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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매이 Dec 19. 2020

끝내 읽히지 않은 여자의 욕망, 뮤지컬[호프]

그리고 재현과 윤리에 대해

2020년 내가 본 가장 충격적인 극은 연극 [마우스피스]였다.

주인공 리비의 처지나 갈등이 현실의 나와 닮아서, 이기도 했지만 어느 순간 관객을 무대에 올리고 내가 무대에 서서 객석을 바라보게 만드는 메타극('이건 다 메타적이라는 거예요!')은 너무도 괴롭고 훌륭했다.


삶을 보다 멀리서, 새롭게, 선명하게 바라보기 위해 나는 극을 본다.

무대 위의 군상들은 나와 닮기도 하고 낯설기도 하다. 무대와 객석 간의 간격이 유지될 때 우리는 비교적 안전하게 극을 조망하고 일상을 가볍게 흔드는 산들바람처럼 상쾌한 기분을 만끽하며 극장을 나올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극이라도... 예술이라도... 우리는 윤리를 이야기해야 할 때가 있다.

특히 현실의 인물이나 역사를 무대 위로 불러왔을 때 그러하다. 인물과 역사의 어떤 면을, 무엇을 위해, 어떻게 가공할 것인가, 는 윤리의 문제로 이어진다.

가난한 자의 목소리를 전한다는데 그 공연은 티켓값을 살 여력이 있는 이들이 본다. 관객은 적당한 불편함으로 깨어있는 나를 발견하고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괜찮은 교훈을 얻어 돌아간다.

실제 살아서 그 불행과 매일 싸우는 인간에 대한 예의, 사건을 둘러싼 다양한 관점, 여전히 논의가 이어지는 역사에 대한 고민마저 사라진다면 무대에는 불행 전시와 관음의 욕망만 남을 것이다.


뮤지컬 [호프]를 보면 자연스럽게 연극 [마우스피스]가 떠오른다.

이 극은 윤리와 대화를 좀 해야 한다.



뮤지컬 [호프]는 카프카의 미공개 자필 원고 반환 소송을 소재로 하고 있다.


소송 당시에 한국에 보도된 내용을 찾아보니 대충 '실화'는 이런 내용인 듯하다.


요절한 카프카는 죽기 전 자신의 원고를 친구이자 문인인 막스 브로트에게 주며 모두 불태우라고 말했다. 그러나 브로트는 이 유언을 지키지 않는다. 그는 홀로코스트를 피해 당시 영국령이었던 이스라엘로 향했고 그곳에서 자신의 비서인 에스더 호페와 카프카의 유작을 정리해 출판한다. 카프카의 소설은 거의 미완으로 끝나 있어서 브로트가 표현을 가다듬고 수정한 것을 원본으로 친다고 한다.

브로트가 살아생전, 대부분의 작품은 이렇게 수정을 거쳐 이미 출판되었으므로 뮤지컬 [호프]의 실화 속 소송에서 재판대에 오른 건 미발표 원고의 소유권이 아니라 아니라 미공개 자필 원고(브로드의 첨삭 등이 들어간) 노트였던 셈이다.

어쨌든 브로트는 다시 죽기 전 자필 원고의 대부분을 카프카의 조카딸에게 넘겼고 나머지는 에스더 호페에게 주었다. 이때 브로트가 '이스라엘 도서관에 기증하라'라고 유언했다는데 여기에 에스더 호페가 최종 결정하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에스더 호페는 이후 1988년 소더비 경매에 카프카 [심판] 자필 원고를 출품했고 이는 198만 달러에 낙찰되기도 했다. 다만 이 원고가 독일 현대 문학 박물관의 소유가 되면서 이스라엘 내에서 논란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카프카는 독일어로 글을 쓴 작가였고 이스라엘 건국 이전에 사망했으며 그는 시온주의와 거리가 있는 무정부주의자였다고 한다. 때문에 그를 유대인 작가이며 그의 작품이 이스라엘의 유산이라는 주장에 카프카 자신이 동의할지 의문이다.

어쨌든 브로트가 생전에 쓴 편지와 유언장을 근거로 에스더 호페는 카프카 원고에 대한 소유권을 지킬 수 있었으나 그녀가 사망하자 상황은 달라졌다.  

이스라엘은 에스더 호페의 딸인 에바 호페와 루스 비슬러 자매가 원고를 소유할 권리가 없으며 브로트의 유언에 따라 원고는 이스라엘 도서관에 귀속되어야 한다고 소송을 제기했다. 당시 원고는 스위스 등 해외 은행과 이스라엘의 빈 아파트에 보관되어 있었다고 한다. 에바 호페와 루스 비슬러 자매는 유산을 모두 변호사 선임비용에 쏟으며 원고를 지키고자 했다. 그들은 원고는 어머니와 브로드(그가 자신들의 아버지라고 주장하기도)의 유산이라고 주장했다.

카프카의 자필 원고 대부분을 물려받은 조카딸은 이를 무상으로 공개했는데 호페의 딸들은 소송까지 불사하며 원고를 지키려고 한다며 대중은 그들을 비난했다.

결국 모든 소송에서 패배하자 에바 호페는 삭발까지 하며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했다고 한다. 


이렇게 실제 사건을 구구절절 적은 건 뮤지컬[호프]가 이 가운데 무엇을 선택했는지 보기 위해서이다.

우선 제작진은 '호페'라는 이름을 가져온다.

호페는 독일어로 희망, 기대를 뜻하는데 이 이름에서 작가는 큰 감흥을 받은 듯하다.

그래서 희망이라는 뜻의 이름을 갖고 절망의 인생을 산 여자, 에바 호프 이브기를 만들었다. (실존인물이라 호페를 호프로 바꾸고 성이 아니라 미들네임으로 처리한 듯)


에스더 호페는 마리 이브기가 된다.

실제 인물과 달리 마리 이브기의 직업은 알 수 없다. 남편도 없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도시 텔아비브에서 브로트와 원고를 정리하며 사후에 소유하게 된 에스더와 달리 마리는 체코에서 원고를 건네받는다. (단 한 부였다.) 그의 연인 베르트(브로트)는 전쟁이 날 거라고, 지식인은 검열을 당하니 원고를 대신 가지고 피난 가라고 말한다. 이때 마리는 '전쟁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라고 어리둥절하다가 원고를 자신보다 아끼는 연인에게 절망감을 느낀다. 국가나 민족, 예술은 마리의 것이 아니다. 마리는 그런 거창한 것을 고민하는 남자를 사랑할 뿐이다.

마리는 연인과의 재회를 기다리며 원고를 지킨다. 유대인 수용소에 가서도 오직 원고만을 지키며 딸의 생존에도 무관심한 태도를 보인다.

그들이 홀로코스트의 생존자인 건 팩트다.

하지만 어떻게 겨우 옷 안에 원고를 숨기는 것만으로 (실제 원고는 60권이 넘는 양이었다고) 나치의 눈을 피했을까. 수용소라는 환경은 그저 마리가 끝없이 원고에 집착했으며 에바는 엄마에게 버려졌다, 는 장치로 쓰인다.

극 중 수용소에서의 경험이 마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잘 알 수없다. 마리는 사실 수용소로 가기 전 이미 에바 대신 원고를 택하는데 수용소 생활이 얼마나 그를 비참하게 만들었는지 전혀 말하지 않고 그저 원고만 끌어안고 넋 나간 사람처럼 서 있다.

마리는 발화를 허락받은 캐릭터가 아니기 때문이다.

대신 재회한 베르트가 마리에게 '당신은 그저 전쟁통에 의지할 것이 필요했던 거지 원고가 소중해서 지킨 게 아니다!'라고 대신 말한다.

이스라엘에 도착해서도 그는 '죽 한 그릇 끓여먹지 못하는 가난' 속에서도 침묵하며 원고만 끌어안고 있다.

심지어 그 원고를 읽지도 않으면서 말이다.

이유는 알 수 없다. 마리는 '말하지 않기' 때문에.


주인공이라는 여성 캐릭터 에바 호프는 어떨까. 그는 말하기를 허락받았을까?


실제 에바 호페는 소송 진행 중에 언니가 먼저 사망하자 언니의 죽음이 자신들을 몰아세운 국가의 탓이라고 생각하며 분노한다. 그들 자매를 공적 자산을 독점하는 욕심 많고 괴팍한 여자들로 모는 세상을 크게 원망하고 경계했던 것으로 보인다. 원고를 가져가려 아파트에 들이닥친 법원 관계자들을 몸으로 막기도 했고 자신에게 남은 건 원고 밖에 없다는 말도 했다고 한다. (출처: https://blog.naver.com/indizio/30153607306 )

자신들은 나라 없는 국민이었고 홀로코스트의 생존자이면서 이후 이스라엘이 건국되었을 때 국방의 의무도 마쳤고 국가를 위해 할 만큼 했는데 국가는 끝없이 그들에게 요구만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제작진은 이 정도로는 에바 호페를 극적으로 재현하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한 듯하다.

뮤지컬 [호프]에서 에바는 그저 엄마는 나의 우산이고 나는 보물이라 믿었던 유년을 지나서, 수용소에 갇혀서도 원고만 보는 엄마에 대한 원망을 차곡차곡 쌓지만 결국 엄마를 지키려 동족을 밀고하는 죄를 저지르고 배신자가 된다.

그 학살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뒤에도 에바는 엄마에게, 다시 카델이라는 남자에게 희망을 의탁한다.

그런데 카델은 에바에게 원고를 팔자고 제안한 다음 그 대금을 가로채 사라진다.

카델은 떠나면서 이 극의 모든 남자 캐릭터가 그렇듯 에바에게 그럴싸한 조언을 하며 총을 건넨다. 에바는 그 총으로 도둑을 쏘는 게 아니라 자신을 구해달라고 끝까지 매달리기만 한다.

에바는 원고가 엄마도, 자신의 연인도 빼앗아갔다고 말하며 집을 떠나는데 '몸을 흥정하며' 20년을 떠돌았다고 짧게 자신의 반생을 정리한다.

탈가정한 여성이 할 수 있는 일로 '몸을 흥정하는'것 밖에 상상할 수 없다는 건가. 사실 이 대사를 들을 때는 객석에 앉은 내가 좀 비참해졌다. 이 시대에도 이런 극을 봐야 하다니.


그리고 원고를 숨기고도 무사했던 이상한 수용소처럼,

'텐트'로 표현된 호프 모녀의 집은 에바가 20년간 세상을 떠돌고 돌아와도 엄마의 유품과 원고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비현실적인 공간이다.


홀로코스트, 피난민 생활, 전쟁 트라우마 같은 것들은 이미지만 빌려온 듯 알맹이 없이 이렇듯 공허하다. 그저 마리와 에바가 '나에게 남은 건 오직 원고뿐!'이라고 말하게 하기 위한 장치로 쓰인 것이다.

모든 걸 잃어야 하므로 다 빼앗겼고 불행해야 하기 때문에 불행한 여자들.  


그렇게 제작진의 의도대로 다 빼앗기고 '원고 하나만 남은 여자'가 된 에바 호프는 법정에 선다.  

실제 사건에서 호페 모녀에게 유리했던 정상들, 그러니까 브로트가 에스더에게 보낸 편지나 유언장 같은 물증, 카프카의 원고를 왜 꼭 '이스라엘'이 가져야 하는가 하는 문제, 개인의 권리 침해 문제 등은 완벽하게 삭제된 채로 호프는 맨손으로 서서 원고는 내 것이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노파가 됐다.


그리고 원고가 있다.

'읽히지 않은 책' 요제프 클라인(카프카)의 미발표 원고를 캐릭터화 한 'K'.


내가 읽지 않은 소설이라 적긴 애매하지만, 카프카의 단편 [심판]에서 자신도 독자도 모르는 죄를 변호해야 하는 처지가 된 주인공의 이름이 조셉 K다. 뮤지컬 [호프]가 재판정을 배경으로 호프가 변호를 위해(?) 자신의 인생을 되짚는 극이라 원고지 캐릭터의 이름이 K인지도 모르겠다. 다른 단편 [성]도 얼굴 없는 체제와 권위에 맞서는 K가 등장한다니... 그 모티브일 수도 있고.


이 역할은 남자 배우가 연기한다.

K는 에바 호프의 제2의 자아라고 해도 무방한데 그래서 사실은 원고를 버리고 자유롭게 자신의 인생을 살고 싶지만 두려워서 용기 내지 못하는 에바 호프의 속내를 계속 말한다.


에바 호프는 말하지 않고 K가 말한다.

그런데 K는 에바 호프가 말하지 못한 첨예한 문제들 (국가와 개인의 관계, 시오니즘 같은 것들)을 말하며 그를 변명해주지 않는다. 베르트가 그랬듯, 카델이 그랬듯 K도 끝없이 에바 호프의 잘못에 대해 지적하고 조언하고 참견할 뿐이다.

동네 미친년으로 통하는 에바 호프가 '동네마다 한 명씩 필요해 미친년. 자신들은 정상이라는 기준이 필요하거든.'이라고 말하자 K는 의젓하게도 '남의 기준이 되기 위해 자신의 일상을 포기하면 안 돼.'라고 말해준다. 미친년이 되기로 호프가 선택이라도 했다는 듯이.

마리가 일찌감치 딸이 아닌 원고를 택하고 머물 곳을 찾지 못한 에바가 집을 떠나자 K는 마리를 버린 건 에바 호프 너,라고 말한다. 당신이 길을 잃고 헤매는 건 자기가 진짜 원하는 것을 응시하지 않고 스스로의 잘못을 돌아보거나 바로 잡지 않아서라고 말한다.

자신의 인생을 돌보지 않고 스스로를 읽지 않은 것이 에바 호프의 선택이며 이 모든 절망은 '자초'한 것이라고 K는 끝없이 말한다.


이를테면 K는 호프의 또 다른 자아가 아니라 제작진의 자아를 캐릭터 화한 셈이다.

극은 에바 호프의 인생을 시궁창에 밀어 넣은 다음 막판에 건져 올려 환하게 웃는 얼굴을 그려주고

"지금이라도 새로운 선택을 한 당신을 응원합니다^^"라는 메시지를 던지며 끝난다. (이쯤 되면 알앤디웍스의 사훈이 '모든 건 다 너의 선택이다'가 아닐지 의심스럽다.)


이 극에서 진짜 읽히지 않은 건 에바 호프라는 캐릭터의 욕망이다.

이야기 속에 인물들을 풀어놓고 '이 상황에서 사람은 어떻게 행동할까?'를 고민한 것이 아니라 최종 도착지를 정해놓고 그곳으로 향하게 만들기 위해 인물들의 반응과 행동을 제어한다.

캐릭터들의 욕망은 사라지고 제작진의 욕망만 남은 극.


출처: 트위터 알앤디웍스 공식계정(@rndworks)

다시 도입에 썼던 연극[마우스피스]로 돌아가 보자.

극 중에서 극작가 리비는 가난한 소년 데클란을 만나 그의 불우한 인생과 정제되지 않은 예술적 재능에 반한다. 그리고 데클란이 읽지 못하는 그의 인생 속 진실을 찾아냈다는 듯, 극화하여 무대에 올린다.

마땅히 전해져야 하지만 마이크가 주어지지 않아 소외된 목소리를 무대에 올린다, 는 리비의 인텔리적 감성은 겨우 표값을 내고 들어와 객석에 앉은 데클란이 진짜 그의 목소리로 말하며 깨어진다.

실제 하는 가난에서 눈을 돌리고 객석에 앉아 무대 위에 타자화된 궁핍을 구경하고 있던 나, 관객도 그 순간 나의 평온이 위협받는다고 느낀다.

그래서 리비는 마지막 선택을 한다. 아마도 [호프]의 제작진이 했던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마우스피스]를 보고 생각했다.

우리는 극을 통해 실체에 다가가는가, 아니면 실존하는 이들을 타자화 시키는가.


뮤지컬[호프]는 캐릭터들이 실존 인물을 기반하면서 그들의 삶을 의도대로 조각내어 하나의 그림으로 완성했다. 국가와 사회, 민족으로부터 이해받지 못한 여자를 무대 위에 올리고 다시 한번 객체로 만들었다. 이건 너무도... 윤리 이전에 염치가 없는 일 아닌가.





나는 뮤지컬 [호프]를 아르코대극장에서 했던 트라이아웃 때부터 봤다.

혹시라도 내가 오독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나 역시 진취적이고 긍정적인 캐릭터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건 아닌지 스스로를 의심하며 초연이 오고 재연이 왔을 때 또다시 극장을 찾았다.

그 사이 [호프]는 각종 어워즈에서 상을 휩쓸었으니, 이 정도 호평을 받는 극이라면 다시 보고 다른 사람들이 느낀 감동을 나도 느껴야만 할 것 같았다.

여성 배우가 타이틀롤을 맡아 꽉 조이는 드레스와 핑크빛 메이크업으로 치장하지 않고 무대 중앙에 서 있는 극이니, 극의 완성도를 떠나서 배우들 자신에게 소중한 극일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이번 재연을 보면서 불쾌감은 더욱 심해졌다. 특히 모든 남자 캐릭터들이 에바와 마리에게 훈계를 하는데 그때마다 객석에 앉아 '개소리하네'하고 비웃고 짜증내기도 지쳐서 중간에 나오려다가 겨우 참았다.

만약 K역을 여자배우가 한다면, 호프가 누리지 못한 명랑한 청춘처럼 느껴지는 여성 배우의 K 였다면 감상이 좀 달라졌을까? 하지만 제작진의 과잉된 자의식은 그대로 일 테니 그래도 난 이 극과 화해하지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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