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 편
자연과 인간과 신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서양 문명 변화와 발전의 경로를 따라가 보았다. 비슷한 관점으로 동양의 길을 따라가 보고자 한다. 동양에는 강력한 유일신교가 없다. 초기 인류가 가졌던 애니미즘적 또는 샤머니즘적 종교의 관념이 종교의 전부가 아닌가 싶다. 세상과 인간을 창조한 조물주로서의 신에 대한 신화가 힌두교나 다른 종교에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매우 열려있는 구조이며 다른 요소들과도 쉽게 섞이고 절대적이지 않다고 느껴진다. 동양을 지배한 두 가지의 일종의 종교라 볼 수 있는 유교와 불교에 대해 들여다 보아도 절대적인 신은 없다. 유교는 애초에 종교가 아니었다. 인간학 또는 치세론의 일종이었다고 생각한다. 인간과 국가에 대한 탁월한 성찰을 바탕으로 어떻게 지배계층으로서 내면을 가다듬고 사회의 질서를 세우며 세상을 지배해야 하는가에 대한 매뉴얼과 같은 것이다. 지배계층 즉 군자 또는 대인배가 갖추어야 할 면모 가운데 '예'와 '법'을 익히고 실천하는 것은 피지배계층 즉 소인배의 무리와 차별화되는 중요한 지점이었다.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중요한 이벤트와 의식을 형식적으로 가다듬고 의미를 부여해서 그것을 '예'라고 하였다면 그 '예'는 사람이 태어났을 때, 성년이 되었을 때, 결혼했을 때,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와 같은 순간에 대한 해석이자 표현인 것이다. 그중 부모의 죽음은 부모의 삶이 자식에게 승계되는 근거가 되는 사건인 만큼 돌아가신 부모에 대해 극진한 예를 다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더욱 정당화하고 고양할 수 있는 것이었고 이것이 일종의 종교의 형식을 띠게 되어서 儒敎라는 유사종교적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유교에는 창조주도 조물주도 없다. 그냥 사후세계에 대한 인정과 죽은 자를 기리는 종교적 형식이 있을 따름이고 이것을 잘 알고 실천할수록 군자임을 입증하는 수단이었을 뿐이다.
고려시대 김부식이 믿을 수 없는 설화나 신화 등을 기록에서 배제하고 사실에 기반해 삼국의 역사를 기록했다는 삼국사기를 유교적 합리주의 사관이라고 표현할 만큼 유교는 귀신이나 사후세계 또는 초자연적 현상 등에 대한 관심과 언급이 없다. 현세의 삶 속에서 인간과 인간의 관계, 인간에게 주어진 도리, 국가와 국가의 질서에 대해 천착할 뿐이다. 성리학 역시 세상을 조금 더 철학적 사고 구조 속에서 이해해보고자 하는 노력이었지 종교적 성향과는 거리가 멀었다.
불교 역시 창조주와 같은 유일신교와는 거리가 멀다. 붓다는 탈인간화한 인간이다.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인간의 표상으로 사람들에게 어떤 지향점으로서 존재한다. 붓다의 길을 따르고자 한 인간들이 손에 잡히지 않는 붓다의 가르침을 형상화하고자 탑과 법당, 불상 등을 만들어 종교적 플레이스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특히 한국은 샤머니즘과 애니미즘 등이 마음껏 둥지를 틀고 들어와 기묘한 동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어찌 보면 동양은 매우 비종교적인 사람들이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 서구의 종교를 기준으로 본다면 종교란 유일신 창조주가 있고, 선과 악이 있으며, 천국과 지옥이 있고, 기적, 최후의 심판이 있는 것이다. 불교에도 극락과 지옥이 있고 미륵불과 같은 구원의 메시아 개념이 있지만 이것이 본래 부처의 아이디어는 아니었을 것 같다.
결국 동양에는 유일한 절대의 신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동양인의 사고 안에 유일한 절대의 선과 악도 없다는 의미이다. 그렇기 때문에 동양인에게는 언제나 하나의 길이 아닌 여러 갈래의 길이 있고 그중에 어느 길도 가장 올바른 길은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가장 빠르고 정확한 하나의 길을 만들어서 자연을 극복하고 이겨낼 신앙적 근거가 없다. 자연은 싸워서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 적당히 자리를 내주는 만큼만 차지하고 공존해 가는 것이다. 어느 자연에 어느 신이 깃들어 어떤 역사를 행할지 알 수 없으므로 조용히 지켜보고 주어지는 만큼 얻어내고 호들갑을 떨지 않는다. 동양인에게 도구란 자연을 이겨내기보다는 자연과 대화할 수 있는 수준의 수단이었다. 서구인은 자연을 잘라내고 뽑아내고 고정시키고 다시 확장시키기도 할 수 있는 수단으로써 도구를 만들고 발전시켰다. 선과 악을 가르는 유일한 기준이 있으며 그 기준이 자신들의 신이라 주장하는 서구인과의 만남은 그래서 동양인에게는 이해 밖의 영역이었을 것 같다. 그리고 단 하나의 기준을 가진 자와 다양한 기준을 가진 자가 거세게 부딪힌다면 단 하나의 기준을 가진 자가 힘을 발휘할 것이고 이런 강한 힘을 경험한 동양인들도 결국은 그 세계와 기준을 받아들이고자 몸부림치지 않았을까. 결국 종교의 차이가 힘의 차이로 이어졌으며 그 힘은 생명력과 직결될 수 있다는 점이 이제와서는 막강한 유일신교가 넘쳐나는 대한민국의 모습을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긴 세월 유일신에 연연하지 않고 자연에 맞설 생각도 하지 않았던 우리들이 신의 이름을 내세워 온 세상에 하나의 길을 만들고 자연을 통제하고 뒤틀어 (신이 아닌) 인공의 세계를 정신없이 구축하고 있는 서구인들에게 의미 있는 영향을 끼칠 때가 된 것도 아닐까 하는 싱거운 생각을 해본다. 여전히 힘의 논리는 우리를 압도하고 있으므로. 나 또한 서구인들이 만들어낸 인공의 산물인 장미와 튤립을 가꾸며 이런 상념에 빠지게 되었던 것 아닌가. 최초의 질문은 이것이었다. 서양인들은 자연을 길들일 생각을 어떻게 했지? 우리 한국인들은 농업의 신이라 할 만큼 심고 가꾸는데 탁월한 사람들인데 왜 중요한 씨앗이나 모종은 대부분 수입을 해야 하지? 왜 심고 가꾸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인데 멋진 원예도구 만드는 전통 있는 회사가 없지? 이런 생각들이 꼬리를 물면서 정원에서 해본 소소한 인류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