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에서 이어집니다. https://brunch.co.kr/@maypaperkunah/705
책을 읽으면서, 독서모임에 참여하면서 깨달음의 순간이 찾아오면, 나는 느낌표의 감정을 표현했다.
깨달음.
찰나의 순간.
나와의 연결이 시작된다.
나의 생각을 이리저리 뒤집어 본다.
내가 가졌던 생각들에 대해 다시 생각을 한다.
느낌표를 위아래로 뒤집으면,
한 사람의 형태가 보인다.
위쪽의 점은 ‘머리’, 아래의 선은 ‘몸통’.
그것은 마치
"나"라는 존재의 축소판처럼 보인다.
즉, 나.
다시 앞뒤로 뒤집어 살펴보면,
느낌표의 이면.
느낌은 비워지고,
형태는 흐려진다.
사람의 형상은 사라진다.
내가 있고, 내가 없다.
존재는 그렇게 불완전한 균형 위에 서 있다.
보이지만 붙잡히지 않고,
느껴지지만 설명되지 않는다.
머리.
이성적 자아
나의 정신을 뜻한다.
사유하고, 관찰하고,
진실에 접근하려 하며,
상황을 재구성하고,
판단을 통해 방향을 제시한다.
몸통. / heart, gut
감각적 자아
나의 감각과 감정을 품는다.
세계를 느끼고,
직관으로 반응하며,
삶을 실질적으로 살아가게 하는 본능의 자리다.
무(無)
내가 나의 삶에 없다.
이 문장은 어쩌면 말이 되지 않는 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문장 앞에 머물면, 삶이 조금씩 모습을 바꾼다.
생각이 있고, 생각이 없다.
나의 생각이 있고, 나의 생각이 없다.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
누구의 시선으로 나를 판단하고 있었는지,
나의 생각이라 믿었던 것들이
정말 '나'의 것이었는지를 되묻게 된다.
생각과 감정의 틀을 벗어나
그저 '존재'만 남는 순간.
그 순간, 나는 사라지고
또렷하게 나를 마주하게 된다.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
깨달음의 순간은
이 질문을 또다시 던지게 만든다.
그리고 다시,
나는 나를 그린다.
나는 나를 그리면서 또다시 지운다. 그리고 그 위에, 조금 더 정직한 선을 얹는다. 그 선은 때로 흔들리고, 때로 겹쳐지고, 어떤 날은 아주 연약해서 눈에 잘 보이지 않을 때도 있다. 하지만 그려진다는 것, 지우고 다시 그릴 수 있다는 것, 그 자체가 나와의 연결이고, 내가 ‘지금 여기’에 있다는 증거다.
깨달음은 그렇게 찾아온다. 무엇을 완성하는 순간이 아니라, 무수히 수정하고 머무르는 시간 속에서 조용히 스며든다. 그래서 나는, 그림1과 그림2 사이에서 계속 살아간다. ‘나’라는 형태가 생겼다가 사라지고, 다시 나타나는 그 사이.
그곳에,
나의 삶이 있다.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동화작가가 되고 싶다.
이제 다시 시작해보려 한다.
잠시 미뤄두었던 나의 꿈을 현실의 삶 속으로 가져오려 한다.
나의 삶이 뒤집히는 순간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사라짐에서 다시 나타나는 나를 발견할 것이다.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
세상을 탐험하며 탐구하고,
나의 생각을 담아,
나의 그림으로 표현하는 삶.
나의 사명이다.
며칠 전 새로 받은, 우주의 숙제이다.
그 사명을 받아 든 순간, 나는 두려움과 설렘 사이에 서 있었다. 멈춰 있었던 시간이 길었던 만큼, 다시 걷는 한 걸음이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마치 원래 그 자리에 있어야 했던 것처럼, 잠시 잊고 있었던 길 위에 다시 나를 세우는 느낌이다.
동화작가.
그 말이 나를 숨 쉬게 한다.
나는 이야기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그 안에 나의 세계를 심으려 한다.
이제 나는,
이야기와 그림 속에서 다시 살아가려 한다.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나처럼,
잊혔다가 다시 피어나는 꿈처럼.
'나'로 다시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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