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의 생장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 어떠한 의미도 부여하지 않고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자연법칙 대로 자라난다. 현재 주어진 상황 속에서, 의지만큼 우두커니 존재할 뿐이다.
반면 인간은 의미를 부여하고, 옳고 그름을 판단한다. 더 나은 식물, 더 좋은 식물은 없지만 더 나은 사람, 더 좋은 사람은 있다. 그리고 그것을 향한 열심을 우리는 의지라 표현한다. 그렇게 정의된 의지도 가치 판단의 영역이다. 우리는 관습적으로 인정받을만한 '더 나은 사람, 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마땅히 의지를 품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의지박약'이라 지탄받기 일쑤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인정받을만한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의지는 때로 우리를 좌절시킨다. 우리는 우리가 세상의 주인공이라 믿지만, 세상은 우리에게 그다지 관심이 없다. 요컨대 세상이 그리 호락호락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결과는 언제든 노력을 배신할 준비가 되어 있다. 절망은 언제나 희망의 뒤를 따르고 있다.
그러니 인간적 의지보다야 식물적 의지를 본받는 편이 유리하다. 식물은 아무런 기대도 희망도 없지만, 그냥 그런대로 잘 자라난다. 누군가 자신을 보고 웃자라 못생겼다 말해도 식물은 괘념치 않는다. 거짓 없이 자기 의지만큼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소설 채식주의자 속 영혜는 육식을 거부하다 끝내는 식물이 되어버리려고 한다. 흔히 영혜를 폭력으로부터 도피하는 인물이라 해석하고는 하지만, 관습을 온몸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체념의 정서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한 사회적 기준이 있는 거라면, 그것을 향한 희망을 거부하는 것 또한 의지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