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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y Jay Feb 04. 2022

외국어도 결국은 '언어'니까

서른이 넘어서야 처음 경험한, 외국어로 소통하기

  나에게는 외국어 공포증 같은 게 있다. 어릴 적부터 수업 시간이면 빠릿빠릿하게 집중하고, 복습하고, 시험 공부를 해서 늘 외국어 시험 성적은 높은 편이었다. 난이도가 극악이었던 수능 영어 시험에서 100점을 맞기도 했고 일본어 자격증 시험도 가장 높은 급수를 취득했다. 고등학교 때 필수로 들어야했던 프랑스어도 교과서를 통째로 외워간 덕분에 시험에서 거의 틀릴 일이 없었다. 성적으로만 보면 3개 국어는 거뜬히 할 것 같아보이지만, 현실에서의 나는 외국인만 보면 도망치기 바빴다. 혼자 떠난 해외 여행에서 외국인 친구들과 대화하면 어색하게 웃기만 하는 바람에 ‘You are shy girl(수줍음이 많은 애다)’같은 말을 듣고도 씁쓸하게 웃어 넘길 뿐이었다. 내게 모든 외국어는 수학이나 다를 바 없는 시험 과목에 불과했다.



  그런 내가 독일어 한 마디 할 줄 모르는 상태로 남편을 따라 독일로 온 지 이제 5개월이 지났다. 이미 독일에서 2년 넘게 유학 생활을 하던 남편에 기대어 불편함 없이 지냈지만 어쩌면 이번이 외국어를 제대로 배울 마지막 기회일 것 같아서 독일어 학원을 등록했다. 열 명이 채 안 되는 학생들 중 절반은 영어를 할 줄 알고, 절반은 본인의 모국어 외에는 전혀 구사할 줄 모르는 학생들이 있었다. 공통으로 구사하는 유일한 언어가 독일어였지만 안타깝게도 기초반이라 사과, 책상, 의자 정도만 말할 수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 눈웃음과 고갯짓으로 소통할 뿐이었다.



  독일어 기초반에서는 다양한 사람을 만날 수가 있었다. 학업을 시작하거나,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의지를 갖고 독일어를 배우는 사람들도 있었다. 반면 각자의 사연으로 어쩔 수 없이 독일로 넘어온 난민들도 꽤 많았다. 비자를 신청하기 위해 대부분은 독일어 A1(기초 등급) 시험 성적을 요구하는 만큼 원치 않지만 별다른 도리가 없어 수업에 들어온 사람들도 있었다. 수업이 끝나면 항상 아이를 픽업하러 가는 엄마부터, 호텔에서 일하며 늘 지친 모습으로 수업에 늦던 20살 청년, 식당에서 일하며 독일어를 꽤 능숙하게 구사하지만 정작 문법에는 서툰 30대 가장도 있었다. 나 역시 한국 시차에 맞춰 일하다 보니 새벽까지 일하고 아침 수업을 가야했기에 늘 피곤한 학생 중 한 명이었다. 이 곳의 모든 사람은 시험 성적이 아니라 ‘독일에서 살아내기 위해' 언어를 배우고 있었다.



  한국에서 외국어를 배울 땐 늘 시험 점수가 필요한 학생들 사이에서 수업을 들었던 터라 대체로 비슷한 사람들과 비슷한 상황에서 공부를 했다. 수능 영어는 같은 학년의 고등학생들끼리 공부했고, 취업 준비를 할 땐 비슷한 또래들과 토익 학원을 다녔고, 이직 준비를 할 땐 직장인들이 모여 비즈니스 영어를 공부했다. 같은 시험을 비슷한 목표로 준비했기에 자연스럽게 서로 비교가 되었고 누군가가 나보다 시험을 잘 보면 티를 내진 않아도 우울해졌다.



  이와 달리 현지에서 외국어를 배운다는 건 학교를 다니고, 일자리를 얻고,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절박한 노력이었고 비교가 끼어들 틈이 없었다. 다양한 국적과 어학 실력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오히려 줄 세우는 평가는 의미가 없었다. 누군가는 회화를 잘했고, 누군가는 어휘가 풍부했고, 누군가는 문법을 잘했다. 삶의 모습에 따라 배움의 형태도 다양했다. 어떤 사람은 독일어 수업 내내 유독 뒤처져서 선생님은 물론 같이 수업을 듣는 학생들도 도와줘야 했는데, ‘교통’을 주제로 한 단어들이 나오자 갑자기 사전 한 번 안 찾고도 모든 단어를 꿰고 있었고 유독 그날만큼은 독보적인 우등생이 되었다. 아마도 이 곳에 와서 운전 경험이 많거나, 그와 관련된 일을 하는 건 아닐까 짐작했다. 

 


  누가 더 빨리 잘하나 겨룰 필요도 없었다. 각자의 상황이 너무나 달랐고, 나이도 20대부터 40대까지 다양했기 때문에 비교할 기준조차 없었다. 어쩌면 한국에서라면 외국어를 배우는 일도 ‘이 나이에 뭐하러' ‘지금 배워서 언제 쓰려고’ 같은 수많은 걱정에 답할 말이 필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곳에서 나이와 속도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우리에게 주어진 수업 교재만큼만 잘 해내면 선생님은 큰소리로 ‘Super!’ ‘Perfekt!’를 외쳤다. 



  한평생 시험 점수를 높이기 위해 외국어를 공부했던 나에게 어설픈 외국어로 소통하는 경험은 그 자체로 신선했다. 제각기의 억양으로 띄엄띄엄 단어를 말하는 서로에게 귀를 기울이는 것, 새로운 어휘를 만났을 때 선생님의 표정과 몸짓을 떠올리는 것은 마치 내가 처음 한국어를 배울 때의 방식과 가장 흡사했다. 외국어가 하나의 스펙이나 점수가 아니라 처음 만나는 사람과 문화를 이해하는 수단이 되고, 몰랐던 표현을 알아가는 즐거움으로 바뀌면서 이제서야 ‘언어'로써 받아들이게 된 느낌이었다.



  지금 내 앞의 저 사람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단어의 뜻을 찾아보는 것과, 시험 빈출 문제라서 수십개의 단어를 통째로 암기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똑같이 외국어를 공부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한 쪽은 끊임없는 호기심을 가지고 소통 능력을 키워간다면 한쪽은 오직 시험지 안에서만 통용되는 공식을 외울 뿐이다. 지금까지 외국어를 공부하며 단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호기심을 갖게 되었고, 처음으로 낙담하지 않고 즐겁게 공부를 하고 있는 요즘이 매일 새롭다. 여전히 습관적으로 문법과 문제 풀이에 집착하곤 하지만 틀린 문제로 좌절하기보다는 새로운 표현을 알아가는 즐거움을 놓치지 않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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