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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y Jay Feb 05. 2022

독일에 살면서 달라진 나의 '인생 음식'

소울푸드, 영원한 건 절대 없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물어보면 종류는 자주 바뀌긴 했어도 늘 달콤한 것들을 떠올렸다. 초콜릿이 가득 들어간 쿠키나, 꾸덕한 초코 케익, 진한 에스프레소와 초코 파우더가 담긴 프라푸치노를 먹으면 스트레스가 모두 사라졌다. 기분 좋은 주말이면 카페를 찾아 달달한 디저트를 먹었고, 우울하고 슬픈 날에도 달콤한 것들을 찾았다. 밥값보다 비싼 디저트가 많았지만 밥값은 아껴도 디저트값은 아끼지 않았다. 특히나 독일에 오기 몇 달 전, 새로 시작한 사업으로 정신이 없는데다 입국 준비까지 맞물리며 입맛이 뚝뚝 떨어진 나머지 밥은 거의 먹지 않고 빵이나 군것질로 끼니를 떼웠다.


  스물 여섯 살, 여의도에서 시작한 첫 직장 생활에서 힘들었던 것도 의외로 식사였다. 당시 회사는 팀의 바로 윗 선배가 44살일만큼 평균 연령이 높았고 내 또래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특히 점심 메뉴는 늘 빨간 국물에 맵고 짠 한식이었는데 어찌나 지겨웠는지 맨밥에 마른 반찬만 깨작거리다 오는 길에 카페에서 케익이나 쿠키 하나씩 사서 혼자 먹기도 했다. 술을 좋아하는 편이었지만 회식 자리에서 늘 고기를 굽고, 기름진 전을 먹고, 소주를 마시는 상황에 이골이 났다. 그 무렵 내겐 삼겹살과 소주는 쳐다도 보기 싫은 ‘아재 음식'이었다.


  내가 결혼을 한다면 요리는 커녕 매일 샌드위치나 크로아상 같은 걸 먹고 살거라 생각했다. 데이트를 할 때도 밥보다 팬케익을 좋아하는 애인과 케익을 좋아하는 나는 한마음으로 ‘요리에 시간 쏟지 말고, 그 시간에 자기 일에 집중하자'는 말을 자주 했다. 요리 잘하는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데, 배달도 편하고, 무엇보다 버려지는 식재료 비용을 생각하면 차라리 사먹는 게 훨씬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독일에 온 지 한 달도 안 되어 한국에서 그토록 멀리하던 한식을 극성스러울 만큼 열심히 요리하기 시작했다. 외식을 하면 아주 간단한 식사를 해도 4-5만원씩 나가다보니 요리를 하는 게 무조건 이득이기도 했다. 유학 생활 2년이 넘어가는 남편은 능숙하게 제육볶음, 잡채, 백숙, 카레, 목살비빔밥을 해줬고 나는 열심히 레시피를 검색하며 김치부침개, 순대볶음, 해물칼국수, 동그랑땡, 떡볶이 같은 걸 했다. 국물을 안 좋아하는 남편과 달리 나는 국 없으면 밥 못 먹는 사람이 되어 한 번에 나흘치 국을 끓여두곤 했다. 


  이 곳에서 한식을 위한 재료들은 구하기도 쉽지 않고 가격이 한국의 몇 배 이상 비싸다. 지하철로 20분 거리에 있는 아시안 마트에 어쩌다 한 번씩 콩나물이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몇 번씩 헛걸음을 하기도 했다. 깻잎을 먹고 싶으면 기차를 타고 다른 도시에 가서 깻잎 씨와 흙을 구한 뒤 집에서 깻잎 농사를 지어야 했는데, 진지하게 깻잎 농사를 고민하다 남편의 만류에 포기하기도 했다. 


  독일은 고기값이 워낙 저렴해서 고기를 자주 먹는데, 삼겹살을 먹기 위해서 초반에는 남편이 꽤 고생을 했다. 정육 코너 점원이 한국식 삼겹살처럼 얇은 두께로 썰어달라는 말을 이해를 못해서 차돌박이처럼 얇게도 줬다가, 스테이크처럼 두껍게도 줬다가 몇 번의 시행 착오 끝에 이제는 남편의 얼굴을 알아보고 정확히 원하는 두께로 썰어준다. 남편이 삼겹살을 치익 소리 내며 굽고 있으면 나는 옆에서 노른자를 올린 파채와 쌈을 준비하고, 갓지은 흰쌀밥에 와사비와 쌈장까지 곁들여 먹으면 이만한 소울푸드가 없다. 그토록 싫어했던 삼겹살이 이 먼 타지에서 소울푸드가 될 줄이야.


  새삼 소울 푸드란 것도 결국은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것 아닐까 생각을 한다. 얼마나 희소하고, 비싸고, 귀한 것인지에 따라 음식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진다. 한국에서는 비싼 스테이크나 유명 디저트를 먹을 때 사진을 남겼다면, 이 곳에서는 어쩌다 만난 한국식 감자탕집이나 순댓국집에서 그렇게 카메라를 꺼낸다. 인스타그램을 켜면 친구들은 유명한 카페의 디저트, 호텔 다이닝 사진을 올리지만 나와 남편은 늘 직접 만든 한식을 올린다. “독일에서 김치전과 막걸리라니!”하며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다. 기념하고 싶은 ‘특별한 식사'의 기준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아마도 한국에 돌아가면 이런 열정으로 한식 요리를 하지는 못할 것 같다. 주변에 싸고 맛있는 한식집이 워낙 많아서 굳이 요리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니까. 하지만 재료도 구하기 힘들고, 귀찮다고 미루면 크림으로 가득찬 케익으로 끼니를 떼워야 하는 이 곳에서는 그 모든 노력을 감수하고 새로운 한식에 도전하게 된다. 더이상 한식은 흔해 빠진 저렴한 메뉴가 아니라, 비싼 돈과 노력을 들여야만 먹을 수 있는 귀한 음식이 되었기 때문이다. 어딜 가든 결핍이 곧 특별함을 만들고, 희소한만큼 귀해진다는 걸 다시금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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