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발적 아싸의 고백
건강상의 이유로 퇴직을 했다. 주말에도 쉴 새 없이 울리던 업무 관련 단톡방을 나왔다. 퇴직을 경험해 본 사람은 알 텐데 일관계로 여기저기 얽혀있던 관계가 자연스레 끊기게 된다. 이참에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던 연락처와 단톡방을 싹 다 정리해 인간관계의 잔가지를 쳐냈다. 환경도 바꿨다. 외벌이가 되면서 집값이 싼 동네로 이사 왔다. 아는 사람이 전혀 없는 동네다. 불필요한 인간관계에서 해방되었다. 드디어 쉴 수 있게 되었다.
‘쉴 수 있게 되었다.’라는 표현을 쓰게 된 데에는 나의 건강상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어려서부터 약하게 태어난 나에게 중환자실, 병결, 병가, 치료 모두 낯설지 않은 단어들이다. 늘 통증에 시달리고 힘이 없었다. 이 지경인데 사람과의 관계에 흥미가 있었을 리가. 당연히 성격도 극도로 내성적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한국의 정규 교육과정을 마친 것 자체가 기적처럼 느껴진다. 아득바득 정상루트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사투를 벌였다. 지금이야 개인의 특성, 상황 등 다양성을 존중하는 시대이지만 내가 자랄 때는 남과 다른 꼴을 못 보는 시대였다. 내가 굳이 인간관계에 힘을 쏟지 않은 건 그럴만한 힘이 없어서인데 비정상적인 사람 취급을 당했다. 이상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기 위해 억지로 관계를 위한 사회적 가면을 겹겹이 썼다.
그렇게 했었어야 하는 이유가 세상은 조직 생활에 무난한 사람을 원하기 때문이다. 나에게 관계의 중요성은 대학입학 이후에 더 커졌다. 사람들이 그어놓은 원밖으로 밀려나 나에게 필요한 정보와 기회를 놓치기 될까 봐 늘 전전긍긍했다. 심지어 박사과정 내내 들었던 말은 네트워킹의 중요성이었다. 한국과 달리 서양은 추천서의 나라이기도하고 연구직 자리가 워낙 없어 그럴법도 하다. 하지만 이것이 나에게는 강박으로 자리 잡았다. 원치 않은 인연과 모임에 끌려 다녔다. 갑들에게 맞추고 부당하게 느껴지는 일도 참고 인연의 고리가 끊어질까 봐 의무적으로 챙겼다. 내가 다시 돌아봐도 가면을 아주 잘 썼던 것 같다. 마지막 직장은 나에게 지옥 그 자체였는데 그때 같이 일하던 동료는 이렇게 사람들하고 잘 지내는데 그만두는 게 아깝다고 했을 정도였다. 초중고학석박사, 이직도 몇 번, 종교 활동과 취미활동 모임들, 한국과 외국에 거주하며 알게 된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 쌓여 있었는데 마음은 늘 공허하고 괴롭고 힘들었다.
그렇게 심적으로 괴롭고 건강상 여력이 안되는데도 억지 노력을 했다. 왜냐하면 일 적으로든 사적으로든 사람들과의 관계가 끊어지면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건강상 이유로 결정한 퇴직이 내 인간관계에도 큰 계기가 되었다. 혼자가 되면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는데 정 반대의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외로움을 많이 타서 혼자되는 것을 두려워했었다. 와…그런데 나 혼자서, 나랑 같이 노는 것이 이렇게 재미있을 수가. 이렇게 재미있는 일인 줄 알았다면 진작 시도했을 텐데. 물론 프리랜서로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일만 무리 없이 하는 것도 큰 이유가 되겠지만 혼자가 되니 내가 하는 말이 더 잘 들리게 되었고 오롯이 나에게 쏟는 시간들이 너무 가치 있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홀로 행복한 지 약 2년이 되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현재 나는 너무 행복하다. 혼자 커피를 마시고 산책을 하고 책을 보고 강아지를 돌보고 남편 퇴근 후 같이 티비를 보고 무리가 되지 않는 선에서 최소한의 일을 한다. 비록 고요하고 단조로운 일상이지만 수다친구가 전혀 고프지 않을 정도로 너무 재미있다. 물론 사람들을 만나면서 에너지와 즐거움을 얻는 외향형들에게는 별로 와닿지 않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성향대로 살아가면 그것이 답이다. 하지만 나 같은 극내향형, 집순이, 자신의 건강조차 제대로 챙기기 어려운 사람이 무슨 인간관계를 통해 입신양명을 하겠다고 늘 투머치하게 헉헉대며 인간관계에 치여 살았는지 모르겠다.
사람과 함께 하는 삶과 관련해 학부시절 정신병리 강의 시간에 들었던 한 문장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자신에게 소중한 단 한 사람만 있어도 잘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부모형제던 친구던 반려자던 상관없다고 한다. 나는 대학 시절 만나 어느덧 황혼기를 함께 달려가고 있는 남편과 사이가 좋다. 뭐 불꽃 튀는 사랑, 간지러운 로맨스 이런 류는 절대 아니고 서로 별것 아닌 것에 깔깔거리는 시트콤 류의 베프다. 그리고 원가족과도 내 기준으론 그럭저럭 둥글둥글하다. 자주 연락하고 만나는 것은 아니지만 서로를 유사 가족으로 여기며 아끼는 친구 둘셋도 있다. 이만하면 아주 훌륭한 것 같다.
물론 여전히 에너지가 넘치고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왕성한 핵인싸 남편은 이런 내가 이해가 잘 되지 않는지 예전처럼 살라고 잔소리를 해댄다. 이 부분은 남편이 나로 완전히 되어보지 않는 한 이해가 어려운 부분 같다. 상관없다. 나는 지금 너무 행복하니까. 앞으로도 홀로 당당하게 내 본연의 모습대로 살아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