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 있었던 경험
예전엔 힘든 건 각자 몫이고 혼자 헤쳐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을 위로 해주거나, 또는 위로를 받으면서도 ‘이게 문제를 해결해주지도 않는데 왜 이러고 있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힘든 이야기를 늘어놓는 사람을 보면 그 시간에 스스로 해결하려고 해야지 쓸데없이 듣는 사람의 시간까지 뺏는다고도 생각했다. 내가 힘들 때도 마찬가지여서, 내 문제는 스스로가 제일 잘 알기 때문에 해결책도 혼자 찾아야 하고 다른 사람은 해줄 수 있는 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문제가 생겨서 회의를 하거나 친구가 힘든 이야기를 할 때, 나는 다른 사람의 감정에 대해 공감하기 보다 문제해결에 집중하곤 했다.
그러다 5년쯤 전에 프레젠테이션(PT) 연합동아리를 하게 됐다. 그전에는 별로 해보지 못한 팀 과제가 많았는데, 가장 큰 팀 과제가 다른 동아리와 붙을 경쟁PT대회를 준비하는 것이었다. 5-6명이 한 조였는데, 각자 학교공부나 알바를 하기도 바쁜 와중에 시간을 쪼개서 맡은 일을 하고 서로 해온 걸 봐주면서 도와줬다. 머리를 맞대고 회의를 하다가 잘 풀리지 않으면 밥이나 먹자 하고 같이 맛있는 걸 먹으면서 농담 따먹기를 하기도 하고, 서로 우리 잘 하고 있다고 응원도 하면서 조금씩 대회 준비를 해나갔다. 그렇게 몇 주 동안 토씨 하나, 단락 하나, 말투 하나, 연기 하나에 우리의 노력을 담아 대본을 완성했다. 그 대본을 무대에서 연기해내야 하는 사람은 바로 나였다. 내가 못하면 나만 못한 것이 아니라 같이 준비한 우리 팀 전체가 못한 게 되어버릴 것 같아서 부담이 컸다. 그래서인지 대회 이틀 전부터는 팀원들에게 까칠하게 반응하기도 했는데 오히려 팀원들은 그런 나를 이해해주고 믿어주고 응원해줬다. 대회 당일, 한 라운드 한 라운드 할 때마다 서로 힘껏 응원해주면서 우리는 함께 가슴 졸이기도 하고, 함께 울고, 함께 웃었다. 그 시간 덕분에 난 ‘함께’의 가치를 알았다. 물론 무대에 서는 건 나 혼자의 몫이었다. 혼자 헤쳐나갈 몫이 분명히 있지만 함께하면서 그걸 견뎌낼 힘과 여유를 얻었다.
협동을 경험한 것이 이후에 인턴, 레지던트 생활을 할 때도 도움이 됐다. 힘든 수련의 생활도 옆에 있는 동기가 있기에 견뎌낼 힘과 여유를 얻는다. 누군가 일을 하다 말고 ‘아오! 맥주 한 잔 하고 싶다!!’하고 소리를 지르면 옆에서 누군가 답창으로 ‘아오! 나도!!’하고 소리를 지른다. 그러고 서로 깔깔깔 웃는다. 누가 괴롭히냐고 내가 가서 쥐어박아주기라도 할 기세로 물어보면 누가 어쨌고 저쨌고 종알종알 이야기를 한다. 그런 이야기를 한다고 내가 봐야 하는 환자를 누가 대신 봐주지도 않고, 내 연구를 누가 대신 해주지도 않아서 그 시간이 의미 없어 보이지만, 잠깐이나마 서로의 힘듦을 나눔으로써 오늘도 난 견뎌내는 힘과 여유를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