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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y Jay Mar 07. 2022

감당할 수 없는 힘든 일을 마주할 때 가장 필요한 건

무엇보다도 나를 돌보는 일 ㅡ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을 보고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 때문에 가슴이 답답한 날이 있다. 누군가 심장을 움켜쥐는 듯 조여오고 숨이 턱턱 막히고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 날. 뭘 해도 안 될 것 같은 위축감과 두려움으로 한숨만 쉬다가 결국 몸 어딘가가 탈이 나서 며칠은 끙끙 앓는 날이 이따금씩 있다. 입시 결과를 기다릴 때도 그랬고, 취업 준비를 할 때도 그랬고, 이별 후에도 그랬고, 가족과 심하게 다툰 날도 그랬다. 그리고 이번엔 법적 분쟁까지 번질 수 있는 사건 하나가 날 잠식하기 시작했다. 사업을 하다보면 한번은 겪어야 할 일이라고 법무사는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말라고 했지만, 이미 내 속은 타는 듯이 닳고 닳아 있었다.



  이러한 류의 스트레스는 특히 나를 괴롭혔다. 내가 열심히 해서 결과를 만들어야 하는 시험이나 일을 앞두었을 때에도 스트레스는 받았지만 해야할 것이 분명히 보였기 때문에 몸이 아플 여유도 없었다. 일단 두려워도 열심히 해야 하는 수밖에 없으니까. 그런데 오히려 문제가 해결되길 그저 기다리는 시간은 나를 서서히 갉아먹었다. 입맛이 없어서 식음을 전폐하다보니 탈이 나고, 병원을 찾고, 몸이 다 상하고 나서야 정신이 들곤 하지만 늘 나는 하염없이 아팠다.



  머릿속으로 알고 있지만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는 게 마음먹는대로 되는 것은 아니었다. 커다란 문제를 마주하고 있는데 대체 어떻게 마음이 의연할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너무 많은 스트레스를 받지 말아야지 하면서 도리어 더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다.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커지는 생각을 잠재우려고 드라마를 틀었다. 새로운 드라마를 켜면 머릿속에 딴 생각만 커질 것 같아서, 이미 다 봤던 익숙한 드라마를 켰다. 다시 봐도 장면마다 화사하고 따뜻했던 <동백꽃 필 무렵>이었다.



  이미 끝까지 다 봤던 드라마를 한 번 더 보면 처음봤을 때 놓쳤던 것들이 새삼 새롭게 보인다. 주인공 동백이는 어린 아들을 혼자 키우는 미혼모인데, 텃세 심한 시골 마을에서 억척스럽게 술집을 운영하며 살고 있다. 그 와중에 살인사건 목격자가 되면서 살해 위협을 지속적으로 받게 된다. 처음 이 드라마를 봤을 땐 지속적으로 살해 위협을 받으면서도 고집스럽게 가게를 닫지 않는 동백이가 사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린 아들을 혼자 키우면서 보안도 취약한 시골 동네에서 굳이 억척스럽게 버티기보다는 차라리 유능한 아이 아빠와 함께 서울로 가서 일단은 안전히 살아남는 게 더 중요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이제서야 동백이가 지키려 하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누군지도 모르는 연쇄살인범이 자신을 위협하는 상황에서 잔뜩 움츠리고 그곳을 떠날 수도 있다. 하지만 아이를 키워야 하는 가장으로써 그녀에게 도망치는 것보다 중요한 건 돈을 벌고, 아이가 두려움에 떨지 않고 자신감을 갖도록 잘 키우는 것이었다. 그깟 까불이(연쇄살인범의 별명) 때문에 일상을 포기하고 두려움에만 떨며 살지 않겠다는 그 억척스러움이 뭉클하게 위로가 됐다.



  살다보면 누구에게나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이 닥친다. 때론 내가 손쓸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끙끙 앓으며 스스로 일상을 황폐하게 만든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고통스러운 시간이 지나간다고 해서 자연스럽게 행복해지지도 않는다. 첫 회사를 그만두고 직무를 바꾸기 위해 카페 아르바이트를 하고, 과외를 하면서 학원도 다니느라 바빴던 나는 취업 전까지 모든 행복을 미뤄뒀다. 여행도 데이트도 사치같아서, 롱디를 앞두고도 남자친구와 일주일에 딱 한 번씩만 만나며 두문불출했었다. 그러다 원하는 회사에 취업을 하게 됐는데 이상하게도 우울함이 사라지지 않아 꽤 오래 힘들어했다. 취업을 했다는 기쁨은 그간의 미뤄왔던 수많은 행복들을 다 보상할 수 없었고 오히려 위축되고 비관적이었던 시간들이 습관이 되어 그 흔적을 지우는 데 한참을 걸렸다.



  오로지 문제에만 골몰하고 있는 동안 일상의 사소한 기쁨, 여유, 고마움, 안도같은 감정을 미뤄두곤 한다. 그러는 동안 마치 기억상실증처럼 행복상실증 같은 병에 걸리고 만다. 시간이 지나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어도 이미 행복한 감정을 너무 오래 미뤄둔 나머지 어떻게 즐거워하는 지 나도 모르게 잊는 것이다. 문제는 힘들어하는 동안 생긴 몸의 병이나 자신감의 위축같은 건 마치 흉터처럼 오래 남아 나를 힘들게 한다.



  커다란 문제를 앞두었을 때 가져야할 마음은 오히려 사소한 일상을 지키고, 마치 운동하듯이 행복함을 조금씩이라도 꾸준히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일부러 꽃에 물을 주고 햇볕 좋은 날 산책을 나가고, 입맛이 없어도 정성스레 요리를 하며 일상을 지켜야 한다. 드라마 속 동백이가 살인사건을 목격하고, 살해 협박을 받고, 원치 않는 이별을 해도 꿋꿋하게 가게 문을 열고 혼자서도 새벽 시장에 나가는 것처럼 내가 지켜야할 것은 일상 그 자체라고 생각했다. 



  마음처럼 쉽게 되지 않지만 요즘의 나는 어떠한 문제든 그것이 나를 잡아먹지 않도록 몸과 마음의 체력을 계속해서 쌓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일상을 미루는 게 아니라 어떤 상황 속에서도 매일 조금씩 웃고 행복하고 건강을 챙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한다. 앞으로도 예상치 못한 괴로움은 나에게 닥칠 것이고 그 때마다 식음을 전폐하고 슬퍼하는 것은 나에게도 못할 짓이다. 문제 그 자체를 끊임없이 들여다보는 것보다 나 자신에 집중하고 나를 돌보는 힘을 기르는 것이 살면서 나에게 더 필요한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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