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어 포기자의 변명
바르셀로나 도착 이틀 만에 길에서 아이폰을 소매치기당했고, 큰 맘먹고 간 이케아에서는 이것저것 너무 많이 사는 바람에 계산 다 해놓은 물건을 어딘가에 흘리고 왔다. 아오 빡쳐!!!!! 안 그래도 말을 못 알아들어서 멍청이가 된 기분을 매일 느끼는 와중에 물건과 돈까지 질질 흘리고 다니니 빨리 언어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좀 덜 멍청이 같겠지.
여행을 할 때는 영어를 못해도 그냥 내가 조금 답답할 뿐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찌 됐든 밥은 사 먹을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외국에 살면서 그 나라의 언어를 못 한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궁금한 것이 있어도 물을 수 없고, 설명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고, 따지고 싶어도 따질 수 없는 것은 외국인 생활자로서 굉장히 불리한 것이었다.
비자를 확정받기 위해 찾아간 경찰서에서 뭐라 뭐라 쏟아붓는 공무원에게 할 수 있는 스페인어는 오로지 "나 스페인어 못해요" 뿐이었다. 여행의 상황이었다면, 현지인들은 그 나라의 말로 그 언어를 못한다고 말하면 다들 픽 웃고 바디랭귀지로 어떻게든 도움을 주곤 했다. 하지만 경찰서에서 만난 공무원 아저씨는 영어를 할 의지라고는 1도 보이지 않았다. 스페인어도 까딸란도 아무것도 알아듣지도 못하고 말도 못 하는 애가 도대체 왜 여기 살려고 하는 거야, 하는 표정으로 답답하단 제스처만 보였다. 거기에 이해심을 전혀 느낄 수 없는 눈빛은 내가 여기서 굉장히 약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했다. 그들은 내가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을 이해해줄 필요가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재수없지만 내가 무슨 힘이 있나,
난 여기서 당장 쫓겨나도 할 말이 없는 외국인인걸
이미 한국에서 비자도 받았고, 서류도 있으니 아무 문제가 없을 줄 알았고 만국 공통어 영어는 조금 할 수 있으니 어찌어찌 통할 줄 알았지! "나 스페인어 못해요. 당신 영어 못해요? 영어? "란 말만 스페인어로 반복했다. 영어를 말할 생각이라고는 전혀 없는 스페인 공무원은 계속 나에게 알 수 없는 말만 했다. 영어 할 줄 아냐는 말은 스페인어로 물어봤잖아! 왜 그 이야기도 대답을 안 해주는 거야!! 점점 성질이 났다. 같은 라틴어라 어순도 똑같고 어원도 똑같잖아! 근데 왜 영어를 못 하는 거야 도대체!! 내가 한국말을 알아들어달라고 한 것도 아니잖아!!!
진전 없는 대화가 답답했는지 뒤쪽에 서 있던 파키스탄 아니면 인도 어디선가 왔을 것 같은 어린 남자애가 나에게 몇 가지 스페인어 단어를 천천히 말해줬다. 하지만 그 단어도 난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내가 계속 모른다는 말을 하자, 뒤에 있던 다른 아저씨가 영어로 "서류를 다 가져왔냐고 묻는 거야, 온라인에서 약속은 잡고 왔냐는데?"라고 통역을 해줬다. 올레! 드디어 알아들었다! 물론, 물론이지! 이렇게 다 프린트하고 카피도 했는걸. 품 안에 안고 있던 서류를 주섬주섬 꺼내서 보여주고 나서야 공무원 아저씨의 한심한 눈빛이 거둬졌다.
"땡큐 쏘 머치! 설마 여기서 영어가 한 마디도 안 통할 줄 몰랐어요."
"나도 처음에 그랬어. 스패니쉬들이란!"
그래서 나는 스페인어를 열심히 공부하여 유창한 언어 실력을 갖게 되었습니다....라는 결론이 가장 이상적이겠지만, 난 왠지 이상한 방향으로 생각이 닿았다. 내가 뭐 여기 평생 살 것도 아니고, 내가 공부를 해봤자 얼마나 늘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거다. 내가 보기엔 너무나도 비효율적인 성수 일치와 동사 변화를 마주한 순간 공부에 대한 흥미가 뚝 떨어진 것이 진짜 이유지만, 암튼 이곳이 낭만적인 나의 '여행지'가 되기 위해서는 내가 모르는 것이 더 많은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래, 1년 놀겠다고 회사 때려치우고 여기까지 날아왔는데 열심히 공부까지 할 필요가 있나. 하기 싫은 건 안 하면서 스트레스 받지 않고 살고 싶었다. 알고 싶은 것만 알고, 불편하지 않을 만큼만 배우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식당에서는 누구보다도 유창하게 주문을 했고, 보통의 상황에서는 단어 몇 개로 눈치껏 알아듣다가 "no puedo hablar español! ( 스페인어 못해요!)"라는 말만 하고 왔다. 알아듣지 못해서 불편할 때도 가끔 있었지만 대체로는 알아듣지 못해서 편했다. 가끔은 멍청이 같았지만 그래도 늘 낯선 맛이 있어서 좋았다. 여행도 생활도 아닌 나의 어정쩡한 바르셀로나 생활과 나의 언어 실력이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