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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리멘탈 심리학자 Jul 14. 2023

강아지가 아프다

공감받지 못한 슬픔

우리 집 강아지는 14살 노견이다. 강아지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꼴값으로 보일지 모르겠지만 결혼한 해에 입양해 지극정성으로 키웠다. (이 글에서 지칭하고 있는 ‘우리 아이’라는 표현은 이 반려견을 말한다.) 유학 갈 때도 같이, 공부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을 때도 같이, 그간 수많은 이사와 우여곡절을 모두 함께한 가족이다.  우리 아이는 어려서부터 건강체질로 태어나 잔병치레도 딱히 없었던 육아 난이도 ‘하’의 강아지였다. 검진 때마다 매우 훌륭한 결과로 수의사들에게 칭찬을 받아 당연히 스무 살은 넘게 오래도록 건강히 살 줄 알았다.




그렇게 너무 안일했고 자만했다. 인생이라는 놈은 그렇게 자만하면 종종 뒤통수를 치는 것 같다. 몇 달 전 숨소리가 이상해 병원에 데려가보니 폐에 물이 찼고 심장에 문제가 있는데 몰랐냐고 묻는다. 무엇보다 췌장염이 심하게 와 마음의 준비를 하시라고 한다. 간밤에 응급 콜이 갈 수도 있으니 전화 꼭 받으시라는 말과 함께. 그 외에도 어디도 안 좋고 어디도 안좋고 어디도 안좋고 등등 등등 울지 않고 제대로 얘기를 들으려고 으스러질 정도로 이를 꽉 깨물었다. 응? 이렇게 갑자기? 세상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나의 오랜 투병생활로 인해 늙고 병들고 죽는 것에 대해 조금은 편하게 받아들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속절없이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그간 겪었던 일과는 또 다른 차원의 아픔이랄까. 병원 치료실 작은 큐브 공간에서 아이가 아프다고 우는 모습을 보고 정신을 제대로 차릴 수 없었다. 온갖 신들께 내가 대신 아프게 해 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


다행히 아이는 그 고비를 잘 견뎌줬고 약 2주간의 병원생활을 끝내고 가정 호스피스로 돌입했다. 노견 키워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때 들어가는 병원치료비 정말 어마어마하다. 물론 아이를 살리는 일이 가장 중요하지만 돈은 무시할 수 없는 현실 문제이고 이후 간병도 또 다른 현실 문제다. 사람 간병과 비슷할 것 같다. 똥오줌 못 가리니 기저귀 수발은 기본이다. 무엇보다 애가 아프니 먹는 것을 거부한다. 하지만 먹어야 조금이라도 호전된다. 안 먹겠다고 발버둥 치는 아이 입을 억지로 벌려 약 먹이고 물로 된 사료를 먹여야 한다. 수시로 애가 숨을 제대로 쉬나 확인하고 또 폐에 물 찰까 호흡수도 체크해야 한다. 매 시각 긴장의 연속이다.


이보다 나를 더 힘들게 한 것은 믿고 의지했던 이들에게 정서적 지원을 받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사람에 대한 기대가 없는 편이다. 특히 시절인연인 경우엔 기대가 더 없다. 인생은 가족과 한둘의 진정한 친구를 붙들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물론 강아지 안 좋아할 수도 있고 반려견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슬픔이 가벼운 것은 아니다. 결코 가볍지 않다. 그런데 내가 진정한 친구라고 믿고 의지했던 이들까지도 내 슬픔을 그리 가볍게 여길 줄은 몰랐다. 두 번째 응급 상황이 왔던 날 밤, 내 아이는 생사의 고비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고 나는 정신이 나간 채로 손을 벌벌 떨며 어쩔 줄 몰라했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자기 초등 딸 재우기 힘들다는 하소연을 들었다. 심장이 차갑게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나와 오랜 기간 희로애락을 같이 했고 우리 아이 어렸을 때부터 어떤 마음으로 키우는지 다 봤을 텐데 아… 이럴 수도 있구나. 몰랐다. 내 아이 위독하다는데 자기 초등학생 딸 재우는 것이 더 중요할 수 있구나.. 아 그럴 수도 있나 보구나 아 그렇구나.





이런 슬픈 상황이 때론 깨달음을 주기도 한다는 것은 참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전에 내 경험과 비슷한 에피소드를 들은 적이 있다. 절친 부모상에 조문 가서 자기 인생에 대한 서러움에 붇받쳐 실컷 울고 난 후 하소연을 한바탕 쏟아내었다는 것이다. 거기다 자기 부모는 아직 건강하다는 사실에 위안을 얻는 것은 덤이다. 하아. 한낱 인간은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타인의 불행에서 위안을 얻는 그런 미약한 존재인가 보다. 그 사람이 특별히 못돼 쳐먹어서가 아니라 평범한 인간도 그럴 수 있는 그냥 그게 인간인 건가 보다. 내가 아무리 가족같이 여기고 평생 붙잡고 가야 할 인연이라 생각했을지라도 결국 그녀도 인간이라는 점을 간과했다. 한낱 인간에게 과도한 기대를 했구나. 소수의 진짜 친구, 진정한 친구, 평생 인연 이런 프레임에 내가 갇혀 있었던 것이구나. 이제는 강박스럽게 붙잡고 있었던 그 속박에서 해방되어도 괜찮겠다. 그리고 어차피 가벼운 관계에선 큰 기대도 큰 실망도 없을 테니 마냥 느슨하고 가벼운 관계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깨달음은 아이와의 시간이 더욱 소중해졌다는 것이다. 병원에서는 아이가 열심히 싸워준 덕분에 나와 남편에게 마음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었다고 한다. 앞으로의 시간들을 보너스라고 생각하고 아이와 행복한 시간 보내시라고 격려해 주셨다. 그 격려대로 우리는 하루하루 감사한 마음으로 아이를 돌보고 있다. 여전히 아이의 상태가 심각해 보일 때마다 들쳐 매고 응급실을 찾을 때면 내 심장도 같이 떨어진다. 비록 내 시간들이 모두 간병으로 채워졌지만 함께하는 시간들이 너무 소중하고 아이에게 그저 고마운 마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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