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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이 Feb 18. 2018

지금의 나를 만들어낸 잡지

01 잡지


#1-2  잡지: 지금의 나를 만들어낸 자그마한 취향들

    /10대에서 20대까지, 잡지화 함께 자란 시간의 의미







무슨 바람이 불어 갑자기 미니멀리스트가 되겠다고 책장 정리를 했다.



역시나 옛날 물건이 나올 때마다 추억에 빠져 구경하느라 진이 다 빠졌을 때였다. 몇 년 전 한창 모았던 독립잡지들이 튀어 나왔다. 전주에서 사왔던 것도 있고, (지금 생각하면 너무 미안할 정도의 글 실력이지만) 얼떨결에 첫 기고를 하고 받았던 것도 있고, 돈이 없어 신중하게 선택했던 하나의 것도 있었다.


보자마자 미소가 지어졌다. 뭐 대단한 거라도 하는 것 마냥 매의 눈으로 독립잡지를 찾아다녔던 그때, 우리도 잡지를 만들겠다며 매번 기획회의만 하다가 끝이 났던 그때, 기성 잡지와 다른 글과 형식을 보며 나의 부족함을 한없이 탓했던 그때가 순식간에 펼쳐졌다. 온 열정을 쏟아 부었던 나의 청춘들. 당시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하니 반짝반짝 빛나던 순간들이다.






'아무튼 잡지'의 도입부는 취미를 묻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작가는 ‘잡지 읽는 거요'라고 대답했다. 이 두 가지만으로도 내 마음이 활짝 열리기에 충분했다. 최근 내가 생각했던 '취미와 좋아하는 것'의 차이와 일맥상통했다. 무엇보다 이 문장을 보는 순간 '취미는 잡지'였던 그동안의 내가 파노라마처럼 흘러갔다. 미친 듯한 연예계 호흡 속 잠시 잊고 있던 그때의 나, 그리고 지금의 나를 만든 나.


내용을 읽어 내려가면서 생각했다. 넉넉잡아 근 20년의 세월이 지났다. 목숨같이 여기던 ‘엘르걸’과 ‘보그걸’은 폐간했고, 잡지 매대에는 사람 하나 없다. 명품이 가득한 패션지보다 일상에 스며든 감성잡지들이 인기를 얻으며 트렌드도 확 바뀌었다.



 
나는 대체 왜, 결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온몸으로 변화를 겪고 충격을 견디면서까지 잡지의 로망을 버리지 못한 걸까?



'아무튼 잡지'의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그것뿐이다. 너무나 사소한 정보를 읽어 내려가면서, 잡지를 보는 동안 내 방식대로 시간을 실컷 낭비하는 기분으로 안도하면서, 손 안에 쥔 돈으로는 당장 가질 수 없지만 아름답고 견고한 질 좋은 물건들을 보면서, 아주아주, 정말 아주아주 조금씩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가는 기분을 느낀다. 그게 전부다. 하지만 이런 감각이야말로 살아가는데 필수적이라는 것, 그래서 잡지 읽기야말로 취미에 꼭 알맞은 일이라는 것을 이제 안다"
   - '아무튼 잡지' , 황효진


그렇다. 내가 수많은 잡지의 문턱을 넘으면서 느꼈던 허세는 그 감각을 찾아낸 스스로에게 느끼는 뿌듯함이었다. 좋아하는 것을 찾아가는 여정이 바꾸어놓은 사소한 것들에 느끼는 만족감이었다. 작가의 말대로 잡지가 세상을 바꿀 거라곤 지금도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잡지가 우리의 '일상'을 바꾼다고는 여전히 믿고 있다.


이런 생각은 컨셉진의 김경희 편집장도 마찬가지였다. 컨셉진의 김경희 편집장은 반디앤루니스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런 깨달음은 살면서 느꼈던 작은 순간들을 모아보니 나왔다고 한다.


"우리의 일상은 대단히 큰 것들이 아닌 아주 작은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해요. 1년에 한 번 큰돈 모아 여행갈 때도 물론 행복하겠지만, 하루하루 일상에서 마주하는 순간들을 조금씩 변화시킬 때 우리 삶 전체가 행복해지는 거라고 믿고요. 어디서 사은품으로 받은 컵을 사용할 때보다 내 취향이 담긴, 내가 좋아하는 디자이너의 컵을 사용할 때 기분이 조금 더 좋지 않나 하는 거죠"
    - 반디앤루니스 김경희 편집장 인터뷰 中




우리는 의도치 않은 일상을 살아가야 하는 상황에 놓인 채 자란다. 엄마가 입혀주는 대로 옷을 입어왔고, 하얀 벽지에 감성 돋는 사진 몇 장을 붙이고 싶어도 촌스러운 무늬가 담긴 벽을 바라보며 살아야 했다. 예쁜 이불을 사고 싶어도 왠지 이불이나 책상 같이 큰 건 허락을 받고 사야 할 것 같은 의무감에 포기한 적도 있다. 그런 환경에서 내가 스스로 원하는 것을 구경하고 고르고 알아가는 행위는 나의 주체성을 확인하는 길이다.


지금도 엄마는 주섬주섬 택배를 뜯는 나에게 '컵이 이렇게 많은데 뭐 하러 또 사냐'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물을 먹을 때, 주스를 마실 때, 커피를 마실 때, 심지어 기분에 따라 컵을 골라 마신다. 지금도 비록 2만원도 채 되지 않는 저렴한 찻잔에 커피를 마시고 있지만, '카페베네' 따위가 쓰여 있는 컵이 아님에 다행이라 여기고 있다. 이것이 바로 사소한 취향이 가져오는 부유함이다.


이 사소한 취향이 만들어지고, 내가 예민하게 이를 알아채게끔 한데에는 잡지가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관심사에 따라 보는 잡지가 달라졌고, 그 잡지의 내용에 따라 일상을 변화시켜나갔다.




한 마디로 잡지는 변해가는 취향의 변천사를 담은 책이자, 지금의 나를 만들어낸 장본인이다.



가끔은 첫사랑 같다고도 생각한다. 그때의 나로 돌아갈 수 없지만 추억하는 이유는 그 시절의 내가 그리워서라는 첫사랑, 풋풋한 시절의 감정과 생채기로 인해 더 성숙한 사랑을 깨닫게 해주는 첫사랑, 내게는 잡지가 그렇다.


초등학생 때부터 대학생 때까지 잡지를 읽었다. 중학생 때 정했던 에디터의 꿈은 실제로 대학교 재학 시절까지 이어졌다. 물론 나는 지금 꿈에도 생각지 못한 연예부 기자를 하고 있다. 더이상 잡지를 매달 구매하는 일도 없다.


하지만 나는 왜 네이버가 좋아하지는 않아도 '남는 글'을 추구하는 매체에서 콘텐츠를 고민하고 있다. '잡지'라는 말에 덜컥 이끌려 '아무튼 잡지'를 손에 넣었다. 그 책을 읽다가 나의 기억들이 걷잡을 수없이 두둥실 떠올라 이렇게 글을 쓰기까지 이르렀다. '한 번 연재를 해보자' 싶어 만들어 둔지 오래인 카테고리의 첫 글이 됐다. 심지어 수다쟁이처럼 세 페이지 반이나 썼다. 이렇게 잡지는 내 게으름까지 물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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