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ol@행화촌 38. 가위
천우신조로 간신히 대학에 입학했지만 공부는 여전히 하기 싫었었다.
전공과목 교수님은 마주칠때마다, '야, 놀고먹는 대학생!'이라는 불러 세웠고 그때마다 뒷산으로 줄행랑을 쳤다. 6월의 볕은 피곤하지도 않은 청춘에게 잠을 선사했다. 읽지도 않는 전공책으로 얼굴을 덮으면 순식간에 '레드 썬!'.
같은 과 친구들이 수박밭 한가운데 세워진 원두막에 둘러앉아 대화를 하고 있었다. 나는 무릎까지 자란 수박밭을 거닐다가 원두막으로 오르는 계단을 잡았다. 한 계단, 두 계단 드디어 계단 끝에 이르렀는데 교수님이 나를 노려보았다.
눈에는 수박물처럼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고 그 커다란 손으로 내 얼굴을 잡으려고 하셨다. 마치 영화 [곡성]에서의 한 장면처럼 몹시 후들거리는 상황이었다. 교수님의 핏기 어린 눈동자와 입에는 뭘 드셨는지 붉은색의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너무 놀라서 손을 뻗어 교수님의 머리를 밀었다. 그랬더니 머리가 몸에서 뚝 떨어져 내려 원두막 아래로 떼굴떼굴 굴렀다.
'으아아아아~'
아무리 눈을 뜨려고 애를 써도 눈이 떠지지 않았다. 살려달라고 소리를 질렀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고 손과 발이 꽁꽁 묶인 것처럼 옴짝 달짝 못하고 책에 덮여 동산벤치에 조용히 누워있었다.
그게 처음 겪은 '가위눌림'이었다.
여러 개의 F를 만회하려고 여름특강까지 들어가며 간신히 졸업장을 받고 나서는 운 좋게 취직을 할 수 있었다. 실력으로 취업에 성공했다기보다는 면접에 지친 면접관의 실수가 아니었나 싶다.
합격 이후에 만난 부장님은 교수님보다 더 무서웠다. 두주불사에 호통대장이라고나 할까. 일할 때는 기차 화통 삶아 먹은 듯한 호통을 견뎌야 했고 퇴근길에는 무한반복되는 인생사를 들으며 술을 따라야 했다.
어느 화창한 날이었다.
"어이, 신입. 잠실에 이 서류 좀 전달하고 와."
당시 직장이 명동에 소재하고 있어서 을지로 입구 역에서 순환선인 2호선을 쉽게 이용할 수 있었다. 거래처에 서류를 전달하고 밥도 먹고 다시 사무실로 돌아오기 위해 순환선에 올랐다. 점심시간이 지났는데도 지하철 2호선은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다행히도 내 앞에 앉아계시던 아주머니가 성수역에서 하차. 아주머니가 뜨끈하게 데워놓은 자리에 앉자 부장님의 명을 잘 수행했다는 안도감과 더불어 식곤증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스르르르...
갑자기 졸고 있는 내 앞으로 부장님의 큰 얼굴이 다가왔다. 광기를 잔뜩 품은 눈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꼼짝도 않는 손을 가까스로 뻗어 부장님의 얼굴을 밀어내려고 애를 썼다. 힘을 주어 눈을 떴지만 눈꺼풀이 얼마나 무겁던지 다 떠지지 않고 흰자위만 들어갔다가 나왔다가를 반복했다. 살짝 벌어진 입에서는 맑은 침이 뚝뚝 떨어지고 들릴 듯 말듯한 신음소리만 새어 나왔다.
'부당님, 여디더 이더디면 안대오... 데발, 달러두데오...'
신기한 건 그런 몽중에도 주변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는 사실이다. 이상한 자세의 나를 본 승객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모기소리처럼 가는 목소리들이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어머머, 이 사람 미쳤나 봐."
"엄마, 저렇게 죽는 거야?"
"좀비야?"
승객들은 나를 깨울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구경만 했다. 그 사이에 나는 죽기 살기로 부장님과 사투를 벌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순환선은 돌고 돌고 사람들은 더 타고 안 내리고 구경거리 좋고... 정말 끔찍하고 무서운 시간이었다.
예상시간보다 늦게 사무실에 도착한 나는 부장님에게 바가지로 욕을... 아우!
퇴근 후 부장님에게 술을 따르며 또... 아으! 둑고디퍼!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그분들이 그랬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