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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욜 MaYol Dec 21. 2024

소년

mayol@mars #10. 더 멀리

블타바강을 가로지르는 까를교는 낮부터 늦은 밤까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교각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성상들이 세워져 있었는데 사람들은 성상에 입을 맞추거나 손을 대고 기도를 했다. 저렇게 해서 염원이 이루어진다면, 만약 그렇다면, 나라고 못할 일은 아니었다.

닳을 대로 닳은 네포무크 Nepomuckeho성상의 발등에 손을 올리고 기도를 했다.


'당신이 누군지는 관심이 없수다. 나는 그저 내 여자를 찾고 싶을 뿐이오. 그러니 내 소원을 들어주시오. 만약 그녀를 찾을 수 있게 된다면 다시 당신을 찾아와 큰 절을 올리겠소. 잊지 마시오. 그녀의 이름은 베체로프카니까.'


그렇게 기도를 하고 있는데 한 노파가 다가와 귓속말을 했다.


"이봐요, 젊은이. 이 동상에 대고 기도를 하면 애를 낳는다는 데 어쩌려고 그러시우."


세상이 이렇다. 기도도 마음대로 못하게 하는 이놈의 지구.

노파의 말에 화들짝 놀라 성상의 발등에서 손을 내리고 부정을 털기 위해 양손을 맞잡고 막 비볐다. 내가 아이를 낳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 모습을 본 노파가 입꼬리를 올리며 다시 말했다.


"에구머니나. 성상 발등에 댄 손을 다른 손에 비비면 둘이에요. 둘!"


내가 물러서자 노파가 성상의 발등에 손을 얹고 기도를 시작했다. 남의 간절함에 찬물을 끼얹으면서도 죄책감이라고는 전혀 없는 망할 놈의 할망구. 빨아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는 축 처진 가죽과 하얗게 색이 바랜 이기적인 눈동자. 하지만 더 이상의 사고는 피해야 했다. 노파를 노려보다가 돌아서서 다리를 건넜다.

다리를 건너자 극장 입구에 낮은 입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Il Dissoluto Punito ossia il Don Giovanni Dramma giocoso in due atti 돈지오반니. 인형극으로 재탄생!!]


모차르트가 곡을 완성하자마자 자신의 나라도 아닌 프라하에서 초연했던 돈지오반니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프라하 시민들은 마치 모차르트의 고향이 프라하인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고 급기야는 인형극까지 만든 모양이었다.

삐그덕 소리를 내며 좁고 어두운 계단을 오르자 까만 천이 문을 가리고 있었다. 공연장안으로 들어서니 무대 뒤에서 인형들을 점검하고 있는 극단의 단원들이 머리까지 감싼 까만 옷을 입고 분주하게 오가고 있었다. 계단식 공연장의 중간쯤에 자리를 잡고 앉아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창문 사이로 스며든 햇볕으로 공연장의 먼지들이 날아다니며 반짝거렸다.

앞 좌석에 턱을 괴고 물끄러미 텅 빈 무대를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무대 뒤에서 인형을 만지작거리던 연기자가 고개를 내밀고 소리쳤다.


"손님, 공연 끝났어요."


젠장!  잠시의 여유도 허락하지 않는 세상이었다.

입장할 때 티켓을 달라는 사람이 없더라니.

어쩌면 인형극을 보지 못한게 다행일수도 있었다. 남의 여자를 빼앗는 바람둥이 돈지오반니가 결국 벌도 받지 않고 끝나는 이해불가의 공연이었으니까. 만약에 그 공연을 봤다면 내 여자를 빼앗아 간 스파운이 떠오르면서 돈지오반니 인형을 만지작거리던 연극단원을 물어죽였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시 골목길로 내려와 광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광장에는 시계탑의 종이 울리기 기다리는 사람들이 모여서 발을 동동 구르며 추위를 견디고 있었다. 사람들이 신은 신발들을 보고 나니 내 구두가 눈에 들어왔다. 여기저기 헤지고 낡아서 신발구실이나 제대로 할까 싶을 정도였다.

광장을 지나 골목길로 접어들자 구두가게가 나왔다. 가볍고 디자인이 옅은 회색의 날렵한 바타 bata구두를 집어 들고 점원에게 다가섰다.


"저, 이 구두가 어떤 색입니까?"

"브라운입니다."

"브라운이라... 그럼 제 옷은요?"


점원이 이상하게 쳐다봤다.


"제가 색을 잘 구별하지 못합니다."

"아, 그러시군요. 지금 손님이 입으신 정장은 검은색이에요. 코트도 마찬가지고요. 진정한 멋쟁이라면 브라운구두를 신으셔야죠. 그런 옷에 까만색 구두를 신는 건 구두에 대한 그리고 옷에 대한 모욕입니다."


오늘 하루 중에 가장 듣기 좋은 말이었다. 값을 치르며 신던 구두는 버려달라고 부탁을 했다.

어쩌면 인간의 몸으로 살면서 가장 마음에 들어 했던 구두가 아니었나 싶다.

새 구두를 신고 광장으로 나오자 사람들의 시선을 한 눈에 받고 있던 시계탑이 돌면서 종을 울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을 지나쳐 까를교를 다시 건널때였다. 다리 중간에 여자 구두 한 짝이 올려져 있는 게 보였다. 새 구두였다. 다른 한 쪽 구두가 어디에 떨어져 있나 주변을 살펴보았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뭐지. 한 쪽 구두만 벗어놓고 강물에 몸을 던졌다?'


세상에는 별의 별 사람들이 다 사니까 그럴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우울한 여자가 까를교에서 못다한 소원을 빌고 물로 뛰어들었다면 뉴스거리가 될까. 기왕이면 다 벗어놓고 뛰지...

이런저런 생각으로 구두를 만지작 거리는데 경관 둘이 호르라기를 불며 나를 향해 뛰어오는 게 보였다. 검문이라도 당하는 날에는 난처한 상황에 빠질 게 뻔했다. 다리에서 빤히 보이는 하숙집으로 도망쳐 달려 들어갔다가는 '날 잡아듭쇼' 하는 꼴이었다.

어쩌지… 0.5초.. 0.7초... 에라! 여자의 구두를 집어들고 차가운 블타바강으로 뛰어들었다.

구두를 가지고 물로 뛰어든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베체로프카에게 잘 어울릴만한 구두라는 생각이 들었던 게 분명했다. 이런것도 사랑이라면 사랑이겠지. 물론 그녀 성격상 나머지 한짝도 찾아오라며 성화를 해댔겠지만, 하하.

송치로 만든 힐이었다. 이런 고급 구두를 버리고 물에 뛰어들다니... 닳아서 떨어질때까지 신다가 뛰어 들어도 누가 뭐랄 사람 없는데... 대단한 용기를 가진 여자가 아니었을까.

하류까지 내려갔다가 젖은 몸으로 하숙집으로 이어지는 강가의 작은 언덕을 올랐다.

왠지 기다리는 사람도 없는 하숙집에 들어가기가 싫은 날이었다.

젖은 구두를 내려놓고 가고일이 내려다보고 있는 강가에 앉아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




매서운 바람에 나뭇가지들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내 몸은 아직도 버드나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땅에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이리저리 둘러봤지만 너른 초원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저만치에서 소녀가 망토를 걸치고 초원으로 들어오는 게 보였다. 나는 나뭇가지를 높이 쳐들고 소녀에게 손짓을 했다.


- 여기야, 여기!


평소 같으면 반가워하며 뛰어왔을 소녀는 내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어두운 모습을 하고는 머뭇거리기만 했다. 그러더니 망토를 휘감으며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내게 달려왔다. 차갑고 무섭게 느껴졌다. 나는 소녀의 모습에 공포심을 느끼고 펼쳤던 나뭇가지들을 모아 얼굴을 가렸다. 하지만 나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소녀는 나뭇가지들을 부러뜨리면서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내 얼굴을 가리고 있던 나뭇가지들이 힘없이 꺾여 땅에 떨어지자 소녀는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설명할 수 없는 분노와 흥분이 느껴졌다.


- 너 갑자기 왜 그래. 무섭게.


잠시 숨을 고르던 아이가 망토를 벗어던지자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내아이의 얼굴이 나타났다. 너무 놀라 나무밑동부터 떨리는 게 느껴졌다.


- 어, 어... 너 누구야.


핏기 없는 얼굴에 검푸른 빛을 띠고 있던 소년은 갑자기 심장을 울리는 듯한 낮고 깊은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  Ich liebe dich, 네가 정말 좋구나
-  mich reizt deine schöne Gestalt ; 사랑스러움에 눈을 뗄 수가 없어
-  Und bist du nicht willig, so brauch ich Gewalt 싫더라도 너를 데려가야겠다
 
- Mein Vater, mein Vater, 아빠, 아빠
- jetzt fasst er mich an! 저를 끌고 가려고 해요
- Erkönig hat mir ein Leids getan! 마왕이 저를 괴롭히고 있어요
 
- Dem Vater grauset's, er reitet geschwind, 아버지는 공포에 질려 말을 더 빨리 몰았다
- Er hält in Armen das ächzende Kind, 신음하는 아이를 팔에 안고서
- erreicht den Hof mit Mühe und Not; 겨우 농장에 도착했을 때는
- In seinen Armen das Kind war tot. 사랑하는 아들은 이미 품 속에서 죽어있었다.


노래를 마친 소년은 밀려들어온 어둠과 함께 시나브로 사라졌다.




식은땀을 흘리며 일어났지만 한참 동안 낯선 소년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빠져나가지 않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노래는 슈베르트가 스파운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듣고 작곡한 <마왕>이었다.


'망할 놈의 스파운 자식. 잡히기만 하면 나무에 매달아 까마귀가 그 가벼운 입부터 쪼아 먹게 놔둘 거야!'


이튿날부터 내 안에서는 예기치 못한 변화가 시작되었다.

버드나무에서 인간이 된 후 다시 정상적인 모습으로 돌아오기 위한 변화를 겪긴 했어도 그건 몸의 변화였지 내면의 변화라고 볼 수는 없었다.

한밤중 강가를 거닐다가 혼자 있는 사람을 붙잡아 목덜미에 송곳니를 꽂으면 달콤했어야 할 신선한 피가 죽은 생선처럼 비릿한 냄새를 풍겨 입맛이 사라지곤 했다. 그저 힘을 비축하기 위한 생존행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평소에는 쳐다보지도 않던 사탕이며 슌카 그리고 슈비치코바 같은 음식들에 자꾸만 눈길이 갔다. 하루하루 비위가 달라졌다.

다음 날 아침에는 하숙집의 창문을 열자 파란 하늘과 흰 구름이 눈에 들어왔다. 까를교와 강가 주변으로 산책을 나온 사람들의 옷 색깔이 구별되었고 추위를 견디고 서있는 초록의 나무숲이 보였다.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 있을 때만 구별되던 색이 갑자기 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길로 나서며 구두를 보았다. 브라운 색의 구두는 상상했던 것보다 멋졌다. 구두가게의 종업원 말대로 검은 슈트와 잘 맞아떨어지는 색이었다.


그 시절 유럽전역은 러시아, 헝가리, 오스트리아 등의 패권다툼으로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도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고 있던 체코는 프라하 언어학회를 중심으로 [언어문화이론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었다. 독일어의 영향을 받고 있던 체코어의 전통을 온전히 보전하고 지키고자 했던 운동이었다.

길거리마다 체코어를 지켜야 한다는 대자보가 나붙었고 신문들도 앞다투어 관련 기사를 내보냈다.

술렁대는 강가에 더 머물렀다가는 침착함을 잃고 돌출행동을 할 것만 같아 프라하성 위쪽의 산동네로 숙소를 옮겼다. 골든레인이라고 불리는 아담한 산동네였다.

성에서 관리하던 작은 감옥이 산 중턱에 있어서 가끔 고문을 견디지 못한 누군가의 비명소리가 유령의 흐느낌처럼 들려오긴 했지만 비교적 정숙함을 유지하는 곳이었다. 마차가 지나다닐 수도 없이 작게 이어진 골목길은 산 정상을 감싸고 다른 마을로 이어졌다.


산 위로 이사한 이후에도 이상한 꿈은 계속되었다.

이른 새벽 허공을 휘저으며 잠에서 깬 나는 몽유병 환자처럼 잠옷바람으로 골목길로 뛰어 나갔다. 그리고는 감옥으로 가는 길과 마을로 갈라지는 골목길 벽에 낙서를 했다. 내 손은 마치 누구의 지시를 받는 것처럼 저절로 움직였다.


[Gibs ouf, gibs ouf! 포기해, 포기하라고!]


내가 써 놓고도 그 의미를 알 수가 없었다. 더구나 내 글씨체도 아니었다. 해가 뜨는 줄도 모르고 벽에 쓴 낙서를 바라보고 있었다. 비도 오지 않는데 우산과 액세서리를 잔뜩 짊어진 건장한 남자 하나가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지만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당신도 언어문화이론 운동가요?"


번쩍 정신이 들었다.


"네? 아, 아닙니다."

"잠옷 차림으로 나대기에는 너무 추운 날씨 아니오? 그나저나 뭘 포기하라는 말입니까? 나 같은 유태인은 살기를 포기하라는 말입니까 아니면 유태인을 없애는 건 불가능하니 이제 그만 포기하라는 말입니까?"


가시돋힌 말을 하고는 위아래로 나를 훑어보았다.

후즐근하게 무릎이 나온 잠옷과 올이 나간 소매에 헝클어진 머리. 내가 봐도 새벽에 길에서 쉽게 마주칠 수 있는 옷차림은 분명 아니었다. 의연한 척 해야했다.


"하하하. 말씀을 재미있게 하시는군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왜 이런 낙서를 했는지..."


사내는 내 옷차림과 낙서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불쑥 두터운 손을 내밀었다.


"아무튼, 제 이름은 헤르만입니다. 헤르만 카프카. 저 골목에서 액세서리나 잡동사니를 팔고 있지요. 우리 같은 유태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이런 일뿐이죠."

"아, 그 가게 말씀하시는군요. 지나다가 봤습니다."

"언제고 한 번 놀러 오세요. 겉옷은 입으시고요. 그렇잖아도 마을에 낯선 사내가 나타났다는 말들이 있었는데 이렇게 뵙네요. 어디에서 오신 분이요? 동양에서 오셨나요?"

"네, 그런 셈이지요. 아주 먼 길을 돌아왔습니다."

"이름이?"


수배자로 등록된 이름을 밝히기가 꺼려져 처음 슈베르트의 아버지 테오도르에게 말한 이름을 댔다.


"네. 빅토르입니다."

"빅토르 씨. 그래요. 그럼 이만."


헤르만은 무거운 지게를 어깨에 메고 다시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며칠 지나지 않아 프라하를 떠나기 전에 헤르만의 가게에 들러 체코 전통 피리와 새총을 샀었는데 내 취향의 물건들은 아니었다. 왠일인지 자꾸만 손이 갔더라는 말 밖에 달리 할 말이 없다.

오랜 시간이 지나 자석에 이끌리듯이 다시 그곳을 찾아갔다. 아쉬웠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어쩌면 그것들이 나를 견디게 해줬던 부채가 아닐까.

몽유병환자처럼 뛰어나가 왜 그런 낙서를 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포기하라니. 베체로프카를 포기하라는 말일까 아니면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내 삶에 대한 연민을 포기하라는 말일까.

힘멜포르트그룬트를 떠나온 이후 밤이고 낮이고 단 한 순간도 그녀를 잊은 적이 없었다.


'몸은 괜찮을까. 그 놈이 베체로프카를 건들였을까. 그녀가 순수히 그놈에게 잠자리를 내어줬을까. 나를 아직 사랑하고 있을까.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


그녀에 대한 번민으로 그곳에서도 점점 견디기가 힘들어졌다. 설상가상으로 파리에서의 살인사건이 프라하에도 알려지면서 수배령이 나붙기 시작했다. 경관 하나를 처리한다고 진정될 상황이 아니었다.

더 먼 곳으로 떠나야 했다.

오랜 시간이 흐른후에 이곳에서 어떤 만남이 기다리고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채 러시아의 깊숙한 숲 속으로 숨어 들어갔다.


-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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