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MAYzing Life in Hawaii ep.21
어느 날인가 어학원에서 새로운 한국인 여성분이 눈에 띄었다. 나보다는 한참 언니뻘되는 분으로 시원시원한 말투로 통성명을 나눈 후 첫 만남부터 집에 초대를 해주셨다. 이곳에 등록한 지는 나보다 몇 달 먼저였으나 잠시 한국에 다녀오느라 그간 못 나왔었더라며... 얘기를 나누다 보니 이 분은 와이키키에 아예 집을 매매해서 렌트비 걱정 없이 지낸다 했다. 심지어 그 집은 하와이 오기 전부터 내 위시리스트에 있던 집이라 마냥 부러울 뿐이었다.
상황에 따라 처지에 따라 생각하기 나름이겠지만, 자금 여유가 있는 분들은 하와이에 집을 사서 한국과 왕래를 자유롭게 하다가 (하와이는 부동산에 대한 수요가 꾸준한 곳이다 보니) 언젠가 집값이 오르면 시세차익을 기대하는 것 같았다. 물론 양도세라던가 유지비는 무시 못할 수준이기 때문에 직접 사용하지 않는 기간에는 렌트를 하는 방법을 고려한다고... (아마 기간이 잘 맞았으면 내가 들어왔을 수도 있었겠다 싶었다.)
한국서부터 눈독을 들였던 바로 그 콘도는 역시 훌륭했다. 나는 그즈음에 마땅한 조건의 이곳 숙소를 찾지 못해 다른 곳에 거처를 마련했지만 막상 와서 직접 보니 알라와이 골프코스(Ala Wai Golf Course) 뷰가 시원하고 내부도 알맞게 적당했다. 하지만 언니 말에 따르면 오래돼서 그런지 저층에 사는 한국지인의 집엔 가끔 쥐가 드나들어 골치라 했다. 이 말을 들으니 역시 살아봐야만 아는 것 같기도 하고... 맛있는 떡라면을 잘 익은 김치와 함께 대접받고, 쌀밥과 몇 가지 장아찌까지 내어주신 덕에 아주 기분 좋은 점심이었다. 정말 라면은 끝내주는 미식임에 틀림없다.
대화를 나누면서 (그 뒤로도 몇 번 더 만나고 해 보았지만) 언니와 내가 많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관점에선 상당히 독특한 분 같았다. 모든 식자재부터 세간들을 싹 다 한국에서 가져와 매 끼니를 집에서 만들어먹는다고... 여기 음식이 입맛에 안 맞을 뿐 아니라 굳이 외부 사람과 어울리기도 싫다 하여 이 점이 나와 많이 다르다 싶었다. 특히 주변인들에 대한 막말 시전은 감당하기 버거운 부분이기도 했다. 뭐 각자의 생각과 판단,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개인적인 부분은 존중되어야 하지만 그 뒤로도 이 분과는 그리 오래 관계를 맺지 못했다. 어학원마저도 얼마 안 있다가 그만두었기 때문에 지나가는 인연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 날 라면을 먹으며 언니를 통해 알게 된 꿀 정보! 바로 저녁에 무료로 영어를 가르쳐주는 성인학교(Adult School)였다. 본인은 되려 지금 다니는 (오전에 수업하는) 정규 어학원보다 이곳의 교육이 되려 좋다며 강력 추천을 해주셨다. 심지어 교육비가 전액 무료라는 말에 나는 왜 이런 것들을 알아볼 생각도 못했을까 싶었다. 역시 사람은 교류를 해야 풍성해지는 게 맞는 것 같다. 내가 그만큼 부지런하지도 못하고... (반성)
하와이에서 1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체류기간이었지만 명세기 학생비자를 취득하고 간 이상 본분에 충실하고팠다. 살면서 언제 다시 이토록 영어에 매진할 기회가 있을까! 하는 마음과 나름의 간절함 덕분인지 아님 미국교육방식이 나와 잘 맞는 건지 ㅎㅎ 누가 시키지 않아도 챗GPT를 튜터 삼아 예복습까지 착실하게도 했다. 왜 정작 학생 시절엔 이걸 모르고, 이렇게 사회밥을 한참 먹고서야 공부할 수 있는 게 참 소중하단걸 느끼는 건지...
그런 찰나에 귀한 정보를 입수했으니 바로 실행에 옮기기 위해 등록기간에 맞춰 학교로 찾아갔다. 등록 전 배치 시험(Placement Test)이 필수과업인데, 기존 어학원에서 진행했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매우 체계적이고 엄숙한 가운데 개인당 제공된 모니터 앞에 착석하여 두 시간 가까이 학생의 영어 능력 수준을 평가하게 된다. 이 시험은 듣기, 읽기, 문법, 어휘 등을 평가하여 적절한 수업 단계로 배정하는 데 사용된다고 했다.
마치 수능 때처럼 긴장감도는 분위기에서 어렵사리 테스트를 마쳤다. 이제 하와이에서 어학원을 다닌 지 두 달이 채 되지 않은 기간이었으나 스스로도 실력이 많이 올라온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느낌은 다행히도 틀리지 않았다. 테스트 직후 바로 채점기로 점수를 확인해 주는데 감독관이었던 할머니 선생님께서 내 자리로 찾아와 "엑설런트"하며 정말 시험을 잘 보았노라 진심 대견한 듯 칭찬을 해주셨다! 엄청 뿌듯하고 속으론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
반 배정 시험 결과에 따라 나는 중2 수준의 클래스에서 약 3개월간 월요일에서 목요일까지 주 4회 수업(봄, 여름, 가을 각각 학기당 12주 운영)을 받으며 이곳서 하루 두 시간씩 역시 좋은 사람들과 함께 나의 하와이가 조금 더 넓어져 갔다. 담임인 K선생님은 하와이의 일반 중학교 교사이기도 한데 가끔 미국 교사 연봉의 형편없음을 불만으로 얘기한 걸 보면 밤에 어덜트스쿨에서 추가 근무? 부업처럼 일하며 부족한 돈을 더 버는 모양이었다. 이런 속 이야기가 허심탄회하게 나올 수 있는 분위기였다. 학생들이나 선생님이나 다들 연배가 고만고만했으니 ㅎㅎㅎ 물론 중국인 10대 여학생이 한 명 있긴 했지만 대부분이 30~60대 사이였고, 그중 난 어리거나 중간쯤? 에 속했다. 국적은 일본인이 넷, 중국인 셋, 한국인 넷, 남아메리카 사람 둘까지 총 열세명 가까이 되는 학생 수에 그마저도 결석하는 이를 빼면 하루에 6~7명이 자리를 지키는 듯했다.
등록 시 구입한 교과서도 병행하긴 했지만 K는 매일 그날자의 신문을 나눠주고 아티클 하나를 주제로 토론하는 방식을 즐겼다. 신문에 사용된 단어나 문장 앞에서 난 거의 까막눈 수준이나 다름없었기에 내게 이 방식은 상당히 무리였다. 하지만 K는 경력자답게 제법 수업을 잘 이끌어 갔다. 내가 느끼기에 K는 하와이안답게 꽤나 느긋하고 유머 있고 나른한(?) 캐릭터였다. 가끔 술자리를 만들어 학생들과 수업을 제끼고 함께 유희를 즐기는 것도 완전 내 스타일이었고! 아직도 내 SNS에 엄지척과 댓글을 남기는 츤데레 같은 스윗 가이기도 하다.
학생들의 스펙도 면면이 훌륭했다. 일본의 항공사 직원, 공군 신분으로 하와이 근무지 파견을 나온 이들부터 일본 유명 호텔리어도 있었다. 업무의 연장선이다 보니 어덜트 스쿨에서 만난 일본 학생들의 영어실력은 어학원 친구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한국인 중에는 이민을 와서 아예 정착하고 사시는 분도 계셨다. 현재 직업이 있지만 이 분의 꿈은 영어를 더 잘하게 되어 호놀룰루 공항에 취직하는 거라 했다. 그렇게만 된다면 3년 뒤엔 항공료를 부담 없이 이용할 수 있으니 지금 성인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얼마 전 한국에서 조우했던 우리 김교수님도 이곳서 만난 좋은 인연이고! (안식년에 하와이대학으로 교류차 온 의사이다.) 중국분들과는 의사소통에 조금 어려움이 있긴 했지만 이 분들도 모두 영어학습에 진심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아침 8시 반이면 어학원에서, 한낮에는 친구들과 어울리며 와이키키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다, 저녁 6시엔 다시 책상으로 돌아와 공부를 하는 이런 진심 어린 40대 아주머니를 어찌 말린단 말이오! ;)
물론 다 한때지만 말입니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