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만 더 성장하기도 하지
치앙마이의 여행을 통해 앞으로의 시간들을 잘 보내야겠다고 다짐했건만, 집에 돌아와서 그새 다시 풀어져버렸다. 인간은 얼마나 나약한지, 자꾸만 편안한 길을 찾고 싶어했다. 제일 시간을 많이 보내는 동반자는 남편이 아닌 폰이 되어 가고 있었다. 특히나 요즘 숏폼이 얼마나 눈과 귀, 그리고 내 정신을 끌어당기는지, 잠깐 누워서 폰 한 번 보고 나면 두세시간은 훌쩍 지나 있었다. 그렇게 해가 중천이 되면 아, 그냥 내일부터 다시 열심히 하고 오늘은 그냥 놀아야지, 하는 나날들이 반복이었다. 마음은 참 답답한데, 몸 한 번 움직이기는 게 왜 이렇게 어려운지, 분명히 10년간 정말 발에 불나도록 뛰어다니며 일해왔는데 풀어지는 건 한 순간인게 너무 야박하게 느껴진다.
바뀌지 않는 나 자신에 답답하던 차에(내 몸과 내 마음인데 왜 내 마음대로 안될까...라고 변명해본다.) 남편과 상의하여 속세와 단절된 삶을 살아보기로 했다. 일명 디지털 디톡스 여행. 바다가 보이는 숙소를 잡아서 크게 돌아다니지 않고 바다를 보면서 다이어리도 쓰고, 책도 읽는거다. 폰은 꺼 놓은 상태로. 스무 살 이후 폰 없이 살아본 적이 없어서 어떤 느낌일지 전혀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 책 7권을 눌러담은 캐리어를 끌고 제주도로 향했다. 그래도 치앙마이 때 혼자 한 번 떠났더니 이번에는 혼자 비행기 타는 게 덜 무서워진 게 느껴졌다.
우선, 숙소까지는 가야하니 폰의 지도를 의지해 세화로 가는 버스에 탑승했다. 내려서 걸어갈 때도 손에 있는 폰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세화는 제주 올 때마다 왔던 곳이지만 길치인 지라 골목은 여전히 어려웠다. 그렇게 숙소에 체크인을 하고 짐을 하나씩 풀었다. 벌써 저녁 시간이 되어 첫 날은 배달. 폰 화면 몇 번 클릭에 음식이 내가 있는 곳까지 오는 게 새삼 신기했다. 저녁을 먹은 후 앞으로의 내 계획을 전달하기 위해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 계획은 이러하다. 3일간 폰을 끄고 지낼 것. 단, 하루에 루틴을 지키기 위해(듀오링고와 경제 신문을 매일 보고 있었다.), 그리고 걱정하는 남편에게 연락을 하기 위해 폰을 켜는 시간을 한 시간씩 가지되 시간을 모르니 시간은 랜덤. 혹시 모르니 폰을 들고다니기는 하되 되도록 켜지 않으며, 마지막 날에는 켜고 싶은 때에 켜기. 그렇다, 폰이 없으니 시계도 없는 생활을 함께 하게 된 것이다. 폰이 없는 생활을 위해 근처 밥집과 카페도 손으로 지도를 그려보았다. 과연 나는 이 지도를 가지고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그렇게 푹 자고 일어난 후 둘째 날이 되었다. 가까운 곳에 자유 수영을 할 수 있다고 해서 찾아갔는데, 이게 무슨 일인지 열려 있는 문이 없다. 오늘 월요일인데 왜 문이 닫혀있지? 당연히 평일에는 열거라고 생각해서 알아보지도 않았는데, 주변에 지나가시는 분이 여기 스포츠센터는 월요일에 문을 닫는다는 것이다. 폰이 없으니 정보를 바로바로 검색할 수도 없어서 허탕을 쳐버렸다. 몇 시인지는 모르겠지만 배고파서 바로 옆에 있는 칼국수 집으로 들어가서 점심을 먹었다. 식당에 있는 시계를 보니 11시. 밥을 먹고 근처 카페 아무 곳이나 들어가서 책을 본다. 폰이 없으니 할 일이라고는 책 읽기, 다이어리 쓰기, 바다 보며 멍 때리기 이 세 가지다. 하필 돌풍이 아주 거세어서 모래알이 얼굴을 너무 때려서 돌아다니거나 산책은 불가능. 덕분에 책 두 권을 후루룩 읽었다. 숙소에 돌아와서도 여전히 날은 밝았다. 아늑한 숙소에 폭 안기듯이 낮잠을 한숨 자고 일어났는데도 여전히 밝다. 몇 시지? 폰 타임을 가져야겠다 싶어 폰을 켜니 다섯 시쯤 되었다. 해가 길어져서 좋다고 생각하며, 남편에게 카톡을 보내니 바로 전화가 왔다. 회사 아니냐며 막 웃었다. 내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단다. 할 일을 후딱 하고 다시 핸드폰 전원을 껐다. 해가 더 지기 전에 저녁을 먹으러 가자, 오늘 저녁은 내장탕을 먹어야지 하고 그림 지도를 꺼냈다. 다행히 용케 잘 찾아서 내심 뿌듯했다. 내일은 더 멀리 가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숙소에 돌아와서도 딱히 할 일은 없어서 침대 머리 맡 조명을 켜놓고 차 한 잔을 하며 책을 읽었다. '평화롭다'라는 말이 이럴 때 쓰이는 거구나 싶었다. 폰이 없어도 이렇게 잘 있을 수 있었는데 왜 그렇게 폰을 내려놓지 못하는 생활을 했을까.
셋째 날 아침이 밝았다. 어제 못 간 수영에 다시 도전했다. 다행히 열려 있어서 자유 수영을 하고 왔다. 아직 수영 초보라 자유형 한 번 가는 것도 어렵지만, 이제는 여행 와서도 수영을 할 수 있구나 싶은 마음에 내심 기뻤다. 스포츠센터에서 11시인 걸 확인하고 나온 후 점심으로는 두루치기를 도전해 보려고 했다. 어제보다는 멀고 복잡한 길을 가야했다. 그림 지도를 보고 걸어가는데, 이 쯤에서 분명 나와줘야 하는데 아무리 봐도 가게가 안 보이는 거다. 주변을 한 세 바퀴쯤 돌다가 우연히 이정표가 되는 경찰서를 발견했다. 바람은 정말 매섭지, 길은 모르겠지, 진짜 눈물날 것 같은데 괜시리 오기가 생겼다. 분명 이 쯤에는 두루치기 집이 있어야 할텐데 보이지 않아서 포기하고 돈까스 집으로 갔다. 가게에 들어서니 어느 덧 12시가 넘어있었다. 이 작은 동네에서 한 시간을 헤맸다니 배고플 만도, 돈까스는 진짜 너무 맛있었다. 다시 길을 되짚어서 돌아와보니 갈래길에서 길을 잘못 들어섰다는 걸 알았다. 내 그림 지도가 부실했던 것이다. 그러고 카페에 들어갔는데, 카드 단말기가 고장났다며 현금 영수증도 해줄테니 현금 이체만 가능하다고 했다. 그러고보니 폰이 없으니 현금 이체도 안되는구나, 정말 폰 없이는 살 수 없는 현대 사회다. 다른 카페에 가서 또 천천히 다이어리를 쓰고 책을 읽으며 하루를 마무리 했다. 조금은 심심하단 말이 절로 나왔다. 책을 정말 종류별로 다양하게 들고갔기에 망정이지 책 한두권만 들고 갔으면 심심함을 견디는 게 어려웠을 거다.
넷째 날, 디지털 디톡스를 끝내는 날. 그 동안의 시간처럼 근처에서 점심도 먹고, 카페에서 책도 읽고 하루를 꽤 알차게 보냈다고 생각하고 폰을 켰는데 아니 두 시밖에 안 된 것이었다. 3.5일의 시간동안 책은 거의 5권을 읽었다. 폰을 보지 않으니 하루를 정말 알차게도 보낼 수 있었는데, 그 동안 난 뭐했을까 약간 허탈한 마음도 들었다. 폰이 없으니 단순히 숏폼을 못보고 시간을 모르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지도도 없고 정보 검색도 못하고 계좌 관리도 할 수 없는, 현대 사회에서의 생활이 되지 않음이 너무 절실히 느껴지는데 어떻게 하면 내가 스마트폰의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니라 지혜로운 폰의 주인이 될 수 있을까 고민이 되었다. 그러고는 바로 두 시간을 폰을 보는데 써버렸다. 폰을 꺼놓은 사이에 그 날 따라 부재중 연락도 많이 와 있었고, 남은 제주도에서의 하루를 보내려고 이것저것 검색하고 찾다보니 또 옆길로 살짝 새기도 하다 보니 시간이 또 훌쩍 지나버렸다. 정말 스마트폰은 애증의 존재다.
그렇게 제주에서의 5일을 보내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여전히 스크린 타임은 하루 평균 몇 시간을 훌쩍 넘기기 일쑤이지만, 바다를 보며 스마트폰 없이 오롯이 몰입한 경험은 다시금 마음을 잡는데 힘이 되어 주었다. (실제로 이전보다 스크린 타임이 조금 줄긴 했다.) 제주에서 천천히 바닷가를 거닐며 들었던 생각은, 왜 유명인사들이 생각주간을 가졌는지 이해가 된다는 것. 일상을 정말 바쁘게 살다가 휴식의 시간에 충분히 쉬면서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이 꼭 필요하겠다는 것. 그 말은, 그만큼 일상에서 열심히 살아야 쉼이 쉼다울 수 있다는 것. 치앙마이에서의 생각이 반복되는 것 같아 조금 부끄럽긴 하지만(인간은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니까요) 그 동안 여행 혹은 휴가라고 하면 매일 열심히 돌아다니기만 했던 여행에서 벗어나 진짜 쉼, 진짜 생각 주간을 경험한 것에 의미가 있었던 시간이었다.
그리고 이것도 역시 백수여서 답답하다고 훌쩍 떠나는 게 가능했을 일. 24시간을 더욱 알차게 채워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