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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y Gwon Mar 12. 2024

죽음을 물어볼 용기

웰다잉 인터뷰

한방병원 인턴일 때 복합 부위 통증 증후군이라는 병을 앓는 환자를 맡은 적이 있다. 팔, 특히 손가락 통증이 심해서 마약성 진통제로도 통증이 가라앉지 않을 때도 있었고, 괜찮다가도 살짝 스치기만 하는 자극에 또다시 칼로 베는 것 같은 통증을 느끼기도 하셨다. 하루는 평소처럼 아침에 환자 상태를 확인하려고 가서 컨디션을 여쭈어 보았는데, 대답은 하지 않고 나를 빤히 쳐다보셨다. 그 눈빛은 나를 한심하게 보는 것 같기도, 원망하는 것 같기도, 절망스럽게 보이기도, 무기력해 보이기도 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천천히 입을 여시고는 나지막이 한 단어씩 쉬어가며, ‘선생님은, 내가, 얼마나, 아픈지, 모르지?’라고 하셨다. 말이 서늘했다. 왜 그렇게 느꼈는지 모르겠으나 환자가 세상을 등질 것 같았다. 당황해서 뭐라고 대답했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바로 주치의에게 알려야겠다는 것 말고는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때의 나는 비겁하게도 환자를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을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치의가 아니라는 것과 내가 할 일은 주치의를 부르는 것뿐이라는 것에 안도했다. 주치의가 환자를 보러 갔을 때 환자는 문구용 칼을 잡고 있었다. 주치의는 환자와 한참 이야기를 하고 환자를 안정시킨 다음에야 의국으로 돌아와서 정신과에 협진의뢰를 했다. 상황은 일단락되었고 이후에 무사히 퇴원도 하셨다. 만약 그때 내가 주치의였다면 어떻게 했어야 했을까. 어떤 말을 했어야 했을까.


교수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동안 의사로서 별다른 노력 없이 ‘어떡하지’만 되뇌고 있었던 것을 반성했다. 임상 경험이 수십 년인 교수님도 여전히 책을 읽고 공부하시는데 새내기 의사인 나는 어떻게 하면 환자분과 보다 깊은 대화를 할 수 있을지 고민하지 않고 그저 책임지는 게 무섭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괜히 죽음 이야기를 끄집어내어 내가 상처를 받거나 곤란해질 것이라는 두려움을 견디고 마음을 충분히 주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 지금 당장의 두려움 때문에 환자분께 귀 기울이지 못한다면 나중에 돌아보았을 때 충분히 용감하지 못하고 충분히 노력하지 못했으며 충분히 사랑하지 못했다고 후회할 것 같다. 만약 다시 복합 부위 통증 증후군 환자를 만난 순간으로 돌아간다면 어떤 말을 할까 상상해 보았다. 용기를 내어 말을 꺼내야지. 혹시 죽음을 생각하고 계신지, 어떤 점이 가장 힘드신지. 어쩌면 죽고 싶다는 말이 말 그대로 죽겠다는 뜻이라기보다, 환자분은 그 말로 당신의 두려움과 고통을 표현하고 싶으셨을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 기댈 곳이 필요하다는 간절한 표현이었을지도 모른다. 도와달라는 그 손은 아무에게나, 아무 때나 뻗지 않는다. 손을 내밀기까지 그분이 겪은 고통을 헤아리고, 내가 도울 수 있음에 감사한다면 그분과 깊은 대화를 하기 위한 용기를 내는 것이 보다 수월할 것이다.


자살 위험이 있는 환자를 만나면 직접적으로 자살에 대해 물어보라고 배운다. 죽고 싶은지, 자살을 실제로 시도한 적이 있는지, 언제 왜 어떤 방법으로 자살을 시도했는지 물어보아야 한다. 의사가 되기 위한 모의 진료 시험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상황이다. 모의 진료에서 상대는 진짜 환자가 아니라 연기하는 배우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입 밖으로 죽음을 꺼내어, 그것도 구체적으로 물어보는 것은 무례한 것 같고 부담스럽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두렵다. 죽음에 대한 생각을 잠시 잊고 있었는데 괜히 내가 들쑤셔서 다시 죽고 싶어 하면 어쩌나. 죽고 싶다는 이야기를 들은들 내가 그 힘듦을 근본적으로 해결해 줄 수 없으면 어쩌나. 문제임을 알더라도 내가 책임지고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몰라서 두려운 것이다. 그래, 모르니까 두려운 것이다. 어떤 문제가 생길 수 있고 어떻게 대처할 수 있는지를 충분히 알고 있다면 두려움은 줄어든다. 이것은 환자에게도 의사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죽음을 생각하는 환자의 상태를 모르기 때문에 의사가 환자에게 죽음을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는 것이고, 죽음에 다다를 때까지 의사가 어떤 대처를 할 수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환자는 의사에게 죽음을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는 것이다.  의사가 되어 이런 어려운 상황이 닥치면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스럽던 중에 인터뷰에서 어느 교수님께서 경험담을 이야기해 주셨다. 


“나는 처음에는 참 어려웠어요. 의사들은 환자한테 죽음에 대해서 안 물어봐요. 그래서 분명히 죽어가고 있는 말기 환자일지라도 죽음에 대해서 같이 얘기할 수 있는 기회를 못 얻죠. 의외로 의사가 죽음에 대해 언급해 주길 바라는 환자도 많아서 내가 먼저 그분들께 죽는 게 무서우시냐, 본인 상태가 어떻게 될 것 같냐 하고 말을 꺼내면 이런 얘기를 할 수 있어서 좋았다고 해주시거든. 그래서 용기 내서 묻는 거죠. 두려움 때문에 두루뭉술하게 이야기하면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놓칠 거예요. 환자분께 죽음 이야기를 꺼냈을 때 왜 이런 얘기를 하세요, 저는 더 힘들어요 하는 사람 본 적 없어요. 왜냐하면 항상 고민하고 있는 주제니까. 어떤 내용으로 얘기할지 모르기 때문에 의사가 공부를 많이 해야 해요. 내 방을 보면 관련 책만 수십 권이에요. 공부를 안 하고는 도저히 내 기본 생각만으로는 대화할 수 없으니까.” 


교수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동안 의사로서 별다른 노력 없이 ‘어떡하지’만 되뇌고 있었던 것을 반성했다. 임상 경험이 수십 년인 교수님도 여전히 책을 읽고 공부하시는데 새내기 의사인 나는 어떻게 하면 환자분과 보다 깊은 대화를 할 수 있을지 고민하지 않고 그저 책임지는 게 무섭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괜히 죽음 이야기를 끄집어내어 내가 상처를 받거나 곤란해질 것이라는 두려움을 견디고 마음을 충분히 주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 지금 당장의 두려움 때문에 환자분께 귀 기울이지 못한다면 나중에 돌아보았을 때 충분히 용감하지 못하고 충분히 노력하지 못했으며 충분히 사랑하지 못했다고 후회할 것 같다. 만약 다시 복합 부위 통증 증후군 환자를 만난 순간으로 돌아간다면 어떤 말을 할까 상상해 보았다. 용기를 내어 말을 꺼내야지. 혹시 죽음을 생각하고 계신지, 어떤 점이 가장 힘드신지. 어쩌면 죽고 싶다는 말이 말 그대로 죽겠다는 뜻이라기보다, 환자분은 그 말로 당신의 두려움과 고통을 표현하고 싶으셨을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 기댈 곳이 필요하다는 간절한 표현이었을지도 모른다. 도와달라는 그 손은 아무에게나, 아무 때나 뻗지 않는다. 손을 내밀기까지 그분이 겪은 고통을 헤아리고, 내가 도울 수 있음에 감사한다면 그분과 깊은 대화를 하기 위한 용기를 내는 것이 보다 수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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