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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ram Aug 19. 2023

엄마 이순신 장군이랑 친해


“엄마, 끝말잇기 하자!”

여섯 살 딸아이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습니다. 

좀전까지도 심심해서 소파에서 뒹굴뒹굴 몸을 베베 꼬고 있더니 요즘 한창 즐겨하는 끝말잇기가 생각났던 모양입니다.   

“그래, 좋아! 재인이 너부터 해!”

기대에 찬 아이 모습을 외면하기 어려워, 설거지를 하다 말고 젖은 고무장갑을 싱크대에 걸쳐놓으며 말했습니다.

“아니야, 엄마부터 해! 대신 꼭 ‘이’로 끝나야 해. 내가 꼭 말하고 싶은 단어가 있단 말이야”

뭐 이런 규칙이 있나 싶기도 했지만 ‘이’로 시작하는 어떤 단어를 말하고 싶기에 저러나 싶어 곰곰 ‘이’로 끝나는 단어들을 떠올려보았습니다. 쉬울 것 같았는데 막상 떠올리려니 쉬이 생각나지 않더군요. 그러다 생각해낸 단어라는 게 ‘곰팡이!’ (역시, 주부는 주부인가봅니다.)

“곰팡이”

“좋았어! 나 한다 엄마. 나 되게 어려운 단어할 거야. 오늘 유치원에서 처음 배운 단어야. 잘 들어.”

대관절 뭐 길래 저렇게 뜸을 드리나 싶어 부러 귀를 쫑긋 세우는 시늉을 해보이니 아이가 자못 더 진지한 표정을 짓더니 외쳤습니다. 

“이순신!”

“뭐? 이순신? 사람 이름으로 하는 게 어딨어?”

“엄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이렇게 어려운 단어를 아는 게 신기하지 않아? 이순신! 나라구한 이순신 말이야. 나 이거 오늘 유치원에서 노래 부르면서 알게 됐어. 원래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 2절까지밖에 몰랐는데 드디어 오늘 3절도 부를 수 있게 됐거든. 근데 그 노래에 이순신 나온다? 엄마 이순신 알아?”

스스로가 대견한지 한껏 들떠 이순신을 알게 된 경위에 대해 재잘재잘 떠들어대는 작은 입이 어찌나 귀엽던지요. 이 귀여운 설명을 더 들으려면 이순신을 모른다고 해야 할 터인데, 어쩌나요, 이 엄마는 이순신을 너무 잘 아는데 말이지요. 

 이 몸으로 말할 것 같으면 현충사에 어린이날 나들이로 네다섯번, 초등학교 소풍으로 서너 번, 중학교 때 친구들과 두어 번, 고등학교 졸업사진 찍으러 또 한 번, 대충 세어 봐도 현충사 방문 횟수가 열 번은 족히 넘는다 이거지요. 그것뿐인가요. 4월 28일 전후로 열리는 일명, 사이팔 축제, 성웅이순신 축제는 학창시절 손꼽아 기다리는 연례 행사였지 뭡니다. 꼬맹이 시절 엄마 아빠 따라가던 축제, 학창시절 야간자율학습 땡땡이 치고 몰래 가던 야시장이 아직도 생생하고, 그때 먹었던 달콤매콤짭짜름한 닭꼬치 맛은 아직도 생각이 나는 걸요. 네, 네, 그렇습니다. 제 고향이 바로 아산이건데, 어찌 이순신을 모른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아는 걸 안다고 이야기하는 건 죄가 아니지요. 아이에게 당당히 말해주기로 했습니다.  

“이순신? 엄마 이순신 장군 잘 알지, 왜 몰라!”

“엄마가? 엄마 어떻게 알아? 엄마도 그 노래 알아?”

“노래로 아는 게 아니라 엄마가 이순신 장군이랑 친해. 아주 잘 알아.”

노랫말에서만 들어온 이순신이라는 단어를 엄마가 잘 안다고 말하자 딸 아이 눈이 놀란 토끼처럼 동그래졌습니다. 대체 엄마가 무슨 말을 하는지 궁금해서 하던 끝말잇기는 승패도 가르지 못한 채 중단되었고요. 

“잘 들어봐, 너 외갓집이 어디야?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어디 사셔?”

“아파트 6층”

“아니, 어느 도시 사시냐고?”

“아산 사시지”

옳지 옳지, 우리 딸 다행히 어디인지 기억하고 있네요. 이야기를 쉽게 이어갈 수 있겠어요.

“네가 외갓집이 아산인 것처럼, 이순신 장군도 외갓집이 아산이었어. 이순신 장군 외갓집 근처에서 엄마가 살았으니 엄마가 어떻게 이순신 장군이랑 안 친할 수가 있겠어. 그래, 안 그래?”

“진짜? 엄마, 이순신 장군이랑 친구야?”

이순신 장군 외갓집 근처에서 살았다니, 아이는 무슨 내가 이순신 장군이랑 학교라도 같이 다녔는 줄 아는지 한층 목소리 커져서는 묻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엄마보다 훨씬 훠얼~씬 오래전에 사셨던 분이야. 아마 엄마의 엄마의 엄마의 엄마의 엄마가 사셨을 쯤? 아니면 그보다 더 오래전에 사셨을 거야."

"그럼 엄마는 이순신 장군이랑 본 적도 없을 거 아니야, 근데 어떻게 이순신 장군이랑 친해. 순 거짓말이지?”

순간 아이 말에 멈칫, 그렇지요. 이순신 장군을 실제로 뵌 적은 없죠. 1500년대에 태어나신 분을 1980년대에 태어난 제가 어찌 만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꼭 만난 적이 있어야 친한 건가요? 그건 아니라고 봅니다만.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께서 사시는 아산, 그러니까 엄마가 나고 자란 아산은 이순신 장군을 기념하는 것들이 많아. 그중에 가장 유명한 곳으로는 현충사라는 곳이 있어. 여기는 이순신 장군이 재인이처럼 어려서부터 서른두 살 무과라는 아주 어려운 시험에 통과할 때까지 사셨던 곳이야. 지금 현충사에는 그 집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이순신 장군을 기념하는 사당도 있어. 엄마는 어려서 여기 진짜 많이 갔다? 소풍으로도 가고, 할머니 할아버지 손잡고도 가고, 엄마 친구들 지은이 이모, 희영이 이모 알지? 그 이모들이랑도 가고.”

아이는 뭐 그리 재미있는 이야기라고 뚫어져라 눈 맞춤을 하며, 고개를 끄덕여가며 집중해서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리고 엄마가 이순신 장군이랑 친했던 이유가 하나 더 있는데, 재인이 너 엄마 생일 몇 월 몇일인지 알지?”

“응. 4월 17일.”

뜬금없이 생일 이야기를 꺼내니 좀 의심스러워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여전히 호기심 가득한 표정. 여기서 쐐기 한 방을 박아야죠! 비장의 무기! 

“잘 들어봐. 이순신 장군도 엄마처럼 생일이 4월이야. 4월 28일. 그래서 아산에서는 4월 28일쯤해서 큰 축제를 해. 일종의 이순신 장군 생일파티지. 엄마 어려서 거기도 참 많이 갔었어.”

“우아, 엄마 진짜 이순신 장군이랑 친하구나? 생일파티도 초대받고!”

추억에 잠겨 기억들을 더듬어보니, 진짜 학창시절에 이순신 장군과 관련한 추억들이 많기도 하네요. 그냥 딸아이 놀려줄 맘 반, 진담 반으로 친하다고 했는데 생각해보니 진짜 이순신 장군과 친해진 느낌입니다.

다음 번 친정 나들이 땐 딸 아이 손잡고 현충사에 가봐야겠어요. 오랜만에 가보고 싶기도 하고 아이에게 친분과시도 한 번 할 겸. 무엇보다 가을의 현충사 참 예뻤거든요. 거기가서 못다한 끝말잇기를 한 번 해볼까요? 시작은, “이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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