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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y Nov 03. 2022

'몰강스럽다'

몰강 몰강 ~ 하다는데 뭐가 문제야?

몰강스럽다


'몰강스럽다'에서 떠오르는 이미지는 '말랑말랑', '유연함', '몰캉' 정도였다. 대상을 직접 생각해보자면 슬라임, 찰흙, 푹 익은 홍시 정도. 예상과 달리 고유어 '몰강스러움'은 '인정이 없이 억세며 성질이 악착같고 모질다'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 단어와 그 의미를 두고 초점을 왔다 갔다 놀려봤지만, 도저히 한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의미와 단어 사이의 유사성을 발견할 수 없는 탓이었다. 몰강스럽다의 의미는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세계 밖에 놓여 있었다. 


몰강스럽다를 일상적으로 사용하던 때는 어땠을까? 얼마나 많이 사용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몰강스럽다고 하면 그 부정적인 뉘앙스를 척! 하고 알아차릴 때쯤 말이다. '몰강'이란 글자의 모양, 발음, 그것의 뉘앙스로 미루어 상상할 수 있는 의미에는 특정한 범위가 존재한다. 인정이 없고, 억세고, 악착같고, 모진 성격 등의 의미로 사고를 연결하기 위해서는, 그 의미의 연결망을 따라갈 수 있는 문화적 배경을 체화하고 있어야 한다. "옆집 누구는 담 너머로 떨어진 감까지 다 주워갔다네, 사람이 어찌나 몰강스러운지..." 아쉽지만 나는 당시의 사람들과 같은 문화적 시공간에 위치하지 않으며, '몰강스럽다'는 단어를 마주한 것을 마치 고대의 유물을 발견한 것인 양 떠드는 수밖엔 없다.


손가락 하트


언어뿐만 아니라 타자와 소통할 수 있는 그 어떤 매개도 없던 태초의 상황을 가정해보자. A와 B 두 사람이 있다. B는 해변을 거닐고 있다. A는 그런 B를 멀찍이서 바라보고 있다. 그러다 B의 곁에 얼마 전 누군가의 발목을 물어 죽음에 이르게 한 바다 전갈이 등장한다. A 그것이 경험적으로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할 만큼 위험하다는 것은 알고 있다. 심지어 B는 전갈이 위험한 생명체인지 알지도 못한다. 직접 다가가 전갈을 물리치기엔 시간이 부족하다. B에게 그 위험을 알려야만 한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두 팔을 교차해 X자를 표시할까? 소리를 크게 세 번 지를까? 아니면 손가락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해볼까? 무엇을 해도 B에게 위험을 전달할 수 없음은 자명하다. 어떠한 상징 매개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A는 B에게 위험을 알리기 위해 손가락 하트를 선택했다. 심지어는 B가 손가락 하트를 보고 아주 우연히도 위험에서 벗어났다. 그 사건 이후 A, B에게 손가락 하트는 바다전갈, 위험, 목숨, 생명, 위기 같은 개념들과 유기적으로 연결된다. 손가락 하트는 표현 그 자체로 위험을 내포하고 있지 않다. 아주 우연하게도 위험한 상황을 벗어나게 한 수단으로써 의미를 갖게 된다.


한국 사람이 다른 나라에서 손가락 하트를 내보이자, 사람들이 혼비백산하고 자리를 뜨는 모습. 불가능한 상상일까? (Okay 사인은 브라질, 베네수엘라, 멕시코 등지에서 'Fxxk you'와 유사한 의미로 사용된다.) 상징 매개는 문화적 배경에 기인한다. 그리고 문화에 속한 사람들이 상상할 수 있는 개념의 범위를 한정 짓는다. 언어도 마찬가지이다. 1:1로 무언가를 표현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것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살펴보면 미시적인 행동 실천 그 자체가 우연히 언어의 의미를 생성한다. 또한 그 사회에서 공유하는 문화적 배경에 따라 재구성된다. 사회에 속한 개인들은 그 문화적 배경에 동조하며 일상을 살아간다. 동조하지 않는 것은 생존할 수 없음을 의미하기에, 문화적 배경을 체화하는 수밖엔 방법이 없다. 손가락 하트 대신 두 팔을 교차해 X자를 그린다면 아무도 위험을 알아챌 수 없다.


심심한 사과


'사과를 하는데 심심하게 하면 되느냐'는 일차적인 반응, 그리고 '마음 깊이서 우러나오는'이라는 '심심한'의  의미를 어떻게 모를 수가 있냐는 사람들의 한탄 정도로 논란을 정리할 수 있겠다. 언어의 위기에 대한 경고는 아주 오래전부터 심심찮게(드물지 않고 꽤 잦게) 논쟁거리로 떠올랐다. 온라인 공간에서의 소통이 한글을 파괴한다며, 줄임말 혹은 신조어에 대한 반감을 표하는 식이었다.


상징 매개로써 언어는 문화에 대한 동조를 의미한다. 지배적인 문화적 배경에 동조하지 않는다면, 일상을 살아가는 것이 어려워질 수 있다. 사용하는 언어와 대상 사이에 존재하는 유사성을 재빨리 파악할 수 없다면 사회 속에서 '합리적'이라 여겨지는 행위를 수행할 수 없다. 언어는 문화를 지탱하는, 그리고 경험적으로 정립된 질서이다. 어쩌면 '그것도 몰라?'라는 반응도 당연하다. 문화에 동조할 수 없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기 때문이다. 특정 세대에서 의미가 단절될 수 있다는 건 공포스러운 일이다. 손가락 하트를 보고 혼비백산하는 외국인들을 보는 것처럼, 같은 문화권 안에서 상징과 반응의 불일치가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규격화된 합리적 행위에 대한 공동의 의미 연결 망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위험을 알려야 할 때 손가락 하트를 보일지, 손으로 엑스자를 표시할지, 소리를 세 번 지를지 모르는 것과 같은 층위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화적 배경은 시간, 공간, 행위자에 따라서 맥락을 달리한다. 문화적 맥락이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의미 상징체계의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실천에 의해서 존재의 당위를 획득한다. 그 자체로써 존재할만한 가치를 내포하는 것이 아니다. 변화는 어느 날 갑작스레 일어나지 않는다. 특정 단어가 역할을 다한다는 것은, 실천 맥락에서 그것을 사용할 의의를 잃었음을 의미한다. 대안이 많은 상황에서, 우연히 선택받지 못하면, 어느 날은 그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어색한 상황에 이르게 된다. 몰강스러움이 부정적인 뉘앙스를 품었던 시대에서, 이렇게 몰강스러움을 가지고 호들갑을 떨며 글을 쓰는 사람이 살아가는 시대까지 오는 과정은 연속적인 흐름이다. 


오늘의 맥락 안에서 누군가 "저 식당 사장님은 참 몰강스러워."라고 말하고 아주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다면 어떨까? 대화를 듣고 있는 사람들은 의아한 생각이 들 것이다. '몰강 몰강~ 하다는데 뭐가 불만인 거지?' 물론 고유어 공부를 열심히 한 사람이라면, 몰강스러움의 부정적인 뉘앙스를 알아챌 수도 있다. 그러나 일상적인 맥락 안에서 아주 즉각적으로 그 의미를 알아채기는 사실 어렵다. 몰강스럽다를 대체할 수 있는 언어는 수없이 많다. '정이 없다' '모질다' '억척스럽다' 실천의 빈도에 의해서 '몰강스럽다'는 뉘앙스를 잃었다. 문화적 맥락 자체가 파괴되는 것도 아니다. 문화적 맥락은 실천의 다음 순서로 형성된다. 충분한 실천 뒤에야 문화가 형성된다. 언어는 본질적으로 의미를 갖고 태어나지 않는다. 우리의 실천 그 자체로써 의미를 갖는다. 우리가 특정 단어의 소멸을 그 자체로 언어의 위기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는 이유이다.


그럼에도 '심심한'이 '마음 깊이서 우러나오는'이라는 의미를 잃고 있다는 것이 공포스럽다면, 아마 그것은 인간의 한정적인 생애 때문일 것이라 짐작한다. 문화는 연속적으로 변화하는 데에 비해 인간의 생애는 불연속적이다. 시작과 끝이 존재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짧게나마 경험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문화를 고정 불변한 절대적인 것인 양 착각하곤 한다. 그러나 '심심한'은 하늘에서 별똥별이 떨어지는 것처럼 절대적인 자연의 힘에 의해 최종적으로 결정된 것 아니다. 그것의 의미는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고, 인간에 의해 파괴될 수 있다. 심지어 먼 미래의 어느 날에는 '심심한'이 '쉬지 않고 움직이는 활동적인 성질'을 의미할 수 있다. 새로이 정립된 문화의 질서 안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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