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이 없는 숙제.. 영어
한국에서는 직장 다니다가 애 낳고 남편 따라 이민 왔는데 영어를 잘 못해요. 아이가 커갈수록 부담이 되고 말을 못 하니 밖에서 일할 수도 없고 답답해요.
기본 생활을 위한 언어는 마스터하고 오면 좋을 것 같아요. 그런데 이런 말 해준다고 뭐 도움이 되려나? 나도 상황이 닥쳐서 그냥 왔는데….
이민자들에게 가장 큰 스트레스는 언어 문제일 것이다. 영어를 잘하는 사람들이 영어권 국가로 이민 간다고 생각하지만 언어가 완벽하지 않은 상태로 오는 사람도 많다. 배우자를 따라서 또는 갑자기 좋은 기회가 생겨 준비되지 못한 상태로 오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그런 경우, 현지 환경에서 생활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영어가 늘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프랑스로 이주한 독일 여성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도 이와 비슷한 현상을 엿볼 수 있다. 연구 대상자들은 능숙하게 현지 언어를 구사하면 커리어에 경쟁력이 생기는 정도로 생각했을 뿐 언어 능숙도는 이주 결정에 중대한 역할을 한 것은 아닌 것으로 나타났다.
언어가 너무 두려워요. 사람들과 부딪혀가며 하나하나 배워나가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뭐 하나 영어로 받아봐도 몸이 떨리고 일일이 몸으로 부딪힌다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더라고요. 생각보다 확확 늘지도 않고 너무 답답하고 스트레스를 받아요…
영어 잘하고 싶죠. 너무 잘하고 싶어요. 현지인들하고 자주 어울리고 따로 시간 내서 공부도 하고.. 그런데 생각만큼 잘 되지 않아요.”
일단 이민 가면 영어 하나만은 마스터하겠지라는 기대감으로 야심 차게 이민 생활을 시작했지만 현실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았다. 지금 어린 세대에게는 크게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겠지만 40대 이상의 세대에게 영어 교육은 그저 문법과 읽기 위주였다. 그 폐해로 시험 점수는 잘 받는데 입을 떼기가 어렵다. 갓난쟁이를 키우는 주부 같은 경우, 영어를 배우고 싶어도 애도 있고 차가 없어서 나갈 수 없는 상황이 많다. 남자들은 그나마 일을 하니 직업적으로 생존에 필요한 영어는 익히게 되는데 밖에서 일하지 않는 엄마들에게는 그런 기회가 적다. 가끔 외출할 기회가 있어도 영어를 못하니까 무시당하는 느낌이 들고 그런 경험이 쌓이다 보면 자존감이 무너진다. 영어를 못하니까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억울한 일을 당해도 바로 대응하지 못한다. 다른 엄마의 도움을 빌어 항의라도 할라치면 문화 차이라는 애매모호한 답변만 받을 뿐이다. 내 속만 터져나간다.
스트레스를 너무 받아 정신과에서 상담받고 싶었어요. 그런데 언어 때문에 가슴속에 쌓인 얘기를 못하는 거죠. 통역을 쓴다한들 내 마음을 그대로 표현해주는 것이 아닐뿐더러 바로바로 티키타카가 안돼 답답하죠. 정신적인 문제는 의학에 해당하는데 의학에서조차 제대로 된 도움을 받지 못하는 느낌이에요.”
언어로 인한 스트레스는 더 나아가 건강에도 영향을 미쳤다. 노르웨이에서 16세 이상 66세 이하 4077명의 이민자를 대상으로 한 연구 결과, 건강과 현지어 능숙도는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으로 나타났다. 현지어가 미숙하면 치료를 잘 받으러 오지도 않고 병원에 방문해도 의사와 환자 사이의 치료적 관계를 맺기도 어렵다는 것이다. 이러한 어려움으로 인해 이민자들은 만성질환에 시달리기 쉽다고 한다. 이외에도 통역 시 오역 문제, 이민자 커뮤니티 내에서 낙인 문제까지 있어 건강이 위협받는 상황을 지적했다. 언어 미숙으로 인한 건강 악화 문제는 여자들에게 더 두드러진다. 밖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병원 방문을 그저 외부인과 회의 정도의 난이도로 여기는데 반해 영어가 서툰 주부들은 병원 방문을 너무 두렵고 무서운 일로 느끼기 때문이다.
남자들에게도 역시 영어 스트레스가 가장 컸다. 시험 성적이 필요할 때는 얼마든지 목표 점수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일할 때 필요한 언어는 그것과 또 다르다는 것이다. 인간관계에서 언어 때문에 벌어지는 사소한 트러블이 반복되다 보면 그것이 쌓이고 쌓여 큰 트라우마로 남는다고 한다. 현지인들이 외국인으로서의 나의 상황을 배려해주면 괜찮지만 일을 같이 하는 상황에서 그런 배려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한 한국인 이민자는 현지 동료가 일할 때 자신에게 빠른 속도로 거침없이 말을 한다고 한다. 못 알아들으면 영어를 못하는 네 잘못!이라고 하고 더 자세하게 천천히 말해달라고 요구하면 한숨을 쉬어버리니 눈치가 보인다고 한다. 다른 이민자도 정착해서 일한 지 4년 째인데도 아직도 발음이 이상하는 지적을 듣는다는 고민을 토로했다.
이렇게 언어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와 스트레스가 상당한데 영어가 드라마틱하게 느는 것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내 상황에 맞는 대처방법이 없을까? 갓난쟁이를 키우는 주부에게 사실 영어공부까지 기대하는 것은 너무 가혹한 일 일 수 있다. 그런데 그 시기에 아무것도 안 하고 손 놓고 있게 되면 점점 영어에 대한 자신감은 없어지고 정말 아무것도 못하게 될 수도 있어 최소한은 붙들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아이가 컸을 때 선생님과 대화도 할 수 있고 아플 때 병원도 부담 없이 갈 수 있다. 힘든 상황 안에서도 자기가 할 수 있는 한도 안에서 낮은 목표 작은 성취를 쌓아가야 한다. 예를 들면 아이를 데리고 외출할 수 있는 장소 내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인사말을 걸어본다거나 옆집에 노크해 간단한 안부 인사나누기, 식료품 쇼핑을 할 때 가게 안에 영어로 쓰인 상품 및 안내문 안의 단어나 짧은 문장을 외우기, 아이들 영어 만화 틀어줬을 때 같이 보기 등 말이다. 하다못해 집안일을 할 때 로컬 티브이 프로그램을 틀어놓고 듣는 것과 같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작은 성취를 할 기회가 생각보다 많다. 난이도가 낮은 것에서 높은 것 까지 체크리스트를 작성해보고 하나하나 도장깨기 하듯이 도전해보는 것이 좋다.
현지인 친구를 사귀는 것이 도움이 많이 됐어요. 우리 애가 어릴 때 옆집에 할머니가 살았는데 그 할머니는 그저 나랑 내 아이가 귀여운 거야. 나는 그때 너무 힘들어서 어둠 속에 있었는데 그 할머니가 시간적 여유가 있으니 틈날 때마다 놀러 가서 차 한잔 하면서 말도 배우고 현지 문화도 많이 배웠어요. 저한테는 은인 같은 분이죠.”
그밖에도 코로나 시대 도래로 인해 온라인 학습이 더 빈번해진 시대적 상황을 이용해볼 수도 있다. 온라인 학습도 대면 교육과 마찬가지로 그 안에서 팀이 결성되고 나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과 어울리며 지지도 얻을 수 있다. 운신의 폭이 어느 정도 된다고 가정할 경우 현지 교회 및 봉사단체에서 제공하는 커뮤니티 기반 액티비티 모임에 참여할 수도 있다. 높은 수준의 언어능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 액티비티 위주의 모임이기 때문에 영어가 유창하지 않아도 어울리는데 큰 무리가 없다. 현지 봉사자, 모임원들과 어울리며 언어를 배우는 동시에 사회적 관계가 성형되어 자신감 향상 효과까지 얻을 수 있다. 아이가 어느 정도 컸을 때는 파트타임의 적은 벌이의 일 또는 하다못해 무보수의 봉사활동이라도 일을 하면 언어가 많이 는다. 이로 인해 언어 상승효과뿐만이 아니라 내가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일한다라는 자부심도 느낄 수 있다. 큰 것이 아니더라도 그 사회에 한 발을 들여놓는 시도가 언제나 중요하다.
현지 사회에 어느 정도 발을 담그고 있다고 여겨지는 유학생에게조차도 영어 스트레스는 이만저만이 아니다. 학교가 요구하는 점수에 맞춰 시험 점수를 제출했고 일상 대화 위주의 미드도 큰 무리 없이 볼 수 있다. 외국인 친구들과 교류도 한다. 강의는 이래저래 어떻게든 따라가겠고 과제도 뭐 완벽하지는 않아도 그냥저냥 완성해서 제출하긴 하는데 그 이상 더 발전하는 느낌이 없다. 더 능숙하게 잘하고 싶은데 내가 익숙한 상황과 잘 아는 주제 내에서만 잘하는 느낌이다. 현지 친구들과 어울리며 자연스럽게 늘려가고 싶지만 그들도 공부하고 생활비 버느라 너무 바빠 친해질 기회가 많지 않다. 영어를 사용할 수 있는 환경이 생각보다 그렇게 많지는 않아 답답하다. 이미 영어가 어느 정도 수준에 도달한 경우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란 정말 어렵다. 이런 경우 내가 무엇인가를 써서 제출하고 내 생각을 발표하는 기회를 스스로 계속 만들어야 한다. 예를 들어 내가 관심 있는 분야 또는 더 깊게 공부해보고 싶은 전공의 교수에게 메일을 보내 미팅을 잡는 등 기회를 만들어 볼 수 있다. 또한 직로 상담, 정신건강 상담 및 랭귀지 코칭 등 외국인 학생을 위한 학교 서비스들을 적극 활용해볼 수도 있다. 학생들은 실수해도 봐주는 사람들이 많다. 학생 신분으로 있을 때 누릴 수 있는 혜택을 적극적으로 누리자.
저 같은 경우는 출퇴근할 때 현지 라디오를 틀어 현지 정치, 사회문제에 대해서 알아두고 직장 동료들과 그 문제에 대해서 얘기해요. 그 친구들 관심사들에 대해서도 미리 조사해 알아두고.. 최대한 얘깃거리를 풍부하게 준비해두는 것이죠.”
학생을 넘어 직장인 신분이 되면 언어 문제는 더 절박해진다. 현지에서 일자리를 구한 사람들은 일단 현지어를 어느 정도 구사하기 때문에 고용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도 이후의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언어적으로 끊임없이 노력한다. 언어를 능숙하게 구사하기 위해 노력한다고 하면 듣고 말하는 언어적 스킬만을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 그 안에 담긴 내용 학습도 간과할 수 없다. 현지인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그들의 문화를 먼저 익혀 현지 문화에 기반한 커뮤니케이션 능력과 사회성을 높이는 것이 더 중요할 수 있다.
아는 사람 중에 타일 작업을 하시는 한국분이 계세요. 그분은 영어는 잘 못하지만 진짜 일을 잘하시거든요. 그분 일하시는 것을 보면 와~ 일을 이 정도로 완벽하게 하니 현지인들이 아무도 못건들이는구나 싶어요.”
또한 언어 능력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싶지만 직무능력을 발전시키는 것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인종차별이 금지된 상황에서 일할 때 트러블이 발생하면 영어를 못하는 네 탓! 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어를 잘 못한다고 무시당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 한 이민자는 자기 일에서 어느 정도 실력을 인정받으니 어떤 누가 무시해도 똑같이 무시하고 욕하면 똑같이 욕을 해줄 정도로 자신감이 상승해 더 이상 언어로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처음 이민 왔을 때는 영어 때문에 불이익당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조급했어요. 그런데 아무리 노력해도 발음이든 문서든 하다못해 이메일에 쓴 뉘앙스까지도 트집이 잡히더라고요. 그래서 완벽해지려는 노력보다는 외국인으로서의 한계를 인정하고 시간을 가지고 천천히 발전시키자라고 마음먹으니 오히려 자신감도 생기고 주변 상황에 휘둘리지 않게 되더라고요”
이렇게 외국어가 는다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언어 학습의 계단식 성장에 대해서 많이 들어봤을 것이다. 윗 계단을 올라가기 위해서 정체되는 시간이 있을 수밖에 없는데 애석하게 현지 사회는 그 시간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보통 그 기간에 상처 받는 일이 많이 생긴다. 영어 차별이라는 가면을 쓰고 이민자들을 하대하는 것도 종종 볼 수 있는 현상이다. 내가 뭘 잘못한 것 같지도 않은데 너의 부족한 영어 탓!이라고 하는 상황에서 당연히 위축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민 1세대가 완벽하게 영어를 마스터하는 것이 가능할까? 언어 발달에는 생물학적으로 꼭 필요한 결정적 시기(Critical Period)가 있다고 한다. 이 시기를 지나서 이민 온 성인 이민자의 경우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결정적 시기를 약간 지나서 이민 온 청소년 조차도 영어를 현지인만큼 따라가기가 매우 버겁다고 한다. 자기 기준에서 아무리 어렸을 때 왔어도 가족과 하루 종일 한국말로 떠들고 한국인 커뮤니티 내에서는 한국말을 해야 하니 영어를 70프로밖에 구사하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국말을 안 쓰면 잊어버리게 되니 안 쓸 수도 없다. 한계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계를 인정하라는 말이 노력을 게을리하라는 말이 아니다. 이민 온 이상 현지 사회를 배우고 맞춰나가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때 보통 언어가 돼야 문화와 사회 적응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언어 학습은 복합적으로 이루어져 있다. 언어가 부족하더라도 얼마든지 현지 문화를 학습할 수 있고 현지인과 소통하는 스킬, 사회적 직업적 스킬을 높이는 노력을 통해 부족한 언어능력을 메울 수 있다. 이 과정에서 현지 언어가 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한국인 이민자라는 한계를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래야 부딪히고 깨지면서 생기는 상처를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고 더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