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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y Nov 26. 2022

"어른이니까 알지"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중이었다. 여느 때처럼 사색에 잠긴 척하며, 어깨너머로 들려오는 대화 소리에 생각을 맡기고 있었다. 굳이 타인에게 관심을 표하며 불편함을 주고 싶지는 않지만, 이상하게 몸에 배어있는 습관이다. 벽만 둘러 쌓여 있으면 주변의 대화 소리가 곧잘 들려온다. 들려온다는 건 물리적인 과정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살짝 생각만 기울이면 그들의 대화 속으로 깊이 빠져든다는 것이다.


그날도 마찬가지로 내 뒤편에 서 있던 모자의 대화에 빠져 버렸다. 아이는 갓 초등학교에 입학한 나이쯤으로 보였다. 그들의 대화는 버스 안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대한 아이의 궁금증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왜 버스에서는 조용히 있어야 하는지, 왜 카드를 찍어야 하는지, 벨은 왜 누르는 것인지. 아이의 어머니는 아이의 질문에 꽤 친절하게 자세히 답변해 주었다.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바로 다음 궁금증을 질문으로 던졌다. 그렇게 몇 번의 질의응답이 끝나고 난 후 아이는 마지막 질문을 했다. "그런데 엄마는 어떻게 그런 걸 다 알아?"


어머니의 대답이 인상 깊다. "어른이니까 알지." 어른이니까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 아이의 어머니가 무한정 쏟아내는 아이의 질문에 지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런 대답밖에는 할 수 없다는 처지가 백번 이해된다. 정말로 어떻게 알게 된 것인지 모를 가능성이 크다.


사회화는 학자들에 의해 개념을 달리하긴 하지만, 공통적인 지점을 꼽자면 '체화'이다. 체화는 몸에 배어든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우리는 보편적으로 사회화란 사회에 속한 개인들이 사회의 규범과 역할을 체득하는 과정이라 정의할 수 있다. 그 과정이 자발적인가 비자발적인가에 대해선 논의의 여지가 있지만, 체험하며 배우게 된다는 것은 틀림이 없다.


예컨대 '공공질서'라는 개념을 배운다고 생각해보자. 공공질서는 무엇일까? '버스에서 큰 소리로 대화하지 않는 것', '영화관에서는 핸드폰 무음 모드로 설정하거나 전원을 꺼두는 것' '학교 복도에서 뛰어다니지 않는 것' 최근에 들어서는 '실내에서는 마스크를 착용하는 것' 등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무한정 생각해볼 수 있다. 아이의 어머니가 이 모든 개념을 하나하나 받아쓰기하면서 배웠을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각각의 구체적인 사례는 말 그대로 몸소 사회를 살아가며 체득하는 것이며, 우리가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공부와 학습의 개념과는 거리가 멀다. 각각의 구체적인 예시들은 그것을 표상하는 언어와 뉘앙스로 연결되어 있으며, 타인의 입장을 상상해보고 직접 그 역할이 되어보는 일련의 자연스러운 과정을 통해 인간의 몸에 체득된다. 그래서 아이의 어머니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던 것이다. "어른이니까 알지"라는 말 밖에는.


사회화란 자연스러운 체화의 과정이지만 구체적인 단계를 인지할 수 없다는 성격 탓에, 그것의 산물이 논리적 당위가 없음에도 이미 체화되어 버린 경우를 마주하곤 한다. 사회 규범이 체화되었다는 것은 특정한 행동이나 대상에 대해 별다른 고민의 과정 없이도 사회의 다수가 합리적으로 여기는 반응을 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즉각적인 반응은 사회적으로 보았을 땐 합리적이고 당연한 행동이지만, 그것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두고 생각해보면 꽤나 의아할 때가 많다.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어린 동생이 있다. 동생이 지금보다 어렸을 때는, 동생과 같이 밖을 나서면 "애 아빠가 젋네"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동생이 겨우 허리를 펴고 앉아있을 수 있게 된 쯤이었다. 한동안 동생은 조용히 앉아 바닥에 손을 휘저으며 놀고 있었다. 뭘 가지고 그렇게 놀고 있나 들여다봤는데, 자그마한 바퀴벌레가 동생의 손을 피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너무 놀래 얼른 바퀴를 때려잡고 동생의 손을 깨끗이 씻어주었다. 말도 못 알아듣는 동생에게, 이런 벌레는 그렇게 만지고 놀면 안 된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 손짓 발짓해가며 애를 썼던 기억이다. 동생은 어느덧 중학생이 되었고, 지금은 파리 한 마리가 날아다니는 것도 무서워한다. 동생은 언제부터 벌레를 무서워하게 되었을까? 그건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내 손짓 발짓을 알아듣지 못했을 거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올해 초에는 이사를 했다. 입주 청소를 하고 짐을 옮기는 동안에 현관문을 너무 오래 열어두었던 탓인지, 한동안 바퀴벌레로 골머리를 앓았다. 열 마리쯤 때려잡은 뒤로는 그나마 초연해졌다. 반쯤 포기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생각해보면 그 어린 동생이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던 바퀴벌레인데, 한 마리 한 마리 등장할 때마다 호들갑을 떠는 스스로가 의아하게 느껴졌다. 나는 언제부터 바퀴벌레를 두려워한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알 수 없다. 어쩌면 버스에서 아이의 어머니가 말했던 '어른'이 된다는 것은, 나도 모르는 사이 바퀴벌레를 무서워하게 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당위성 없이 무언가를 혐오할 수 있다는 건 아찔하게 느껴진다. (당위가 있으면 혐오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님을 밝힌다. 그 당위마저 사회화에 의해 체화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사회화는 나도 모르는 사이 사회의 구조가 내 몸속에 배어드는 것이다. 아이의 어머니가 설명했던 '버스 안에서의 예절'을 큰 고민 없이도 잘 지켜낼 수 있는 사람이 되는 동시에, 달리 설명할 이유도 없이 바퀴벌레를 싫어하게 되기도 한다. 전자와 후자의 뉘앙스는 조금 다르지만, 접점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인간 활동의 가능성을 좁히는 현상이라는 데에 있다.


그 가능성의 한정은 하늘에서 떡하니 떨어진 절대 진리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회에서 진리라 여기게 되어버린, 아주 임의적인 기준에 의해 정의된다. 시대에 따라 가변적이고, 가끔은 논리적인 당위성을 찾기 어려울 때도 있다. 사회의 요구에 따라 가능성을 좁히는 일은 두렵게 느껴진다. 사회화를 거치며 사회에서 인정할만한 예의 바른 사람이 될 수 있지만, 이유 없이 특정한 대상을 혐오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 있기에 말이다. (심심찮게 우리 사회에서도 이유 없는 혐오를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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