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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근아 Dec 28. 2023

디자인은 탐정놀이다.

메이페이퍼 ㅣ 호주 디자인은 _____ 이다. ㅣ 01

고치고 또 고치고

왼쪽으로 0.1 mm 이동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아니! 다시 제자리로! 

 

심각한 표정으로 스크린만 빤히 쳐다보고 있다. 누가 보면 같은 화면을 계속 보고 있다 하겠지만, 난 몇 시간째 디자인을 수정 중이다. 0.1mm 이동 하나만을 가지고 이랬다 저랬다 변덕을 부리는 중이다. 색상의 톤을 이랬다 저랬다 시뮬레이션을 짜볼 뿐이다. 수십 번 아니 수백 번씩 바꿔보고, 최고의 라인과 색상을 찾느라 나의 신경이 곤두서고 있는 중이다.


몸은 흔들흔들

고개는 까닥까닥

기분은 출렁출렁

이리 좋을 수가.


디자인 과제를 밤새 완성하여 제출하곤, 줌 수업에 홀가분한 마음으로 로그인해서 들어갔다. 강사는 언제나 음악을 틀어놓고 학생들을 기다린다. 오늘은 힙합이다! 이날은 나도 과제를 끝냈다는 마음에, 처음 들어보는 힙합 노래임에도 불구하고 내 맘대로 흥얼흥얼 따라 불렀다. 오랜만의 자유의 시간이다! 카메라를 끈 채, 나만의 축제를 만끽한다. 내가 디자인했던 축제(EAT Festival)를 즐기는 기분이다.


기대되고, 

흥분되고, 

살짝은 두렵고, 


첫 번째 과제를 제출한 후, 다시 두 번째 과제를 기다리고 있었다. 


미션을 확인하고, 

상황을 파악하고, 

주변인물을 탐색하고.


디자인 과제를 받을 때마다, 나는 탐정놀이를 시작한다. 사건을 하나하나 파헤치고, 실마리를 찾아 범인을 찾아 나서는 거다. 탐정들의 벽을 상상해 본다. 보드에 모든 정보를 수집하고, 연관성을 찾아 빨간 실로 연결한다. 그 보드판을 멀리서 보고 가까이서 보다 보면, 유레카!! 의 순간이 온다. 쾌감, 희열, 굉장한 흥분의 순간이다.

 

내 디자인의 컨셉을 찾았다!! 그대로 나의 디자인을 만들러 가면 된다!



페이지 구성을 하고 링크방향을 설정한다.



하지만, 

이건 아니지.

완전 배신이지.

완전 허탈이지.

진짜 탐정놀이 하자는 거야? 


“고객이 변덕스러워서, 요구사항이 모두 바뀌었다. 다시 다 고쳐라! 단 컨셉은 그대로다” 웹디자인 강사의 한 마디에 이날도 어안 벙벙이었다. 미션을 던져놓고, 혼자 실실 웃고 있다. (나랑 동갑이었던 강사) 얄밉다.


내가 밤새서 작업한 내 디자인을 완전 다른 포맷으로 고치라니. 그 5분 사이에 난 실패자가 된 기분이었다. 그 강사의 한마디에 내 디자인은 생명의 가치를 잃었고, 쓰레기통으로 내동댕이 쳐지는 취급을 당했다.


당황스럽고 막연하고 앞으로 6주가 까마득,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 1분이라도 내 디자인을 내 앞에 붙들고 있고 싶었다. 


이런저런 이유를 대면서 내 디자인은 괜찮지 않냐고 설득하고 싶었다. 좀 더 발전시키면 더 나아지지 않을까? 강사를 설득하고 싶었다. 이제 막 태어났으니, 조금만 더 더 성장시키고 싶었다. 




그래! 그렇다면 진짜 탐정놀이를 해보자! 내 욕심은 내려놓았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 다시 나의 디자인을 바라본다. 신기하게도 과제를 제출할 때는 모든 것이 사랑스럽게 보였는데, 이제는 진짜 생명을 잃은 걸까. 디자인이 맥아리가 없다. 문제점 투성이다. 작전을 짜야한다. 


먼저, 내 앞에 보이는 문제점들을 하나하나 파헤치고, 해결방안을 찾아보자!


메인 페이지의 칼라가 좀 더 축제스러워야 하고, 

너무 정보가 많으니, 중요한 것들만 중앙에 보이게 하고, 

조명의 컨셉을 좀 더 강조하기 위해 노란색을 더 배치시키고, 

서브 페이지는 좀 더 칼라풀하게 바꾸고, 

나만의 시그니쳐 포인트를 넣고, 

...



두 번째, 고객이 변덕 부린 추가 요구사항! 기존의 사이트에 넣는 방법을 찾아보자!


소셜미디어이 연동되어 메인에 보이게끔 하고, 

아래쪽에는 다른 축제 세 가지를 같이 홍보해 주고,

서브 페이지 4개를 추가하고, 

블로그 페이지를 추가하고, 

맨 아래에는 티켓 판매로 이어지는 링크 버튼을 만들고, 

...


빈틈이 보이지 않았지만, 원래 나의 디자인을 찢어 조각을 낸 후, 추가된 새로운 조각들을 넣고, 다시 조각을 맞추는 상상을 하니 큰 그림이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전혀 상상하지도 못한 그림이다. 원래의 디자인은 이제 더 이상 보이지 않지만, 나머지 빈 공간 속에 나만의 디자인이 채워질 공간이 보이기 시작했다. 


셋째, 사이트 사용자들의 경로를 미리 파악하자! 꽤 다양한 경로가 있으니 유심히 봐야 한다. 나도 모르는 사이 범인이 빠져나갈 수 있다.



넷째, 작전 수행이다! 잠복근무다! 계속해서 범인을 감시하며 살피는 거다. 모니터 앞에 앉아 주구장창 디자인을 하면 된다. 


문제점을 찾으면 해결하고, 

다시 그 문제점을 수정하고, 

다시 그 문제점을 수정하고, 

...


새로운 디자인을 추가하고, 

문제점을 찾아 해결하고, 

다시 그 문제점을 수정하고, 

다시 그 문제점을 수정하고, 

...




사이트 디자인에 대한 설명을 코멘트한다. 
실제 사이트로 발행하기 전 모든 링크를 활성화시킨다.






사실, 하얀 도화지의 보드에 새로운 정보들을 가지고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 훨씬 낫다. 내 맘대로 꾸밀 수 있으니까. 반면에, 빼곡하게 채워진 보드를 다시 재정열하고 다시 연결 짓는 것은 왠지 시간낭비 같았다. 복잡한 것을 더 복잡하게 만드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마지막 과제를 마무리하면서 나의 모든 과정을 PDF에 담고, 내 디자인에 대한 코멘트를 하나하나 달고, 전체 디자인 컨셉을 정리하다 보니, 왠지 나 혼자 해냈다는 감동에 왠지 뭉클했다. 


데스크톱 & 모바일 버전의 웹디자인



이 파일만 제출하면 호주에서의 대학원과정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진짜로 디자인은 2년간의 탐정놀이 같았다. 나 스스로도 내일을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흥미진진하게 즐겼고, 마지막 범인까지 만족스럽게 찾은 기분이었다. 탐정영화를 보면 항상, 그들은 사건을 마무리하고, 뿌듯함을 가지고 기분 좋게 자리를 뜬다. 여운을 남기며. 


나는 

내 인생의 한 챕터를 끝내고

다른 챕터로 넘어가는 

그 사이 어딘가에서

묘한 감정이었다.

                    






Copyright 2023. 정근아 All pictures cannot be copied without permis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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