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 함무라비]에 있고 서부지법 303호에는 없던 것

안희정 성폭력 사건 재판 방청기 -1

by MEI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위력에_의한_간음 및 #강제추행 사건의 공판을 방청했습니다. 공판심리기일 부터 선고공판까지 총 4회 방청했으며 피해자의 이름없는 연대자로서 또한 대한민국의 평범한 여성 노동자로서 본 재판정의 풍경을 기록하고자 합니다. 지극히 주관적입니다. 언론이 쓰지 않았거나 혹은 1심 재판부가 외면한 이야기를 씁니다.


JTBC에서 방영했던 드라마 [미스 함무라비]를 최근에 다시 보고 있다. 몇 가지 설정이 크게 거슬리긴 했지만 법원의 속사정이 비교적 생생히 그려진 것이 흥미로워 몇 화를 연이어 봤다.

그러다 3화에서 화면을 멈췄다. 법정 맨 뒷자리에서 우는 인물에게서, 그 인물의 시선 끝에 위치한 사람들의 뒷모습이 가슴에 걸려 재생 버튼을 누를 수가 없었다.


JTBC 드라마 [미스 함무라비] 3화

[미스 함무라비] 3화는 직장에서 인턴사원을 성희롱 사건으로 해고된 남성 팀장의 복직소송을 다룬다. 복직 소송을 제기한 원고, 그러니까 성희롱 가해 남성은 우선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는 가장임을 내세웠다. 그의 아내와 딸은 재판 진행 내내 그의 뒤에서 앉아있다. 사실 회사도 대외적인 이미지 때문에 해고하긴 했지만 성과 좋은 정직원인 가해 남성의 복귀를 바라고 있던 터였다. 증인으로 나온 팀원들은 회사의 뜻에 따라 ‘평소 팀장님이 농담을 좋아했으나, 광고업계의 특성일 뿐. 누구도 불쾌해하지 않았다.’며 피해자인 인턴사원의 과민함으로 몰아붙인다. 그러니까 성희롱은 없었고 징계는 과했고, 가해남성은 회사로 복귀해야 한다는 것이다.


피해자인 인턴사원은 맨 뒷자리에서 그 모습을 오열하며 지켜본다. 그러나 피해자의 눈물보다는 월급봉투가 무거워서.... 모두 차가운 바위처럼 피해자를 등지고 앉아 외면한다. 딱 한 사람, 자꾸 뒤를 돌아보며 피해자에 대한 안쓰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증인 4번에게 희망을 걸고 판사는 재차 묻는다.

“자신을 도와줄 사람이라고, 피해자가 가장 신뢰할 사람은 증인이 아닐까요?”

‘글쎄요...’라며 4번 증인은 피해자로부터 고개를 돌린다.


믿었던 사람의 차가운 뒷모습.

...나도 그런 뒷모습을 본 적이 있다.



2018년 7월 13일 서울 서부지방법원 303호

그 곳에서는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성폭력 사건 공판이 진행 중이었다. 오전에 증인으로 나온 A는 안희정의 지난 대선 경선 캠프에서 청년(영맨)팀을 이끈 인물로 이 후 재판부가 판결문에 적은 바에 따르면 피해자에겐 ‘가식을 취할 필요가 없는’ 신뢰하는 지인이었다. 증인A는 피해자와 나눈 카카오톡 메시지를 재판에 제출한 상황이었다. 수십 장의 메시지가 법정 내 모니터에 떴다 내려갔다. 검찰 측은 2월 25일, 증인 A가 받는 피해자의 메시지에 이르러 물었다.


마지막 성폭행 직후 피해자가 가장 먼저 연락한 사람이 증인이라는 사실 알고 있나요?


피해자는 A에게 ‘자고 있냐’는 내용의 메시지를 보냈으나 A는 답이 없었다. 만약 그가 답했다면 피해자는 무슨 이야기를 하려 했을까. 하지 못한 말이 무엇이었을지, 다음 날 다시 이어진 두 사람의 대화에서 조금은 짐작할 수 있을지 모른다. 피해자는 바다에 가고 싶다고, 그 물에 몸을 담그고 싶다고 A에게 말하고 있었다.


증인 A는 검찰 측의 물음에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보니 알겠다.’고 답했다. (*메모해 둔 것이 아니라 부정확할 수도 있음) 3월 5일, JTBC [뉴스룸]에서 피해자가 얼굴을 드러내고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성폭행을 고발한 직후, 증인 A는 피해자를 위로하는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그랬던 A는 안희정 그러니까 피고인 측 증인으로 재판정에 섰다.

나는 검찰의 마지막 질문을, 그 질문에 그저 담담히 답하던 증인의 뒷모습을 영영 잊지 못할 듯 하다.


피해자가 A를 신뢰해 메시지로 털어놓은 속내는 곧 안희정 측에 유리한 증거들을 제공됐다. 1심 이후, 오르내리는 ‘성폭행 피해자가 가해자를 저렇게 찬양하다니!’에 인용되는 대부분의 메시지 내용이 바로 A가 제출한 것이었다. 재판부 역시 그 메시지를 아주 중용한 듯 했다.

다만 딱 절반의 메시지, 안희정에게만 유리한 메시지만을 말이다.


혹독한 노동 강도, 조직생활의 어려움, 주변의 냉대 등을 하소연하던 피해자는 거의 매번 ‘힘들지만 지사님만 믿고 간다’ 는 말을 자기 다짐처럼 썼는데 그것이 곧 ‘성폭행 피해자 답지 않은 태도’로 재판부는 해석한 것이다. 재판부는 결코 피해자의 8개월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안희정에 대해서는 ‘정치 행보에서 오는 공허함에 대한 위로를 찾는다는 심리’라며 말하지 않은 마음까지 어루만져 준 재판부가 피해자의 하소연에는 어느 한 줄도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피해자가 A에게 가장 강하게, 자주 호소했던 안희정 조직의 문제는 바로 운전비서 B씨(안희정 측 증인으로 나왔다)의 성추행 건이었다. 비서실장C(이 사람도 안희정 측 증인)에게 피해자는 운전비서의 언어적 신체적 성폭력을 알렸으나 제대로 처리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피해자가 직접 운전비서 B에게 항의해 “기분나빴다면 미안”수준의 사과 아닌 사과를 받았을 뿐이었다.

정말이지, #여자들은_다_겪는다 해시태그라도 다시 달고 싶을 지경이다. 운전비서의 행동, 이후의 변명, 조직의 태도 등이 직장 내의 성폭력을 한 번이라도 겪고 문제제기 해 본 사람이라면 너무도 흔히 맞닥뜨리게 되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그 일로 ‘아 이 조직은 성폭력 사건을 해결할 의지도 능력도 없다.’는 절망감을 느꼈다는 피해자의 인식에 동의한다


피해자는 증인 A에게 업무의 괴로움을 호소하다가 이런 말도 했다.

여성 수행비서는 내가 처음인데 안 좋게 물러나면 다시 이 자리에 여자를 안 쓸 것 아닌가.


누군가 말했다. 한 여자의 실패는 때론 모든 여성의 실패로 독해된다고.

남성이고 엘리트 코스를 걸어왔다는 부장판사 조병구 씨에겐 아마도 ‘위로가 필요한 권력자의 고독’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는 감정이나 ‘성평등한 조직 이미지를 위해 파격 기용된’ 여성 수행비서의 불안은 도무지 불가해의 영역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안희정의 무죄에 분노하는 우리는 ‘어떤 밥줄은 밥줄 그 이상의 의미’임을 알고 있다.


다시 드라마 [미스 함무라비]의 이야기로 돌아가면, 드라마 속 법정에는 ‘서부지법 303호’에는 없던 것 하나가 있었다. 바로 피해자 김지은 씨에게 이제 유일한 희망이 된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판단을 해 줄 판사님’ 이다. 증인이 한 때는 피해자의 신뢰하는 지인이었을지 모르나 지금은 여당 국회의원실에 재취업했다는 사실을 흘려 넘기지 않을 판사가 드라마에는 있었다 ‘가식을 취할 필요없는’ 지인이 사실, 피해자에게는 낯선 정치판에서 그나마 가장 친하고 그 중에서 가장 안희정 측에 가까운 인물이었음을 다시 짚어볼 판사가 드라마에는 있었다

그래서 [미스 함무라비] 3화는 산뜻하게 끝이 났다.


하긴 그러니 사람들이 드라마를 보는 거겠지. 현실 법정에선 도무지 피해자에게 공감하지 못하는 판사가 있다. 단단한 벽이 되어 뒤돌아 앉아서는 피해자의 눈물에 연연하지 않는 한 때의 동료가 있다.

우리는 드라마 속에서나 겨우 꺼져가던 인류애의 불씨를 발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