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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월 햇살 Mar 19. 2024

수줍은 열 일곱 소녀의 '꿈'

인생에서 가장 도전적이었던 '첫' 순간

십대의 나는 수줍음이 많은 조용한 아이였다.

‘정말 해보고 싶은 그 무언가’를 만나기 전까지는.


내가 입학한 고등학교는 방송반이 꽤나 유명했다. 입학과 동시에 그곳에 꼭 들어가고 싶다는 목표가 생겼다. 사실 초등학생 시절부터 기자, 아나운서 등 방송일에 관심이 많았다.

눈에 띄는 것, 나서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기에 방송반 입성이 살아온 열여섯 인생 중 가장 가슴 떨리는 도전이었다.      


1차 실기를 통과하기 위해 밤낮으로 대본을 외우고 또 외우며 연습에 집중했다. 잠드는 순간까지 대본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오롯이 내 선택 아래 노력이라는 걸 하고 있었기에 매 순간이 설렘과 기대로 가득했다.

드디어 그날이 왔고 내 순서가 되자 떨리는 마음으로 방송실 안에 들어가 커다란 마이크에 그동안 연습했던 대사들을 쏟아내었다. 부스 밖에서 귀를 쫑긋하고 집중하는 선배들의 예리한 눈빛에도 수줍음이 담긴 쪼그라듦은 없었다.


그때 느꼈다.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나는 한계가 없을 수도 있겠구나’.     


그렇게 1차를 합격하고 2차도 무난히 통과했다. 방송반 선배 중 나를 진심으로 응원해 주는 지지자가 생기기도 했다. 선배가 귀여운 글씨로 정성스럽게 써 내려간 편지 속에는 나의 열정과 실력이 멋지다는 칭찬과 함께 3차도 무난히 합격할 거라는. 그래서 하루빨리 방송반을 함께 이끌어 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는 희망적인 내용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그저 좋아하는 일을 위해 열심히 했을 뿐인데 인정과 칭찬. 고마운 인연이 따라오는 게 마냥 신기했다.      


앞으로의 고등학교 생활이 이례적으로 기대되고 설렜다.

무섭다고 소문난 방송반 분위기와 달리 3차 심층 면접도 화기애애함 속에서 무난히 잘 마쳤다. 마음속에는 이미 학교 내외 각종 행사마다 방송 부스 안에 앉아있는 내 모습으로 가득했다. 구름위를 동동 떠다니는 황홀함이 매일매일을 감쌌다.


드디어 최종 결과가 발표된 날.

예상과 달리 합격자 명단에 내 이름이 없었다.

혼란스러움이 온몸을 뒤덮었다. 선배에게 쉬는 시간에 달려가 불합격의 이유에 대해 물었다. 선배가 흔들리는 눈빛으로 망설이다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 당시 담임선생님이 방송반 선배들에게 얘는 합격시키지 말라며 신신당부의 말을 무겁고 무섭게 내려놓고 갔다고 했다. 방송반에 들어가면 입시 학업에 지장을 받는다는 게 이유였다.


오로지 내 몫이어야 했던 선택과 후회의 영역을 누군가에게 빼앗긴 것 같아 억울함과 화가 났다. 미웠다. 나 자신이 날개 꺾인 새 같았다. 그때 느꼈던 무력감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했던 열일곱 소녀에겐 감당하기 어려운 절망이었다.


인생 가장 큰 도전이자 좌절이었다.      

이미 지나간 일이지만 아주 가끔 생각이 떠오르면 상상해 보곤 한다.

그때 방송반 활동을 했다면 내 인생과 마음의 한 조각이 어떤 그림과 색깔로 채워져 있을까.     

비록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진 않았지만 꿈꾸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던 열일곱의 설레는 마음과 뜨거웠던 열정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이미지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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