘내 왕국의 여왕은 당신’이라고 해놓고 바로 다음 넘버에서 ‘아 난 야망이 많았는데...’하며 아쉬워한다. ‘나한테 남은 건 당신 뿐이야, 잊지 마.’라는 안나에게 ‘내가 어찌 잊겠소’라고 답한 다음, 어느새 까맣게 잊고 안나를 시골 영지에 남겨둔 채 출세가도를 향해 달려나간다.

아, 정말 브론스키... 욕하자고 들면 정말 입이 아프다.



2막 말미에서 안나는 완전히 무너져내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두 남자, 가부장 카레닌과 약속을 지킨 적 없는 브론스키는 함께 [나의 죄 My guilt] 넘버를 부른다. 이 넘버는 들을 때마다 새롭게 나를 빡치게 만든다.


브론스키:
더이상 난 버틸 수 없어 악몽같은 나의 인생
그녀에게 난 악마같은 존재
그녀 앞에서 나는 죄인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어디서 부터 잘못된 것일까

카레닌:
도대체 누가 그녀에게 사랑을 느끼게 했나
하나님일까 사악한 뱀일까
저기 그녀가 홀로 서 있네
불행에 빠져 영혼 잃었네
끔찍한 운명 남은 건 없다네

-2막 [나의 죄 My guilt]


극 중에서 불륜의 두 당사자 가운데 댓가를 치루는 것은 오직 안나 뿐이다. 애초에 브론스키가 기혼여성과 열애한다는 소문이 퍼졌을 때도 브론스키의 어머니는 ‘적당히 즐기렴’이라는 정도였다. 게다가 정부가 있다는 것이 귀족 남성의 사회생활에 문제가 될 리가 없는 시절이었다. 그러나 안나는 사교계에서 완전히 퇴출당했으며 얼굴을 드러내고 대낮 거리를 걸을 수도 없을만큼 아무나 비난하고 조롱해도 될 존재로 전락한다.


그런 상황에서, 두 남자가 말로는 ‘나의 죄’라고 하면서 사실은 내가 불행하고 불쌍하다며 징징대는 모습은 뭐랄까... 영화 [82년생 김지영]에서 아픈 아내에게 도리어 위로받으면서 우는 남편의 모습과 겹친다. 죽음과 맞닿은 절망 속에 선 사람을 한 발 멀리서 쳐다보며 구경꾼이 된 자신의 처지가 안쓰러워 흘리는 눈물은 얼마나 추한가.


극 중에서 진심으로 안나의 처지를 이해하고 연민하며 손 내미는 사람은 키티 뿐이다.

2018 뮤지컬 안나 카레니나, 키티 역 이지혜 배우, 안나 역 정선아 배우

원작에서 보면 브론스키는 애초에 키티에게 청혼할 마음이 없었던 듯 하다. 브론스키는 그저 당시 모스크바 사교계에서 가장 주목받던 여성인 키티에게 사랑받는 자신에게 도취된 수준이었고 당시 자유연애가 막 시작되던 시기라 잘난 남자는 연애경력은 많을 수록 좋다, 고 생각했을 뿐.

그런 브론스키를 믿었던 키티는 결국 배반당하고 수치심에 괴로워한다. 쇠약해진 몸으로 외국을 떠돌며 그녀는 무엇을 깨달았을까. 뮤지컬에서는 생략되어 있지만 원작에서는 그는 귀족사회의 허위의식, 사교계의 꽃이 된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된 듯하다.


긴 여행에서 돌아온 그는 자신에게 청혼한 적 있던 레빈(시골 영주이자 귀족 사회를 싫어하는 냉소적인, 그러나 솔직한 인물)과 결혼한다.

그리고 브론스키에게 외면당하고 절망만 깊어가던 안나를 다시 만난다.


안나는 키티에게 사과하지 않는다. 키티는 안나에게 사과를 요구하지 않는다. 둘 다 사랑을 구원이라 믿었고 다가올 내일을 짐작하지 못했던 것 뿐이다. 그렇게 그들은 서로를 이해하고 안아준다.

키티와 안나가 함께 부르는 넘버 [그때 알았다면 If only i could know]는 내 오열 넘버이기도 하다. 시라노도 그렇고 나는 이런 피해와 가해를 나눌 수 없는 공교로운 비극이라든가 온전한 이해 앞에서 감정이 크게 흔들린다. 게다가 쇠약해진 여성을 또 다른 여성이 안아주는 연대 앞에서 어떻게 울지 않을 수 있을까.

이후 극장에서 사람들이 안나를 손가락질 할 때, 그 앞을 막아선 사람 역시, 브론스키도 카레닌도 아닌 키티였다.

안나의 비극은 단순히 ‘남자를 잘못 만난 죄’에 있지 않으므로  그 고통을 이해해줄 사람은 바로 키티 밖에 없었던 것이다.


누가 그들을 기찻길 위에 세웠나

.

1막의 시작을 여는 앙상블 넘버가  ‘규칙을 잘 지키고 기찻길 위로 가지 말라’는 내용인데 이어서 기찻길에 투신한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려온다. 원작에서는 남성이 사망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뮤지컬에서는 기찻길로 뛰어드는 것은 모두 여성이다. 기찻길에서 죽음을 선택한(혹은 시도한) 사람이 모두 여성이라는 건 어떤 의미일까.

첫 곡부터 강조되는 규칙은 이후 안나와 브론스키의 집에서, 무도회장에서, 경마장에서도 계속해서 반복된다. 그리고 안나는 여러 번 차례, 그 규칙을 거부한다.  그리고 종국에는 안나 역시 기찻길로 향한다. 안나를 포함한 여자들의 죽음(혹은 시도)가 사회적 타살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래도 뮤지컬은 비교적 열린 결말로 마무리 된다. 달려오는 기차를 안나는 등을 펴고 맞서 듯 바라본다.

나는 그가 절망에 몸을 던진 것이 아니라, 무의미한 정열을 버리고 그 기차에 올랐으리라 상상하는 편을 좋아한다. 눈보라 속에서 뜨겁던 애정은 이미 빛바래고 식어버렸으나 여전한 생에 대한 열정과 의지를 갖고 다시 한 번 더 넓은 세상으로 도약하는 것이 안나 카레니나에게 더 어울리는 결말이 아닐까.

그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으니까.

안나는 진짜 자유와 행복을 찾아 떠났을 것이다. 동서남북으로 갈라지는 선로 한가운데서 어디로든 마음의 방향을 따라 기차를 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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