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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y Nov 16. 2022

취향이 의심스러워지는 순간

2010년대 중반쯤이었을까, 패션에 일가견이 있다는 사람들을 필두로 한국에도 아메카지 착장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물론 당시에는 매니아 층 위주로 유행하는 스타일이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 모습이 멋스러워 보였다. 옷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도 그때쯤이다. 아메카지 스타일을 갖춰 입기 시작하며 옷 입는 즐거움을 알았다.


처음 아메카지 스타일을 갖춰 입기 시작했을 때, 벙벙한 핏의 바지가 낯설었던 기억이 있다. 일자 핏의 바지만 입어왔던 나에게 상당히 어색한 일이었다. 어색함을 무릅쓰고 계속해서 입다 보니, 나름은 어떻게 벙벙한 핏의 바지를 소화해야 하는지 감을 익혔던 것 같다. 지금은 아메카지 스타일을 고수하는 건 아니지만, 아직도 내 옷장에는 통이 큰 바지가 가득하다. 그때 생긴 바지 핏에 대한 취향은 변치 않았기 때문이다.


아메카지는 과거 미국인들의 일상복에서 유래했다. 아메리칸 캐주얼 스타일이 일본으로 건너왔고, 그것을 일본식으로 발음하게 되면서 '아메카지'라는 이름을 갖추게 되었다. 아메카지 스타일을 전개하는 브랜드의 성장으로 인해 어느덧 아메카지는 일본스러움을 표상하는 하나의 패션 장르로 자리 잡았다. 현재는 아메카지 스타일의 근원지였던 미국으로 일본풍 스타일 '아메카지'가 역으로 수출되기도 한다.


미국은 실용주의의 발상지이다. 미국식 자본주의의 발달에 큰 영향을 미친 학문이다. 실용주의는 유럽 중심의 철학적 사고에서 벗어나, 현실에 적용 가능한 이론이 필요하다는 사회적 요구에서 출발했다. 이러한 실용주의적 경향성은 옷차림에도 영향을 미쳤다. 충격을 주어도 웬만하면 찢어지지 않고 오염에 강한 튼튼한 옷, 그리고 주머니가 많이 달려 수납이 용이한 옷, 노동하기에 편안한 옷을 선호했다. 격식 있는 의복 문화를 강조하는 영국의 문화와 비교해보면 그 문화적 차이가 와닿는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겪으며 그러한 미국의 실용주의적 문화를 적극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문화적으로 미국의 강력한 영향을 받는다. 옷차림 또한 마찬가지였다. 일본인들은 미국인들의 실용적 옷차림을 동경했다. 실용성은 물론이고, 하나의 패션 장르로써 미국식 옷차림을 받아들이기에 이른다. 직접 미국 옷을 수입해 입는 경우가 많았으나, 일본인의 작은 체구에 비해 미국산 옷은 상당히 컸다. 일본인은 통을 줄이는 대신 신장에 맞게 바지 기장을 줄여 입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메카지의 특징 중 하나인 벙벙한 바지 핏은 여기서 비롯된다. 그 바지 핏을 보고 아메카지의 독특한 매력에 빠졌거늘, 그것이 동양인의 신체적 특징 때문이었다고 하니 묘한 기분이다. 서양 문화에 대한 동경으로부터 아메카지가 탄생했다는 사실은 더욱 의아하게 느껴진다. 우리의 미적 취향은 어디서부터 오는 것일까?


생각해보면 아메카지 장르의 탄생처럼, 그것의 아름다움이 문화적 우월성에 대한 호감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대표적으론 쌍꺼풀 있는 눈에 대한 선호가 그렇다. 동양인은 서양인에 비해 쌍꺼풀을 갖고 태어날 확률이 낮다. 쌍꺼풀 수술은 특히 한국, 중국, 일본에서 성행하고 있다. 만약 동양의 어느 한 국가가 오늘날의 미국처럼 세계의 흐름을 지배하는 국가로 자리했다면 어땠을까? 오늘의 할리우드가 동양에 위치해 있고, 명작이라고 일컬어지는 영화 속 주인공들이 모두 쌍꺼풀이 없는 눈을 하고 있었다면 어떨까? 물론 현재는 서양인에 대한 동경으로 쌍꺼풀 수술을 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쌍꺼풀은 '아름다운 것' 외꺼풀은 '고쳐야 할 대상'으로 여겨지는 사회적 분위기에 서구 중심적 미적 취향이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개인적 선호를 비판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쌍꺼풀 수술이 졸업, 취업 시즌에 거쳐야 할 필수적인 관문쯤으로 여겨지는 것은 거북하다. 쌍꺼풀이 절대적 아름다움인 양, 없으면 안 될 것인 양 말하는 사회 분위기는 명백히 문제다. 주관적이고 임의적으로 만들어지는 취향이 객관적인 무언가로 비칠 때, 사회는 하나의 취향만을 강요하곤 한다. 이는 개인적 차원의 취향 선택권을 앗아가는 것이다. 미적 경험을 획일화한다. 아메카지가 그러했던 것처럼, 미적 기준은 그것의 대상이 절대적인 미를 가졌기 때문에 정립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특정한 사회적 흐름에서 우연히 나타난다. 고로 당연히 따라가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만한 당위성을 갖고 있지도 않다.


통이 큰 바지가 어색했던 내 옷장엔 어느덧 통 큰 바지밖에 남지 않았고, 요즘에는 다시 일자 핏 바지를 입은 모습이 괜찮아 보이기도 한다. 아름다움을 정의해보라고 한다면 무어라 말하기 어렵지만, 최근 내가 '아름답다 느끼는 것'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다. 미를 말하기 위해서는 대상이 필요하고 그 대상과 나 사이의 느낌이 필요하다. 그 느낌은 실재하는 미적 대상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다양한 사회 문화적 배경, 개인적 경험, 미적 태도가 유기적으로 얽힌 채, 아름다움에 대한 느낌을 만들어 낸다. 그것을 미적 취향이라 할 수 있다.  


사람마다 미감을 느끼는 이유는 다양하고, 그 원인 복합적인 사회적 과정이다. 아메카지 스타일, 쌍꺼풀에 대한 미적 취향을 단순히 지양하라는 것은 아니다. 그 취향이 외부적 요인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한들 애써 부정할 필요는 없다. 외부적 요인과 상관없이 개인적 취향을 가질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객관적 아름다움을 정의내릴 수는 없다는 점은 인정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주관적(사회적) 느낌을 절대적 아름다움이라 생각하기보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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